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후궁의 은밀한 연서 (94)화 (94/123)

94화

“……달게 받아야지요. 이왕 받을 거, 쓰게 받는 것보다는 낫습니다.”

륜은 끝내 자학하듯 대답했다. 그가 벌떡 일어났다. 그는 동생을 지나쳐 방을 가로질렀다.

황제가 스스로 문을 열어젖히자 밖에서 대기하던 궁인들과 내관들이 흠칫했다.

“대장군을 옥사로 모셔라.”

황제의 나긋한 명령에 아랫사람들은 재차 움찔했다. 네, 뭐라고요? 누구를 어디로 모셔?

“짐의 소중한 동생이니, 부디 정중히 대하도록.”

부드럽게 덧붙이며 생긋 웃는 황제는 살짝 미친 것처럼 보여서, 아랫사람들은 서둘러 움직였다. 온은 다시 무표정했다.

“태후마마께는 내가 직접 사람을 보내 설명하지.”

륜은 어깨 너머로 온에게 타일렀다. 그제야 온은 형을 등진 채 얼굴을 찡그렸다. 아아, 어마마마. 죄송하다는 말로는 부족했다.

내관들은 떨며 다가왔다. 온은 그들이 가여워서라도 고분고분 일어났다. 아무도 감히 황족을 묶거나 억지로 끌고 가려 하지 않았다. 그럴 필요 없이, 온은 순순히 움직였다.

만약 온의 죄가 경죄였거나, 중죄였더라도 상황이 조금 달랐더라면, 옥사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나서 다음 날 아침 풀려났으리라.

설령 혐의가 이어지더라도 처소에 유폐되는 것 정도로 끝났겠지. 그는 어디까지나 황족이고, 견고한 신분제 사회에서 혈통의 특혜는 넘쳐나니까.

하지만 그를 모시는 내관들도, 직접 앞장서는 온 본인도, 현재의 구금이 단순한 경고 차원이 아님을 뻔히 알았다.

숙청이 재개되었다. 5년 전보다는 훨씬 소규모로, 하지만 매우 정확하게.

류하는 심장이 비틀리는 느낌을 받았다.

“뭐, 뭐라고?”

평소답지 않게 말도 더듬었다.

“대장군이 하옥됐어?”

예쁜 얼굴이 납빛으로 변했다. 소식을 전한 제하는 월빈마마가 기절이라도 하실까 봐 진심으로 걱정했다.

“네, 마마. 방금 다른 궁인들이 그렇게 말하는 걸 들었습니다.”

“안 돼, 왜……!”

다쳤다면서. 치료는 하고 갇힌 거야? 아니, 갇힌 마당에 치료가 뭐가 중요해. 그래도, 그래도 치료는 해야 할 텐데. 치료는, 아.

“혹시 이유도 들었니? 명분이 뭐래?”

“그, 저도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것뿐이지만, 아마 오늘 대장군님과 군졸들이 다친 것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요?”

“그렇지? 그래, 나도 그렇게 생각해. 대체 밖에서 무슨 일이……. 아, 일단 만나러 가야…….”

류하는 횡설수설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급한 동작에 잔이 떠밀리며 차가 왈칵 쏟아졌다.

“마마, 마마! 지금 어디 가세요?”

“옥사에, 대장군한테……. 아니, 황제 폐하한테 가려고. 가서 이유라도 들어 봐야…….”

“월빈마마, 정신 차리세요! 지금 대장군님께 가서 어쩌시려고요? 그리고 폐하한테 가서는 대체 뭐라고 말씀드릴 겁니까?”

그러게. 뭐라고 말씀드리지. 제발 당신의 동생을 살려 달라고 빌어야 할까.

5년 전에 죽었어야 할 당신의 이복동생을 살려 달라고, 내 하나뿐인 연인에게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대신 내 목숨을 바치겠노라고 애원해 볼까.

“마마, 월빈마마, 부디……. 정말 주제넘은 일이지만, 감히 하나만 여쭈겠습니다.”

멍하니 머뭇대는 상전의 소매를 그러잡은 채 제하는 울먹였다. 이윽고, 겁에 질려 바짝 낮춘 목소리로 질문했다.

“마마께서는 혹시, 온 대장군님을 연모하시나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비명 같은 눈빛이 모든 답을 대신했다.

“가끔 마마의 시선이 대장군님을 향하는 걸 봤습니다. 대장군님이 마마를 보며 웃는 것도 봤고요. 마마, 부디……. 스스로 위험에 빠트리지 마세요. 마마와 저와 마마를 따르는 다른 사람들을 생각해 주세요. 제가 이렇게 빌게요, 제발.”

