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당연하게도, 모두가 5년 전의 반정에 동의했던 건 아니었다.
적법한 황태자를 지지하던 세력 중에 일부는 숙청당했고, 일부는 스스로 조용히 낙향했고, 일부는 살길을 찾아 변절했다.
변절한 무리는 또 둘로 나뉘어, 어떤 이들은 염치를 알고 묵묵히 제게 맡겨진 일에나 집중했지만, 어떤 이들은 새 황제를 향한 저들의 충정을 입증하고자 일부러 더욱 시끄럽게 나섰다.
염치를 아는 이들은 지금도 거북하게 침묵했다.
지금이야 새 황제의 치하에 그럭저럭 적응하여 예전처럼 일하고야 했지만, 불과 5년 전에만 해도 그들은 다른 이를 주군으로 모시기 위해 준비 중이었다.
현실적인 외면과 별개로, 다들 각자 마음속 깊은 곳에는 옛 황태자를 향한 빚이 조금씩 있었다. 그것까지 완벽하게 외면할 수는 없었다.
반면, 저 뻔뻔한 것들을 보라. 마치 태초부터 자신들이 새 황제의 충신이었던 것처럼 휘온을 어서 벌하라고 입만 살아 나불대는 것들.
륜이 1황자던 시절부터 위험을 무릅쓰고 그를 따랐던 진짜 충신들과, 행동으로는 변절했으되 여전히 온에게 죄책감을 품고 있는 신하들은 그 시끄러운 부류를 싸늘하게 쳐다보았다.
“문초할 것도 없소. 휘온이 단씨 가주의 여식을 만난 건 내 명령에 따라서였어. 대장군이 직접 미끼가 되어 단씨 계집을 내세운 역도를 유인하기 위함이었지.”
“그, 그렇습니까?”
가장 열심히 지껄이던 신하가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뭐야, 그건 처음 듣는 소린데. 대장군이 황명에 따라 움직인 거라면, 사실상 그렇게 엄중히 처벌할 근거가 없잖아?
“하지만 결국 멍청하게 실패했으니, 그 책임을 물어 그자의 대장군 자리를 박탈하고 도성 밖으로 내보내겠소. 다시는 그자가 황성에 발을 들일 일은 없을 거요.”
안 돼, 그걸로는 부족해. 몇몇이 이를 악물었다. 아예 그자에게 재기의 가능성조차 없도록 황적에서 파버려야 한다.
물론, 가장 깔끔한 방법은 역시 죽여 없애는 거였지만.
“죄인의 처분에 관한 얘기는 이쯤에서 됐고. 훨씬 급하고 심각한 사안이 있지 않나요?”
그러나 륜은 매끄럽게 화제를 전환했다. 그가 아직도 우유부단하게 결정을 내리지 못해서 그런 건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역적의 딸이 나타났고, 도깨비도 나타났고, 게다가 백성들 사이에 흉흉한 소문이 돌고 있던데. 내가 보기엔 이쪽이 황실과 제국에 훨씬 큰 위협인 것 같다만.”
온은, 어차피 죽을 거야. 내가 그렇게 정했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비참했기에, 이미 파멸이 예정된 동생을 안줏거리처럼 조례에 끌어들여 씹고 뜯고 찢어발기는 걸 원하지 않았다.
“흉흉한 소문이라 하시면…….”
누군가 조심스레 여쭈었다. 몇몇은 이미 그 흉문의 내용을 알고 마른침을 삼켰다.
“대장군이 불충해서 도깨비가 나타난 게 아니라, 아비를 벤 내가 부덕해서 천벌이 내린 거라는데.”
륜이 산뜻하게 폭로하자 몇몇은 대놓고 사레들릴 뻔했다.
아비를 벤 나, 라니. 저런 적나라한 자기소개를 늘어놓고도 안색 하나 변하지 않는 뻔뻔함도 능력이라면 능력이었다.
“죽은 군졸들이 되살아난 것도 내 패륜에 대한 질책이라는군. 그대들은 어떻게 생각하오?”
륜은 신하들을 찬찬히 훑어보며 나긋하게 물었고, 어떤 이들은 아예 사색이 되었다.
“진정으로 제국을 사랑하시는 신이라면 어찌 폐하께 벌을 내리시겠습니까? 여태 폐하께서 하신 일 중에 제국을 위하지 않았던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현명한 신하 하나가 침착하게 아뢰었다. 륜은 싱긋 웃었다.
