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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궁의 은밀한 연서 (96)화 (96/123)

96화

그러나 류하가 막강해진 물리적인 힘으로 옆의 군졸을 뿌리치고 뛰쳐나가기 전, 다급한 손이 날아와 그녀의 얼굴을 덮었다.

“읍!”

고작 부드러운 천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 천에 묻힌 진액은 치명적이었다. 곱게 으깨진 청자초 향을 맡는 순간, 류하는 경련했다.

“으으, 웩!”

구역질이 올라오며 통증이 잠식했다. 류하는 바닥으로 쓰러졌다. 그사이 군졸들의 손이 그녀를 붙들었다.

그녀는 손목이 묶이는 와중에도 하릴없이 눈을 감았다.

“우욱…….”

잇새로 기어코 피가 흘렀다. 붉게 물든 류하의 입술은 곧 재갈에 짓눌렸다.

땅 울림이 멈췄다. 궁녀들은 입을 틀어막고 지켜보았다.

저들의 상전이 간통죄로 고발당한 것도 혼란스러운데, 그분이 갑자기 저주받은 힘을 사용하셨다. 이종족에 대해 잘 모르는 이들의 눈에도 퍽 기이하게 보이는 아찔한 사술.

류하는 쏟아지는 시선을 감당할 여력도 없이, 혼미해진 정신으로 끌려 나갔다.

몇 시간 전, 예빈이 황제와 황후를 직접 찾아왔다.

“다시 말해 보게.”

륜은 차갑게 명령했다. 부디 자신의 귀가 이상해졌기를 기도하며.

“폐하, 월빈과 온 대장군이 간통하는 모습을 제가 봤습니다. 이제야 말씀드린 점 송구합니다. 부디 벌해 주십시오.”

예빈은 황제 내외 앞에 몸을 낮춘 채 머리부터 발끝까지 파르르 떨었다. 황제의 얼어붙은 시선보다는 황후의 관찰하는 눈빛이 더 신경 쓰였다.

<때가 되면 내가 그대에게 부탁을 하나 할 거야. 내가 일러 주는 그대로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폐하께 고하게. 알겠나?>

몇 달 전, 예빈이 월빈의 말에 독초를 발랐다는 사실을 눈감아 주는 대가로 황후가 은밀히 요구한 게 있었다.

<월빈과 온 대장군이 통정하는 모습을 목격했다고 고하면 돼. 그들을 간통죄로 고발해.>

예빈은 충격에 빠졌다. 간통죄라니? 그것도 평범한 남녀의 사통이 아니라, 황제의 후궁과 황제의 동생이라니.

만약 사실이라면 두 사람은 죽을 테고, 만약 모함으로 밝혀진다면 거짓으로 고발한 예빈이 역으로 위험해질 것이다.

<사실이든 아니든 나는 상관없어. 사실이 아니라면, 그대가 사실로 만들게. 온 대장군이 감히 황제의 아내를 탐한 죄로 만민이 보는 앞에서 사지가 찢기게 만들란 말일세. 이해했지?>

이해했다. 황후의 목표는 대장군이었고, 수단은 예빈이며, 월빈은 그냥 불쌍한 장기짝이었다.

화은이 직접 온에게 누명을 씌웠다가 거짓 고변이었다는 점을 들키기라도 한다면 화은은 무고죄로 처벌당할 것이다.

위험 부담은 전부 예빈에게 뒤집어씌우고, 가여운 월빈을 희생시켜 온을 극악무도한 죄인으로 만드는 게 화은의 계획이었다.

화은은 본래 자비로운 자가 아니었다. 지금까지 자애로운 황실의 안주인 역할을 감당해 온 것도 전부 오직 필요에 따라서였다.

제 아비를 죽인 패륜 황제의 최대 조력자가 양심적이어 봤자 얼마나 양심적일까. 화은은 원한다면 얼마든지 잔인해질 수 있었고, 지금이 바로 그런 때였다.

월빈이 정말로 대장군과 간통했든 않았든 상관없었다. 만약 월빈이 결백하다면, 글쎄,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휘온을 후궁과의 불륜으로 엮으려면 월빈이 가장 그럴싸했다. 온은 월빈의 호위대장이니, 둘이 붙어 다니던 시간이 절대적으로 많았으니까.

게다가, 화은은 자신의 모함이 꼭 모함이 아닐지도 모른다고도 생각했다.

‘확실히 그때는 과도했지.’

