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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궁의 은밀한 연서 (97)화 (97/123)

97화

준비성 철저한 황제는 재갈에도 청자초 진액을 묻혀 두도록 미리 지시했고, 그런즉 류하는 숨 쉬는 매 순간이 고통이었다. 그냥 죽고 싶다고 생각할 정도로 온몸이 아팠다.

하지만 지금 온이 자신을 저렇게 보고 있어서, 차마 죽을 수도 없었다.

“폐하의 여인을 이딴 식으로 대하다니, 지금 제정신인가?”

온은 창살을 움켜쥔 채 군졸들을 노려보며 씹어뱉었다. 그때 그의 눈빛이 진심으로 포악해서 류하를 연행하던 이들은 전부 움찔했다.

온도 결국 황족이었고, 타고나기를 고압적인 족속이었다. 아비를 베고 즉위한 형이나, 태자로서 냉혹한 권력을 배웠던 동생이나, 생각보다 서로를 많이 닮았다.

“황송합니다, 대장군님. 폐하께서 월빈마마의 하옥을 명하셨습니다. 우리는 황명에 따를 뿐입니다.”

군졸 하나가 공손히 아뢰었다.

비록 하루아침에 옥에 갇혀버렸고 곧 대장군 자리를 박탈당할 거라고는 하나, 온은 한평생 황족이었다. 군졸은 습관대로 그에게 말을 높였다.

“폐하께서 명하셨다고?”

온의 창백함이 신기록을 경신했다. 그사이 군졸들은 온의 맞은편 문을 열고 류하를 그 안에 밀어 넣었다. 류하는 풀썩 쓰러졌다.

“대체 왜?”

온의 목소리는 뜯겨 나왔다. 그는 류하의 재갈이 검붉게 젖은 걸 보고 눈앞이 아찔해졌다.

“그게.”

군졸은 주춤했다. 이걸 말해, 말아?

지엄하신 황족의 면전에 대고, ‘아, 그게요, 당신이 이 여인이랑 그렇고 그런 사이라 해서 그런 거예요’라고 차분하게 말하기가 퍽 어려웠다.

“그건 그대가 가장 잘 알 텐데.”

음침한 비난이 들렸다. 온과 류하는 절박하게 돌아보았고, 군졸들은 황급히 고개를 조아렸다. 황제가 입장했다.

“고발이 들어왔어, 대장군. 그대와 월빈이 몰래 통정했다고.”

류하는 재갈 뒤에서 신음했다. 온은 나락을 마주한 심정이었다.

“누가 그럼 망측한 모함을 아뢨습니까?”

온이 으르렁댔다. 륜이 눈매를 좁혔다. 그가 손짓하자 군졸 하나가 다가가 류하의 재갈과 포박을 풀었다. 그사이 다른 군졸이 옥사 구석에 호롱을 밝혔다. 청자초가 타기 시작했다.

“모함인가?”

륜은 삐딱하게 되물었다. 온은 단숨에 대답했다.

“모함입니다.”

륜이 다시 손짓하자 군졸들이 물러갔다. 옥중에는 륜, 온, 류하만이 남았다.

류하는 온을 위해 정신을 똑바로 차리려 노력했다. 그러나 호롱불에 섞여 계속해서 밀려드는 청차조 향 때문에, 정신은커녕 몸을 제대로 가누는 것조차 힘들었다.

“모함치고는 진술이 꽤 자세하던데. 둘이 밤중에 그렇게 붙어 다녔다며?”

“저는 마마의 호위입니다. 폐하께서 맡기신 일 아닙니까? 밤에 마마께서 산책을 원하셔서 곁에서 모셨을 뿐입니다.”

“곁에 모시려고 안아 들었나?”

“마마께서 발목을 다치셨습니다. 다른 이에게 맡길 수 없어 제가 나섰을 뿐입니다.”

“월빈이 말에서 떨어질 뻔한 날에는 왜 안았어?”

“정확히 어느 때를 말씀하십니까? 그날 너무 경황이 없어서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이건 기억할지 모르겠네. 그때도 내가 물어봤는데.”

륜은 차게 속삭이며 성큼 다가갔다. 형제는 창살을 사이에 두고 지척에서 마주했다. 서로 키가 비슷했기에 시선이 닿는 높이도 거의 같았다.

“월빈이 처음으로 외출하고 그대가 동행했던 날, 소나기가 와서 둘이 함께 폐가에 숨고 도깨비를 만났던 날.”