내가 뻔뻔한 황제라서 뻔뻔한 신하가 꼬이는 걸까. 어쨌든, 저 파렴치한 칭찬은 꽤 마음에 들었다.
“그런가요? 그렇다면 나로 인해 제국에 천벌이 내렸다는 말은 터무니없는 모함이겠군.”
“그렇습니다, 폐하.”
“모함이 있다면, 모함을 퍼트린 자도 분명 있을 터. 감히 나와 그대들의 제국에 대한 유언비어를 퍼트리고 저주받은 사술을 끌어들여 나라의 근간을 흔드는 극악무도한 것들이요.”
륜은 자신이 정말로 논하고 싶었던 부분에 대화의 초점을 모았다.
온에 대한 처분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동생의 최후는 이미 깔끔하게 정해졌기에 더는 왈가왈부할 부분이 남아 있지 않았다.
륜의 진짜 관심사는 바로, 어제쯤 불현듯 시작되어 도성 전체에 독버섯처럼 번진 수군거림의 목적과 근원이었다.
이로써, 하나는 확실해졌다. 구체적으로 자신을 노리는 모종의 세력이 있다. 목표를 이루고자 낙인찍힌 이종족과도 손잡은 실로 과감한 무리.
‘누구지?’
륜의 뇌리에는 차가운 의문이 가득했다. 심중을 옥죄는 불안감에 치여 쓰러지지 않도록 그는 악착같이 자신을 다잡았다.
‘누가 나를 죽이고 황제가 되려는 거지?’
세상에 대체 어떤 군주가 반정 모의를 의심하고도 긴장하지 않겠느냐만, 륜의 경각심은 유독 심했다.
왜냐하면, 본인도 권좌를 무력으로 찬탈하여 지금 이 자리에 올랐으니.
내가 성공한 걸 다른 이가 성공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지금 비밀리에 움직이는 그들이 승리한다면 나도 아비와 마찬가지로 목이 베일 것이다. 절대 아니 된다. 내가 반드시 막으리라.
그리고 만약 내가 죽고 화은이 아들을 낳는다면, 그들은 우리의 아들도 죽이겠지.
그렇게 되면 차라리 화은이 이번에 딸을 회임했기를 바라게 될 것이다.
하지만 륜은 화은이 아들을 낳기를 바랐고, 그 아들에게 보위를 물려주기 원했으며, 절대, 절대 비참하게 살해당할 생각이 없었다.
륜의 삶에 대한 집착은 강했다. 오죽하면 제게 살과 피를 물려준 친부를 직접 베고, 어린 시절 제게 한결같이 친절했던 착하고 올바른 이복동생마저 죽이기로 정했을까.
생존을 향한 나의 집념은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추해.
그러나 그런 씁쓸한 평과 별개로, 나는 결코 포기할 생각이 없어.
“찾아내시오.”
륜은 명령했다. 잡초를 뽑아 불사르듯, 역도를 솎아내 짓이기라고.
“찾아내서 내게 데려오세요.”
그의 동생이 죽음을 받아들인 시각, 냉혹한 황제는 오늘도 살기 위해 몸부림쳤다.
화은은 조례에서 오간 황제와 신하들의 대화 대부분을 충실하고 유능한 궁녀를 통해 전해 들었다. 역시, 궁중 곳곳에 수족을 심어 놓으니 여러모로 참 편리했다.
‘대장군 자리를 박탈해서 도성 밖으로 내보낸다고?’
화은은 고운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어금니를 오독 씹었다. 태교에 별로 좋지 않을 감정이었지만, 지금은 별수 없는 상황이었다.
‘부족해. 한참 부족해.’
륜에게 그 누구보다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는 화은이지만, 그래도 그에게 온에 대해 얘기하는 건 여전히 껄끄러웠다.
특히 며칠 전, 화은이 고자질을 시도했다가 그런 대답을 들은 뒤로는.
<내가 알아서 할게요.>
휘온이 불충하게도 죽은 역적의 딸과 만나고 다닌다고 신나서 일러바쳤더니, 륜은 그토록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게다가 알고 보니, 이는 륜도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대장군을 역적으로 몰아 숨통을 끊어 놓는 데 실패했다. 그리고 오늘 조례 때 오간 얘기를 들어 보니, 이번에도 결국 사형은 아니더라.
