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그게 무슨 말이야? 다들 같은 이유로 다친 건가? 아니면 개별적으로 변을 당했대?”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아마 다들 같은 이유로 다친 것 같습니다. 다친 군졸들과 대장군님이 차례로 후문을 통해 입궐하는 걸 성빈마마를 모시는 궁인이 봤다고 들었습니다.”
제하의 대답을 듣고 류하는 혼란을 느꼈다.
‘뭐야, 그럼 다 같은 일로 당했다는 거잖아?’
높으신 대장군님과 황실의 영광스러운 군인들이 단체로 다치는 건 결코 작은 일이 아니었다. 심지어, 그 일은 황성 안에서 일어났다.
온이 휴가를 내고 출궁한 게 오늘 아침이었으니, 고작 반나절 만에 수도 내에서 류하가 모르는 모종의 엄청난 일이 일어났다는 뜻이었다.
류하는 당황했다. 온이 단순히 다치기만 했다면 걱정하는 걸로 끝났을 텐데, 이제는 호기심과 불안감이 뒤엉켜 몹시 두렵기까지 했다.
‘아, 대체 밖에서 뭘 하고 온 거야?’
살 물건이 있다며? 그게 다라며. 그 말만 남기고 오늘 휴가를 내서 밖으로 나갔잖아.
그런데 이런 식으로 돌아오면 어떡해. 몸에는 상처를 입고, 온통 수수께끼에 싸인 채.
류하는 문득, 제 헛구역질을 유도했던 사특한 기운을 떠올리고 안색이 창백해졌다.
아직은 정보가 부족한 탓에 그 어떤 명쾌한 결론도 내릴 수 없었다. 하나 분명한 건, 무언가 크게 잘못되었다.
류하가 훨씬 확실한 비보를 맞닥트린 때는, 그날의 깊은 밤이었다.
온은 사지 멀쩡한 군졸을 먼저 궁으로 보내 황제에게 현황을 간략하게 전달했다. 이후, 그는 부하들과 함께 시체를 분류했다.
치욕을 당하지 않은 시체가 있었고, 두 번 죽은 시체가 있었다. 후자가 그의 마음을 더 아프게 했다.
“불을 붙여라.”
온은 치미는 피로를 눌러 삼키며 가장 가까이 있는 부하에게 명령했다. 부하는 주저했다. 온은 그의 불복종을 탓하지 않았다.
유가족에게 시신을 확인할 기회를 주지도 않고 곧바로 화장하는 건 대륙의 보편적인 장례 예절에 심하게 어긋났다.
온은 부하의 망설임을 이해했다. 그러나 이에 동조할 마음은 없었다.
“동료를 세 번 죽이고 싶지 않다면, 붙이는 게 좋을 거야.”
그는 무겁게 덧붙인 뒤, 본인이 직접 나무를 그어 횃불을 피웠다.
되살린 시체들로 전국적인 혼란을 일으켰다가 끝내 짓밟혔던 어느 사교 집단에 관한 기록이 그의 머릿속에 선했다.
‘태우거나, 아예 조각내라고 했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활활 불태우거나 잘게 짓부수라고 했다. 시체들이 구더기처럼 일그러진 형태로라도 꾸역꾸역 재생하는 꼴을 면하고 싶다면.
‘그래서 그때 류하 님도…….’
별처럼 파란 눈으로 재앙 같은 기적을 일으켰던 제 연인이 떠올랐다.
도깨비의 피를 이은 공주는 불꽃으로 시체를 잡아먹고 지진으로 송장을 깨부숴 온과 그의 부하들을 구했다.
‘그때는 뭐, 그냥 본능이었던 것 같긴 하지만.’
실제로 류하는 그때 전략적인 결정을 내리지 않았다. 이대로 있다간 다 죽을 거라는 공포 때문에 닥치는 대로 힘을 쏟아부었을 뿐.
온은 새카만 잿더미로 허물어지는 시체들을 지켜보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오른팔이 욱신거렸다. 아까 도깨비와 정통으로 맞붙은 대가였다.
‘약점이 뚜렷하긴 했어.’
종족적 약점도, 개별적 약점도 뚜렷했다. 청자초의 효능은 온이 기록을 통해 접한 것 이상으로 강력했다. 그리고, 개별적 약점은.
‘……가윤 낭자.’
온몸으로 그렇게 가시를 세우다니, 지순하기도 하지. 온은 쓴웃음을 삼켰다.
‘죽었으려나?’
온은 청자초 진액을 바른 칼에 찔려 정신을 못 차리던 도깨비를 생각했다.
잿빛으로 질린 마지막 안색을 고려했을 때, 아마 이동 후에 죽었을 가능성이 컸다.
아니면, 가윤 낭자가 기어코 살려 냈으려나.