처음에는 자신의 과대망상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통속 소설을 너무 많이 읽어서 머리가 어떻게 돼 버린 거야.

월빈마마와 온 대장군이라니, 허허, 참나. 둘이 제정신이 아니고서야 그런 관계를 맺을 리가 없잖아?

한쪽은 황제의 후궁이고, 한쪽은 황제의 동생인데, 설마. 둘이 서로를 애타게 마음에 담았겠어? 죽을 것처럼, 간절하게, 지순하게?

아아. 한데 원래, 사랑은 제정신으로 하는 게 아닌가 봐.

“……언제부터 알았어?”

류하는 딱 한 가지를 질문했다. 제하는 가냘픈 음성으로 대답했다.

“오래되지는 않았습니다.”

사실, 조금 오래된 편이었다. 한동안 직감적인 의심만 품고 있다가 여름 무렵, 벼락같은 깨달음을 얻었다.

류하의 말이 미쳐 날뛰고, 온은 그녀를 구하고자 본인의 목숨까지 걸었을 때.

이런 것들을 미주알고주알 알려 봤자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으리라는 생각에 제하는 말을 삼갔다. 기껏해야 월빈마마의 고통만 깊어지겠지.

“……연정이라니, 당치도 않아.”

류하는 뒤늦게 부인했다. 눈빛과 말투는 기계 같았다.

제하는 입술을 물어 흐느낌을 참았다. 가여우신 월빈마마. 내게 늘 친절하고 나와 같은 고향을 기억하는 당신이 늘 기쁘기만을 바랐는데.

“큰일 날 소리를 하는구나. 연모하지 않아. 그런 게 아니야.”

가까스로 쥐어짠 어설픈 부정은 류하 본인이 듣기에도 한심했다.

류하는 도로 천천히 착석했다. 그녀는 엉망이 된 식탁을 내려다보았다.

“제하야, 내가 불민해서 차를 쏟았구나. 치워 주겠니?”

“네, 마마.”

“걱정시켜서 미안하다. 나 때문에 네가 위험해지는 일은 없을 거야.”

“……네, 마마.”

황제의 후궁과 황제의 동생이 통정했다는 자극적인 추문이 퍼지는 순간, 문제의 후궁을 모시는 궁인들도 무사하지 못하리라. 류하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본인과 연인의 불행으로도 모자라 아랫사람들의 파멸까지 짊어지고 싶지 않아서 류하는 여태 참고 또 참았다.

그런데, 부족했나 봐. 기어코 새어 나가 단서를 남겼나 봐.

겁먹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많고 많은 사내 중 하필 시동생을 마음에 담는 망측한 짓을 저질렀는데, 궁녀가 이를 짐작해 버렸다. 다른 이들도 눈치채지 않았을 거라는 보장이 없었다.

하지만 류하는 의외로 차분했다. 아니, 차분한 게 아니었다. 공포와 좌절과 염려가 극에 달하자 오히려 머릿속이 새하얗게 무너졌다.

옥사에 갇힌 온이 걱정됐고, 한심하게 들켜 버린 자기 자신이 미웠고, 지금 당장 연인에게 달려갈 수 없는 제 처지가 한스러웠다.

이제라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옥사로 향할까? 도깨비의 힘을 사용해 옥문을 깨트리고 연인을 끄집어내는 것쯤이야 내게 일도 아닐 텐데.

<마마와 저와 마마를 따르는 다른 사람들을 생각해 주세요.>

그새 정든 사람들이 눈에 밟혀 차마 결단하지도 못했다.

언젠가 그녀의 연인이 애매한 다정함으로 이복형을 감싼 탓에 파국에 이르렀듯, 류하도 무력한 상냥함에 묶여 하염없이 망설이고 절망했다.

그대 하나 살리겠다고 다른 수십 명의 죽음을 결정하는 건 너무 무서워.

결국 나도 스무 살 애송이야. 그대를 사랑하면서 정작 아무것도 못 하는 나약한 바보야.

공포, 좌절, 염려, 자책 속에서 밤은 흘렀다. 간신히 새벽을 맞이한 뒤에도 류하는 혼탁한 어둠에 잠긴 느낌이었다.

그 끝을 알지 못해, 두려웠다.

류하가 괴로운 밤을 지새울 때, 그녀의 연인도 그녀를 생각했다.

‘걱정하시겠네.’

차가운 옥중에서 그는 갈증에 시달렸다.