화은은 조급해졌다. 그녀는 동생을 버리고 자신과 제 자식을 선택한 지아비의 약속을 믿었으나, 상대방을 신뢰한다 해서 얌전히 손 놓고 기다리기만 하는 건 영 성미에 맞지 않았다.
관직의 회수와 추방만으로는 안심할 수 없었다. 화은은 지금 당장, 확실한 극형을 원했다. 나중이라는 여지가 전혀 남지 않도록.
“가서 예빈에게 말을 전해라.”
역시, 기다리기만 하는 건 너무 갑갑했다.
류하는 멍하니 처소에 앉아 붓으로 그림을 끼적이고 있었다. 별 의미 없는 취미 생활이었다. 어제 온이 하옥됐다는 소식을 들은 뒤로, 그녀는 내리 몽롱했다.
그때, 바깥에서 비명이 들렸다.
“무례하게 이게 무슨 짓입니까?”
“여기서 이러실 수는 없, 꺄악!”
궁녀들이 혼비백산하는 소리를 듣고 류하는 화들짝 놀라며 일어났다. 거의 동시에 문이 열렸고, 무장한 군졸들이 들어왔다.
“월빈마마, 당장 옥사로 모시겠습니다. 부디 우리가 예우를 갖출 수 있도록 협조해 주십시오.”
“옥사라니, 내가 왜?”
공포보다는 황당함이 앞섰다.
구금된 연인에 대해 하도 절박하게 걱정하다 보니 드디어 내가 정신을 놓아 버린 건가, 헛것과 환청이 덮쳐오는 건가, 그런 실없는 의문마저 들었다.
“마마를 간통죄로 고발하신 분이 있습니다. 이에 대한 심문이 있을 예정입니다.”
선두에 선 군졸이 굳은 낯으로 설명했다. 이제야 류하의 공포는 황당함을 압도했다.
“간통죄?”
그녀는 한순간도 제하나 다른 궁녀들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들을 향한 인간적인 신뢰가 있었거니와, 만약 상전의 죄가 입증된다면 아랫사람들도 고달프기는 마찬가지니.
“누가 그런 망언을 입에 담았지? 누가 감히……!”
류하는 일단, 화난 척했다. 공주의 눈빛이 사납게 변했다. 어떻게든 잡아떼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래 봤자 소용없다는 절망적인 직감과 별개로, 아무것도 안 하고 끌려갈 수는 없었다.
“예빈마마의 고발이 있었습니다.”
군졸은 뚝뚝하게 대답했다. 류하는 말문이 막혔다.
“월빈마마, 묶지 않고 모시겠습니다. 부디 협조해 주십시오.”
말도 안 돼. 예리한 비명이 혀끝까지 치밀었다가 간신히 억눌려 폐부에 처박혔다.
류하는 주먹을 꾹 말아 쥐었다. 덜덜 떨리는 손끝을 들키는 게 이 와중에도 창피했다.
그토록 부질없는 자존심 하나만 남은 채, 스무 살 공주는 장정들에게 둘러싸였다.
“대체 내가, 누구랑 간통했다고 예빈께서 무고하더냐?”
류하는 이를 악물고 따졌다. 이번에도 불퉁한 대답이 돌아왔다.
“휘온 대장군입니다.”
류하가 간신히 붙들고 있던 끈 하나가 툭, 하고 끊겼다.
아무리 아니라고 우겨 봤자 빠져나갈 도리가 없음을 류하는 확실히 깨달았다.
자신과 온이 실제로 결백하지도 않을뿐더러, 설령 결백했더라도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었다.
죄 없는 자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는 건 권력을 쥔 사람에게 너무 쉬운 일이었다. 왕족으로 태어난 궁중의 온갖 부조리를 보며 자란 류하에게 그 사실은 자명했다.
이대로 가면 죽을 거야. 나도, 온도.
류하는 결정을 내렸다.
이로써 내 고국이 요괴의 딸을 바쳤다는 이유로 패망하고 나를 모시던 궁인들이 고초를 당하게 되더라도, 나는 후회할 틈이 없어.
“으아악?!”
“이게 무슨……!”
류하의 눈이 청색으로 번쩍였다. 스스로 꺼리는 힘을 개방해서라도 자신과 온을 구해 여기서 도망칠 심산이었다. 땅이 흔들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