셋 다 같은 날을 떠올렸다. 각자 서로 다른 의미로 마음이 내려앉았다.

온은 문득, 륜이 제게 말을 낮추고 있음을 깨달았다. 지금 류하를 빼면 단둘이 남은 거나 다름없음에도 불구하고.

“둘이 폐가에서 뭘 했지?”

침묵. 륜이 동생을 쏘아보듯이 온도 형을 쏘아봤고, 곧 뚝뚝하게 답했다.

“함께 비를 피했습니다.”

륜은 어금니를 으득 물었다. 그러더니 창살 너머로 손을 넣어 온의 뺨을 세게 쳤다.

“대장군!”

류하는 비명을 질렀다. 청자초로 인한 역함도, 손목을 짓누르는 악력도 순간 잊혔다. 륜은 조소했다.

“적어도 고발의 내용이 반은 맞는 것 같군.”

그가 중얼댔다. 그가 몸을 휙 돌려 류하를 마주했다. 류하는 쌕쌕대며 그를 노려보았다.

그녀의 시선에 담긴 원색적인 증오와 공포를 보고 륜은 또다시 실감했다.

“내 동생을 연모해?”

륜은 단도직입으로 물었다. 온은 겁에 질려 류하를 쳐다보았다.

제 뺨의 통증이야 수백 번도 더 견딜 수 있으니, 제발, 당신은 있는 힘껏 혐의를 부인하라고 그는 눈빛으로 빌었다.

“저분을 동생으로 여긴 적이나 있습니까?”

류하는 수긍하지도, 부정하지도 않았다. 다만, 여전히 황제를 올려다보며 사나운 반문을 속삭였다.

“월빈, 그대는 지금 내게 그딴 질문을 할 처지가 아니야.”

륜은 헛웃음을 흘리며 나긋하게 깨우쳤다. 그가 몸을 낮춰 바닥에 널브러진 류하와 눈높이를 맞췄다.

“그대는 영리한 편인 줄 알았는데. 제 목숨 아까운 줄 알고 숨죽이는 쪽인 줄 알았어.”

그런데 시동생과 사랑에 빠지다니. 그 가련한 어리석음이 우스워 륜은 차갑게 비웃었다.

“그대와 저 아이의 아둔함 때문에 일이 너무 커졌어. 그딴 고발만 없었으면 그냥 쟤 하나 죽고 끝나는 건데.”

류하의 마음이 재차 증오로 요동쳤다. 죽는다니, 온 하나 죽는 걸로 끝난다니? 그 가벼운 일축이 연정에 물든 그녀의 마음을 난폭하게 찔렀다.

“그대가 저 애한테 홀딱 반했다는 건 이제 알겠어. 그런데 저 애는, 정말로 억울한 걸까?”

륜은 서늘하게 읊조리며 창살 사이로 손을 뻗었다. 그의 손이 그녀의 뺨을 스치고 아래로 미끄러져 그녀의 목에 안착했다. 곧고 예쁘고 매끈한 목이었다. 손톱이 말랑한 살을 파고들었다.

“하지 마세요!”

온이 날카롭게 외쳤다. 황제에게 목이 졸리기 직전이었던 류하는 참았던 숨을 탄식으로 뱉었다. 안도가 아니라, 절망 때문에.

“그만, 제발 그만두십시오. 제가 폐하의 여인께 음심을 품었습니다. 제가 감히 후궁을 탐하는 불충을 저질렀습니다. 제가 형수님을 꾀려 한 짐승만도 못한 놈입니다. 만족하십니까?”

“폐하, 거짓말입니다! 유혹한 쪽은 접니다. 대장군은 계속해서 거부했습니다.”

류하는 곧장 절규했다. 울컥, 하며 다시 입 안에 피 맛이 돌았다.

륜은 양손에 얼굴을 묻고 싶었다. 온은 륜을 쳐다보며 필사적으로 말을 이었다.

“저 하나 죽이고 끝내십시오. 어차피 저만 죽으면 끝나는 일 아닙니까? 방금 당신도 그리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제발.”

제발, 그냥 끝내. 저 사람은 풀어 줘.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괴롭히지 마.

“제 아비는 죽었고, 어머니는 갇혔고, 저는 당신의 명에 따라 전쟁터에서 개처럼 굴렀습니다. 그러면 된 거 아닙니까? 아직도 만족을 못 하십니까? 대체 언제 저를 놔주실 겁니까?”

대체 언제쯤, 당신은 과거의 고통에서 벗어날까.

