98화
<그런데 왜 아바마마는 형님이 늘 바쁘다고 하셨을까요? 희한하네요.>
어린 온은 고개를 갸웃했다. 륜은 질문에 대한 답을 알았지만, 굳이 설명하지 않고 동생에게 손짓했다.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네요. 그나저나, 이리 와서 저랑 같이 고양이를 보지 않으실래요?>
<우와, 그래도 되나요?>
<그럼요. 이 황궁 안에서 아우님이 하지 못할 게 뭐가 있겠어요.>
이때 륜의 음성은 독기를 머금고 살짝 비틀려 나왔다. 그러자 온은 문득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많지요. 황궁에서 하지 못하는 게 너무 많습니다.>
<아. 예를 들면요?>
륜은 서늘하게 웃었다. 네가 금지당한 게 대체 뭐가 있다고?
<어마마마는 제게 아무리 급해도 뛰지 말라고 하십니다. 저도 마음이 급하면 뛰고 싶을 때가 있는데 말이죠. 그리고 언젠가 손에 가시가 박혀 너무 아팠던 적이 있는데, 그때도 절대 울지 말라고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황족이라서, 황태자라서 금지당한 것들.
뛰고 싶으면 뛰고 울고 싶으면 우는 게 어린이의, 아니, 사람의 본능일진대, 아직 몸이 다 자라지도 않은 꼬마는 본능을 꺾는 법부터 배웠다.
륜도 똑같았다. 그도 불만족한 일이 있으면 투정을 부리고 싶었고, 뿌듯한 일이 생기면 자랑하고도 싶었다.
그러나 그는 늘 조심했고, 숨죽였다. 신경질적인 엄마에게 뺨을 맞을까 봐. 네가 감히 잘난 척하며 태자의 자리를 넘보는 거냐고, 아비와 계모에게 호통을 들을까 봐.
어린 륜은 이복동생의 하소연을 신기하게 경청했다. 가소롭기도 했고, 불쌍하기도 했고, 어쨌든 작아서 귀여웠다.
<그리고 제가 실수를 저지르면 저를 모시는 내관 아이가 대신 회초리를 맞습니다. 제가 실수한 일이니 제가 책임졌으면 좋겠는데, 저 때문에 다른 애가 아픈 건 싫은데……. 그런데 싫어하는 것도 안 된다고 하십니다.>
태자는 어릴 적부터 총명하고 차분해서 평소 실수라 부를 만한 것도 별로 없었다.
그러나 아무리 조숙해도 아이는 아이였고, 온도 별수 없이 훈육을 부를 때가 있었다. 그때마다 다른 이가 체벌을 당하는 게 온은 퍽 괴로웠다.
<그러면 아우님이 실수를 안 하시면 되죠.>
륜은 매정하게 충언했다.
사실, 그는 자기 대신 내관이 맞는 게 싫다고 시무룩하게 털어놓는 황태자가 퍽 참신했다.
그가 아는 다른 변변찮은 동생들은 고귀한 자기들 대신 아랫것이 대신 매를 맞는다는 사실에 늘 안도하곤 했다.
<그렇죠?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요즘은 실수를 줄이려고 노력 중입니다.>
일부러 다소 야멸차게 말한 건데, 어린 온은 절대 굴하지 않고 오히려 눈을 반짝이며 해맑은 포부를 밝혔다. 륜은 잠시 그를 쳐다보다가, 끝내 다시 웃었다.
<진전이 있기를 바라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형님.>
륜이 다정하게 말하자 온은 씩씩하게 답했다. 그 당차고 자그마한 모습이 말할 수 없이 기특해서, 륜은 계속 웃고야 말았다. 아까보다 훨씬 따스하게.
그런 식으로 우리는 만났어. 반쪽짜리 혈연에 묶인,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
5년 전에 진즉 끊겨야 했을 사이는 형의 답지 않은 자비와 동생의 악착같은 생존력 탓에 여기까지 끌려왔다.
“이제 그만 끝내십시오.”
온은 차라리 빌었다. 창살 너머로 형을 파고드는 시선이 뜨거웠다.
“저 하나로 끝내고, 월빈마마는 풀어 주세요.”
륜은 동생의 고집을 깨닫고 쓴 것을 씹은 듯 미간을 찡그렸다. 그가 괴롭게 내뱉었다.