아, 옥문을 부수고 당신께 달려가고 싶다. 당신을 붙안고 속삭일 거야.

부디, 나 때문에 고통받지 말아 달라고. 아둔한 나는 잊고 그저 평화롭게 살아 달라고.

언젠가 당신 혼자 맞이할 북방의 첫눈을 아름답게, 정녕 아름답게 기억해 달라고.

적어도 폐하께서 내게 조용히 어의를 보내 내 다친 팔을 고쳐놓게 하셨으니, 내가 부상 때문에 힘들어하고 있을까 봐 걱정하지는 말아 달라고 달랠 수라도 있었다면.

온은 자신을 옥에 가둬 놓고는 어의를 보내 자신의 팔을 정성스레 치료해 준 형의 모순에 그리 경악하지는 않았다.

어쨌든 온은 황족이니, 벌할 때 벌하고 죽일 때 죽이더라도 너무 흉한 꼴이어서는 체면이 서지 않을 테니까.

어쩌면 이건 형님의 동생을 향한 마지막 친절일지도 모른다. 온 하나를 내치는 대신 온의 어미는 끝까지 살려 주겠다는 무언의 약속과 마찬가지로.

온은 오도카니 서서 창살에 이마를 기댔다. 당장이라도 뛰쳐나가고 싶을 만큼 조급한 심정에 가만히 앉아 있기가 힘들었다.

그는 자신의 구금 소식을 듣고 놀랐을 부하들과 겁에 질렸을 어머니, 그리고 아마 저를 지극히 걱정하고 계실 연인을 회상하며 밤을 지새웠다.

마지막 나날에 사랑하는 사람들을 떠올릴 수 있어서 감사하다고 생각했다.

이미 5년을 겨우 연장한 덤 같은 목숨인지라, 원망하는 것도 어려웠다.

그는 그렇게 새벽을 기다렸다. 어둠과 별반 다르지 않은 새벽이었다.

온 대장군이 하옥되었다는 사실과 도성에 이종족이 나타났다는 소식 중에서 어느 쪽을 더 놀라워해야 할지 신하들은 헷갈렸다.

사실, 순수하게 충격적인 정도만 따지자면 후자가 훨씬 더했다.

대장군의 몰락이야 언젠가는 어차피 일어날 일이었다고 많은 이들이 추측하고 있었으나, 도깨비의 등장은 그야말로 상상도 못 했던 바니까.

당연히 그날의 조례는 그 두 가지 사안으로 소란스러웠다. 몇몇 적극적인 인사들은 그 두 개를 엮어 단 한쪽을 제대로 박살 내고자 했다.

“폐하, 부디 죄인 휘온을 황적에서 제명하시고 도성 밖으로 내치십시오.”

“그 전에 그자가 혹 불충한 마음을 품고 어제 출궁한 건 아닌지 확실히 밝히셔야 합니다. 역모죄로 처형된 단씨 가주의 딸을 만났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게다가 이런 때에 도깨비의 출몰이라니, 필시 신들께서 죄인의 불순한 뜻을 미리 아시고 우리에게 경고하시는 거로 생각합니다.”

대전쟁 이후로 이종족의 등장은 주로 불길한 징조로 여겨졌다.

물론 실제로는 그때마다 해석하기 나름이었지만, 적어도 인간의 편견과 오랜 갈등은 거의 늘 한결같은 결론을 내놓았다.

온을 몰아내고자 하는 이들은 그를 희생양으로 점찍었다. 제국에 갑자기 이런 흉조가 나타난 이유를 전부 그에게 뒤집어씌우기로 했다.

“폐하, 부디 죄인 휘온을 문초하신 뒤 폐위하소서!”

미신이든 뭐든 상관없으니, 어떻게든 핑계를 하나라도 더 붙여 휘온을 완벽하게 내쫓아야 한다.

어떤 이들은 황제와 황후를 향한 충심 때문에 열심이었고, 어떤 이들은 그저 절박하게 자신의 안위와 이득을 지키기 원했다.

‘이번에 황후 전하가 아들을 낳든 딸을 낳든, 휘온이 권력을 쥐고 있는 건 너무 위험해. 죽일 수 없다면, 최소한 완전히 실권하도록 해야 해.’

황제의 진정한 충신들을 이처럼 생각했고.

‘불안하니까 그냥 빨리 죽어라, 죽어!’

단지 살아남기 위해 5년 전 륜에게 박쥐처럼 붙었던 이들은 휘온을 두고 절실하게 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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