화은은 류하가 예빈의 장난질 때문에 죽을 뻔했던 날을 회고했다.

그때 거의 몸을 날려 그녀를 구한 온은 막판에 호수에서 빠져나오자마자 그녀를 와락 안았다.

고작 찰나였고, 화은으로부터 거리가 너무 멀었기에 그녀는 자신이 혹시 잘못 봤나 의심했지만, 아니었다. 짧았지만, 그때 분명 포옹했다.

‘그저 모시는 이에 대한 충성심이 강할 수도 있지. 그렇지만…….’

온은 책임감이 강하고 다정한 사내라서, 형이 지키라고 명령한 여인에게 정말 최선의 보호를 바치는 건 별로 이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마음은, 사람의 내밀하고 지순한 마음만큼은 그저 책임감 따위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어쨌든, 의심은 시작됐다. 화은은 내심 월빈과 대장군이 정말로 사통했기를 바라기까지 했다.

아무리 잔인하고 저열해질 수 있는 그녀의 마음에도 한 가닥 연민이 남아서, 타국에 바쳐지듯 시집온 가여운 공주에게 없는 죄를 뒤집어씌우는 게 마냥 편하지는 않았다.

차라리 그대가 진짜 죄인이라면, 나는 기꺼이 그대를 파괴하고 이용할 거야.

그런데, 애초에 누군가와 사랑에 빠지는 일을 죄라고 부를 수 있을까?

사랑하는 남편의 곁에 다른 아내가 무려 일곱 명이나 있는 것을 내내 견뎌야 했던 화은은 문득 환멸을 느꼈다.

사랑이란 대체 무엇이며, 결혼이 대체 무엇이기에 우리는 이래야 하는지.

“그대가 봤다고?”

“네, 봤습니다.”

“한 치의 거짓도 없는가?”

“없습니다.”

“나와 황후뿐 아니라 고관대작이 보는 앞에서도 지금처럼 증언할 수 있어?”

“네, 폐하.”

거듭되는 질문에 예빈은 간절히 대답했다. 이제 와서 발을 빼기에는 너무 늦었다.

자신이 거짓 고발을 했다고 뒤늦게 자백해 봤자 제 죄만 더해질 것이요, 황후가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이미 늦었어. 예빈은 낙담했다. 월빈에게 진심으로 미안해졌다.

소국 출신의 그녀가 고까워서, 또한 해비의 관심이 그녀에게 향하는 게 질투 나서 악독한 심술을 부리기도 했지만, 아예 죽이고 싶었던 적은 없었다.

애초에 예빈은 누군가의 죽음을 진심으로 원할 만큼 담이 큰 사람이 아니었다. 화은과 달리.

“그래. 그렇단 말이지.”

륜의 목소리가 나직하게 비틀렸다. 예빈은 숨을 참으며 이 순간의 끝을 기다렸다.

“자세히 설명하게. 그대가 정확히 뭘 봤는지.”

황제가 서늘하게 다그치자 예빈은 심호흡 끝에 다시 운을 뗐다.

그녀가 내놓은 답변은 제법 매끄러웠다. 어떻게 묘사하면 너무 노골적인 장면 없이도 월빈과 대장군이 통정한 것처럼 들릴 수 있을지 그녀는 오랫동안 고민해 왔다.

일단 살아남기로 마음먹은 이상, 예빈도 거침없었다.

“……일단 물러가. 다시 부르지.”

“네, 폐하.”

예빈의 상세한 진술을 끝까지 경청한 뒤, 황제는 그녀를 내보냈다. 그녀는 아찔한 안도 속에서 도망쳤다.

“화은.”

단둘이 남자 륜이 불렀다. 오랜만에 이름으로 불려 보는 터라 설렐 법도 했지만, 화은은 오직 긴장한 채 지켜보았다.

“그대가 그랬어요?”

그는 뜨악한 눈빛으로 속삭였다. 화은은 담담히 받아쳤다.

“뭘 그랬다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통정한 건 대장군과 월빈이고, 고발한 건 예빈인걸요.”

그러니 공식적으로 자신은 전혀 무관하다고, 화은은 뻔뻔하게 고집했다. 륜의 안색이 식었다.

“어차피 온은 죽을 팔자였습니다.”

그대가 개입할 필요는 없었어. 이런 식의 진창을 원하지는 않았어. 륜은 내적으로 탄식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저는 제가 뭘 어떻게 했다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화은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그래서 륜은 추궁도 원망도 그쳤다.