“원래는 그랬지요. 원래는 아우님 하나로 끝내려고 했습니다. 자식도 없는 힘없는 후궁 따위, 뭐 하러 번거롭게 끌어들였겠습니까? 그러지 않아도 그대는 어차피 죽었을 텐데.”
존댓말이 돌아왔다. 륜은 동생을 가둔 창살을 콱 움켜잡았다. 그러면서 형제의 손이 겹쳤다.
온은 손뼈가 으깨지는 느낌이었다. 동시에, 포개진 체열은 몹시 따뜻했다.
“그런데 이제는 정식으로 고발이 들어와서 조용히 넘어가는 게 불가능해졌어요. 그대는 수치스럽게 죽을 겁니다, 아우님. 형수와 사통한 금수만도 못한 놈이 되어, 모두의 비방 속에서 죽을 거라고요.”
온의 눈빛이 슬퍼졌다. 죽고 나면 명예나 평판 따위 아무런 소용이 없으니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비참하지 않았으나, 뒤에 남겨질 이들을 생각하니 속이 쓰렸다.
“태후마마를 봐서라도 그런 결말은 피하고 싶었지요.”
맞아, 바로 그거야. 륜이 사납게 속삭이자 온은 말없이 수긍했다.
그가 대장군 자리를 박탈당하고 조용히 낙향하던 도중에 깔끔하게 ‘사고’로 죽는 게 그의 모친에게는 아주, 아주 조금 덜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그런데 어쩌자고 내 아내를 마음에 담아서 일을 이따위로 만들어요? 왜, 내가 베풀 수 있는 마지막 호의를 이렇게 걷어차냐고요.”
호의, 또는 비겁한 자기 위안.
동생을 죽이기로 한 게 너무 괴로워서 그의 마지막 길에 같잖은 자비를 얹으려 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이 황당한 놈은 그새 제 형수와 사랑에 빠진 뒤였다.
이제 륜은 온의 황천길 초입이 지저분해지는 것조차 막지 못하게 됐다.
사랑 때문에, 고작 사랑 때문에, 그렇게 돼 버렸다.
“호의는 이미 충분히 받았습니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베풀어 주실 거라면 다른 형태로 그래 주십시오. 제발, 월빈마마는 풀어 주세요.”
온은 여전히 간절했다. 본인의 죽음을 받아들인 만큼 연인의 최후는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
우리 중 적어도 하나는 끝까지 살아서, 참혹하고 아름다운 연정의 기억을 간직해 줘야 한다.
“폐하. 폐하, 제발 대장군을 살려 주세요.”
그리고 간절한 건 상대편도 마찬가지였다.
“뭐든, 뭐든지 하겠습니다. 폐하께서 명하시는 대로 다 하겠습니다. 제 고국을 바치라면 바치고 제 몸을 원하시면 드리겠습니다. 신통력을 이어받은 강력한 후계를 원하십니까? 그럼 드릴게요, 뭐든 다 드릴게요. 제발, 대장군을 살려 주십시오. 폐하, 제발.”
“월빈마마, 가만히 계세요!”
온은 경악하며 왈칵 외쳤다. 륜은 여전히 동생의 손을 창살에 겹쳐 움켜쥔 채로 류하를 쳐다보았다. 류하는 황제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애타게 매달렸다.
“목숨만 건져 주십시오. 어차피 대장군이 폐하께 눈곱만큼의 역심도 없다는 걸 폐하도 아시지 않습니까? 제가 간특한 계집이 되겠습니다. 제가 시동생한테 꼬리를 친 요부가 될 테니, 모든 죄는 제게 뒤집어씌우고 대장군은 풀어 주세요.”
“……아까도 말했지만, 그대는 애초에 끌어들일 만한 가치도 없었어. 그대가 나와 흥정할 위치는 전혀 아니야.”
륜은 싸늘하게 깨우쳤다.
황후가 장기짝 삼은 저 가련한 후궁이야 죽든, 말든 무슨 상관이랴.
황권에 위협에 되는 이는 온이었고, 반드시 죽어야 할 자도 온이었다.
“제발, 뭐든지 하겠다고요. 뭐든 하겠다고 하지 않습니까? 내가 뭐든 할 테니, 좀……!”
처량한 절규가 붉은 피와 엉켜 나왔다. 동시에, 류하의 눈이 별빛으로 반짝였다.