언제까지 당신은 당신의 미련한 속죄와 복수를 꾸역꾸역 이어 가려는 걸까. 대체 언제까지.

당신은 나와 단둘이 남을 때마다 말을 높인다. 왜? 미안해서? 그렇게라도 갚고 싶어서? 아니면 원래 내 자리였던 곳에 당신이 피를 딛고 올랐다는 사실을 늘 상기하고 싶어서?

“처음부터 저를 죽이고 싶으셨죠?”

사실은 알아. 당신이 언제나 나를 미워했음을.

“그런데 또 미안해서 그러지도 못하고.”

미워하면서도, 언제나 나를 사랑했음을. 황량한 황실에서 늘 형제애에 목말랐던 당신을 알아.

“전장에 던져 놓으면 알아서 죽어 줄 것 같아서 저를 장장 5년간 변방에서 굴리셨습니까?”

나는 당신께 미안해서 항상 친절을 베풀었고, 당신은 죄책감 때문에 그날 나를 살렸어.

맞아, 결국 그거야. 우리는 죄에 묶여 서로 아꼈어.

“이제 그만하셔도 됩니다. 모든 죄는 제게 덮어씌우고, 그냥 저 하나만 죽이십시오. 지금까지 당신을 괴롭게 했던 것 전부 제가 다 죗값으로 끌어안고 가겠습니다.”

어린 륜은 제멋대로 승은을 내리고 나서 그 뒤를 제대로 돌보지 않은 아비를 증오했다.

내명부의 다른 여인들에게 받은 상처를 제게 화풀이하는 어미를 원망했다.

그 증오스러운 아비에게 사랑받고, 제 원망스러운 어미를 괴롭혀 더욱 난폭하게 만드는 황후에게서 난 황태자를 미워했다.

동생이 태어난 순간부터 혐오했다. 가능하다면 죽여 버리고 싶었다.

다른 귀족 후궁들의 아들딸이 그러하듯 그 아이마저 저를 보고 경멸의 눈빛을 짓는다면, 그때는 정말 분을 못 이겨 가녀린 목을 조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안녕하세요. 륜 형님이십니까?>

그러던 어느 날, 혼자 숨어 고양이를 지켜보던 1황자를 향해 조막만 한 꼬마가 고개를 쏙 내밀더니 앙증맞게 속닥였다.

<내가 누군지 어찌 알았습니까?>

1황자는 당황했다. 상대방이야 그 유명한 황태자니 륜은 온의 얼굴을 알고 있었으나, 고귀한 저 꼬맹이가 비천한 천첩의 아들을 알고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야, 오늘 처음 뵙는 분인데 황족의 옷을 입고 계시니까요.>

꼬마는 야무지게 재잘댔다. 그는 아바마마의 아들 중 저보다 다섯 살 위인 맏형이 있다고 들었으나, 여태 한 번도 만난 적 없었다. 이렇게 우연히 마주치게 되자 반가웠다.

<그동안 만나서 인사드리고 싶었는데, 어쩐지 제가 아바마마께 여쭐 때마다 형님이 바쁘셔서 미처 찾아뵙지 못했습니다. 너무 늦게 인사 올리는 걸 용서하세요.>

꼬마는 엄숙하게 종알대더니, 짤막한 다리로 반듯하게 서서 큰형님께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황족의 예법대로였다.

<만나게 돼서 영광입니다, 형님.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꼬마 황태자는 윗사람을 공경하고 서열을 중시하는 것 역시 군자의 길이라고 수업 시간에 배웠다.

그 가르침을 실천하고자 부지런히 황실의 모든 어른을 찾아가 예를 갖췄는데, 무슨 영문인지 첫째 형님은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이제라도 만나서 반가웠다. 어린 온은 깜찍한 자태로 경례했다.

어린 륜은 강렬한 첫인상의 이복동생을 멀뚱히 쳐다보다가, 문득 입을 가리며 폭소했다.

<푸핫!>

온은 어리둥절해서 고개를 들었다. 륜은 눈매를 휘며 그를 바라보았다.

<저 별로 안 바쁩니다, 아우님.>

제가 바빠서가 아니라, 감히 황태자 전하를 뵙기에는 너무 비천해서 주변의 어른들이 막았겠지요. 어쩌면 당신의 경쟁자일 수도 있는 제가 당신과 가까워지는 걸 아무도 원치 않거든요.

그런데, 당신이 먼저 다가왔어.

애정에 굶주린 여남은 살의 고독한 소년에게, 그 순진한 온기는 정녕 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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