륜은 아내의 중상모략을 의심하고 그녀에게 실망하지는 않았다. 실망하다니, 무슨 자격으로? 잔인하고 저열한 건 나도 마찬가지이거늘.

다만 륜은 온에게 명예로운 죽음의 기회를 허락하고 싶었다.

황적에서 제명되지 않고 조용히 시골로 내려간 뒤에 불의의 ‘사고’로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지는 결말을 원했다.

이미 죽이기로 결심한 와중에 명예 운운하며 같잖은 자비를 베푸는 척하는 제 위선적인 모습이 역겹기는 했다.

명예로운 죽음은, 무슨. 삶과 죽음을 나눌 때 대체 그딴 게 무슨 소용일까.

하지만, 적어도 륜의 뜻대로 됐다면 온이 이런 치욕적인 끝을 맞이하진 않았겠지.

형의 아내를 탐함으로써 인륜을 저버린 반역자라는 오욕을 안고, 처형대에서.

“내가 그렇게 못 미더웠습니까?”

륜은 쓰게 되물었다. 화은은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그는 자신의 동생을 정녕 철저하게 짓밟아 버린 아내로부터 시선을 감췄다. 그가 애써 침착하게 불렀다.

“여봐라, 밖에 있는 자는 들어와라.”

내관들이 입장했다. 고개를 조아리는 그들에게 황제가 명령했다.

“가서 월빈을 하옥하라고 전해.”

이건 또 무슨 일이야? 월빈마마? 갑자기? 내관들은 당황했다.

평소에 워낙 존재감이 없는 류하인지라, 내관들은 죽은 듯이 살던 뒷방 후궁이 뜬금없이 잡혀가게 된 상황을 더디게 받아들였다.

“그리고 군졸들에게 다음과 같이도 전해라.”

아랫사람들이 의아해하든 말든, 륜은 지시를 덧붙였다. 몹시 구체적인 지시였다.

“의원에게 청자초 진액을 얻어서 천에 묻혀 두었다가, 월빈이 저항을 시도한다면 바로 그걸로 월빈의 입을 막으라고.”

청자초? 내관들의 혼란이 깊어졌다.

청자초는 잡초에 가까울 정도로 흔한 기본적인 약재였다. 가끔 해열제로나 쓰이는 그 약풀이 왜 후궁을 체포하는 데 필요한지는 모르겠다.

“명 받들겠습니다, 폐하.”

하지만 아랫것들의 몫은 윗전의 명령에 의문을 표하는 게 아니었다. 내관들은 정중히 꾸벅였고, 황명에 복종하기 위해 움직였다.

그리하여 얼마 뒤, 류하의 처소에 군졸들이 들이닥쳤다.

온은 바닥에 정자세로 앉은 채 묵묵히 시간을 헤아렸다.

옥중에는 시계가 없었고, 굳이 죄인에게 친절하게 다가와 시간을 알려 주는 사람도 없었다.

심지어 이곳에는 그를 감시하는 자조차 없었다. 동생이 도주하지 않을 거라고 황제가 확신한 탓일까. 창살과 자물쇠는 어차피 튼튼했다.

무기를 빼앗긴 온은 얌전히 자신이 받을 벌을 기다렸다.

그때, 발소리가 들렸다. 드디어. 온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그의 귀에 닿은 소리는 영 어색했다.

규칙적이고 묵직한 진동 외에도 뭔가 조금 가벼운 것이 위태롭게 질질 끌리는 소리가 났다. 뭐지? 온은 그 출처를 헤아리지 못해 미간을 좁혔다.

옥문이 열렸다. 온은 창살 너머로 끔찍한 장면을 발견했고, 벌써 처형대에 묶인 것처럼 안색이 창백해졌다.

“월빈마마!”

그는 때와 장소를 잊고 외쳤다. 류하는 그에게 입을 열어 답하고 싶었다.

내가 지금 꼴이 좀 추레해서 그렇지 사실은 멀쩡하다고, 그러니 그대는 그토록 애타게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거짓으로라도 달래 주고 싶었다.

하지만 입에 재갈이 물린 탓에 말하는 게 물리적으로 불가능했다.

게다가 입을 열 때마다 말 대신 피가 쏟아지는 판이니, 온의 정신 건강을 위해서라도 차라리 입을 꾹 다물게 있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고 류하는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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