그녀가 절박한 마음에 창살을 쥐자 우득, 하고 나무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륜의 눈이 한층 커졌다. 온은 화들짝 놀라 부르짖었다.
“마마, 안 돼요, 힘을 쓰지 마십시오!”
호롱불에 스민 청자초 향이 공중에 짙거늘, 류하는 간절한 마음에 푸른색으로 눈을 번뜩이며 애원하고 위협했다.
“제 힘이 탐난다고 솔직하게 말하세요. 도깨비의 이능을 지닌 자를 마음껏 부리고 싶다고 말씀만 하십시오. 그럼 드리겠습니다. 이 힘으로 누굴 죽이든 살리든 폐하의 뜻대로 할 테니, 대장군을 살려 주세요. 살려만 달라고.”
감히 제국의 황제를 상대로 반말까지 섞어 가며 협박 및 회유를 시도하는 공주의 손안에서 나무 창살이 거듭 우지끈, 소리를 냈다.
두툼한 목재는 완전히 부러지지 않았으나, 눈에 띄게 휘며 부스러기를 뚝뚝 흘렸다.
“청자초로 억제해도 이 정도야. 전력을 다한다면 정장의 목도 부러트릴 수 있습니다. 원하신다면 전쟁터에 풀어놓으세요. 거듭 말씀드리지만, 저는 뭐든 할 수 있습니다. 폐하께서 대장군만 살려 주신다면 개처럼 구르겠습니다. 죽으라 하시면 죽고, 죽이라 하시면 죽이고, 제게 인간의 존엄이나 양심 따위는 없는 것처럼 굴겠습니다. 그만큼 저는 지금 간절합니다.”
“마마, 하지 마세요, 다치잖아요, 제발…….”
온이 신음했다. 류하가 청자초 향에 짓눌린 와중에 힘을 억지로 끌어올리느라 입가에 핏물이 흐르는 게 보였다.
황제에게 시위하고자 나무 창살을 꾹 누르자 목재가 갈라지며 류하의 손을 파고들었다.
온실 속 공주로 태어나 평생 곱고 여리기만 했던 손이 삐죽한 나무에 찔려 엉망으로 변했다.
“마마, 저는 괜찮습니다. 제게 다정하게 대해 주신 건 죽어서도 잊지 않겠으니, 당신도 예뻤던 기억만 간직해 주세요. 잠깐 행복했던 걸로 충분했잖아요. 이제 그만 애쓰셔도 됩니다. 저 때문에, 고작 저 때문에 그러지는 마세요.”
영원은커녕 평생도 바란 적 없어. 훔쳐낸 순간들만으로도 소중했는걸. 짤막하고 애틋한 계절, 스치는 추억.
그저 그런 것으로만 나를 남겨 두고, 당신을 위해서 나를 보내 줘.
“헛소리는 작작 좀 하세요, 대장군. 안 그래도 미칠 지경이니까.”
류하는 전혀 연인답지 않은 태도로 사납게 윽박질렀다. 실제로 돌아 버릴 것 같았다.
아, 어쩌다 이렇게 됐지? 나는 여기서 왜 이러고 있지?
나는 희생적이지도 헌신적이지도 않고, 목숨을 버리는 게 취미도 아니야. 엄청나게 고결하지도, 정의롭지도 않아. 특별히 선량했던 적도 없어.
그저 이 세상에서 내 삶이 가장 귀한, 그토록 평범하게 이기적인 사람이거늘.
그런데 하필 그대가, 많고 많은 사람 중에 하필 그대가, 내게 특별해져서. 소중해져서. 참 많이 사랑스러워서.
차라리 억울하다고 주장하며 남을 원망하다가 죽었다면 속이라도 시원했을까.
왜 물귀신처럼 나까지 끌어들이냐고 제국의 빌어먹을 황족들에게 악쓰는 대신, 류하는 그중 하나를 살리고자 또 다른 황족에게 온 마음과 힘을 다해 비는 중이었다.
내 평생 살다가 이런 굴욕적인 순간이 올 줄은 몰랐지. 하지만 류하는 수치심을 느끼지 않았다. 거부감과 모멸감에 정신 팔릴 틈이 없었다.
사랑하는 사람의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었고, 자칫하면 자신도 죽을 판국이었다. 발버둥이라도 쳐 봐야 했다.
함께 사는 게 불가능하다면 그대라도, 내 삶에서 나보다 더 중요해진 그대라도 살리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