어느 쪽이든 이제는 온의 영향력 밖이었다.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허망하게 죽은 군졸들의 시신을 수습하고 다친 이들을 궁으로 돌려보낸 뒤, 본인도 환궁해 황제 폐하를 알현하는 것.
그리하여 자신의 실책을 고백하고 묵묵히 처벌을 기다리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온은 이제 되삼킬 탄식조차 남지 않았다. 그는 인형처럼 무감해진 표정으로 군졸들에게 돌아섰다.
“다치지 않은 자들은 반씩 나뉘어 부상자와 사망자를 각각 챙긴다. 너희 둘은 부상자와 사망자의 무기를 회수하고.”
“네, 대장군님.”
“명 받들겠습니다.”
자, 이제 파국을 맞이하러 돌아가 볼까.
나를 버리기로 마음먹은 형님과 예전부터 내 죽음을 원하던 형수님께 내 죄를 고해 보자.
게다가 위대한 제국의 심장부인 이곳에 사특한 송장 떼가 짧게나마 돌아다녔다고, 대전쟁 이후로 종적을 감췄던 기이한 존재가 인간들 앞에 당당히 모습을 드러냈다고, 전부 털어놓자.
뒤따를 후폭풍을 온은 전부 가늠할 수조차 없었다.
황제의 자리를 꿈꾸는 사내는 정보를 얻는 속도가 빨라야 마땅했다.
“실패했습니다.”
온과 군졸들이 환궁할 즈음, 휘결은 이미 심복의 다급한 속삭임을 듣고 이를 갈던 참이었다.
“어쩌시겠습니까? 도깨비가 대놓고 사술을 썼으니, 황제가 조용히 넘어가지는 않을 겁니다.”
다른 누군가 우울하게 덧붙였고, 휘결은 이에 완벽하게 동의했다.
사술도 사술이지만, 죽었다고 알려진 역적의 딸이 황제의 동생과 접촉을 시도한 것도 결코 좌시할 상황은 아니었다.
“……계획을 앞당겨야겠소. 이왕 시끄러워졌으니, 난리를 최대한 써먹어야지.”
휘결은 눈살을 팍 찡그린 채 냉정하게 판단했다.
어차피 언젠가는 전면전을 시작할 예정이었으니, 본의 아니게 조금 일찍 착수하는 거라고 치자.
어디로 튀었을지 감도 잡히지 않는 도깨비 놈과 단가윤을 떠올리며 씩씩대는 것보다는 훨씬 효율적인 일일 테니.
“오늘부터 당장 소문을 퍼트리세요. 매수할 사람들은 매수하고. 황성에 도깨비가 나타났다고, 그리고 그 도깨비가 사술을 썼다고. 이미 죽은 사람이 되살아나 거리를 활개하고 다른 사람을 해쳤다고.”
최대한 부풀려서, 가장 자극적이고 부지런하게, 저잣거리의 코흘리개 아이들조차 기억하도록. 모든 게 어차피 계획대로 되리라.
“변방에도 당장 연락을 넣고요.”
황성에 이종족이 등장했다고 동네방네 떠들어라. 시체들을 파헤쳐 군대로 바꾸어라.
그러고 나서 소리쳐 알려라. 그게 사실이든 아니든 상관은 없노라.
전쟁은 총칼로만 하는 게 아니며, 때로는 세 치 혀가 잘 벼린 비수만큼 예리하니.
아비를 참수하고 즉위한 패륜 황제 때문에 신들이 노했다고, 군주의 부덕을 눈감아 준 제국에 천벌이 내렸다고, 온 천지에 망조가 가득하다고, 이종족의 활개와 망자의 패악이 그 증거라고.
전면전에 앞서, 여론전이 먼저였다. 원래는 좀 더 시간을 갖고 신중하게 움직이려 했는데, 이왕 상황이 막장으로 치달은 지금, 당장 움직이는 게 나았다.
가윤과 주안의 판단이 정확했다. 그들이 황제로 선택한 휘결은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충분히 유능한 자였다. 걱정할 필요는 적었다.
휘결과 그의 부하들은 빠르게 움직였다. 사람들의 속닥임은 그보다도 빨랐다. 이미 정성스레 준비해 두었던 악소문은 순식간에 퍼졌다.
제국의 변경에서 첫 시체 떼가 목격된 건 그로부터 며칠 뒤였다.
휘결이 준비된 계획의 착수를 결심한 날, 온은 다친 군졸들이 무사히 치료소에 도착한 걸 확인하자마자 황제에게 갔다.
“그래서, 놓쳤어요?”
륜의 음성은 스산했다. 온은 딱히 놀라지 않았다. 절망과 놀람은 언제나 별개였다.
“그리고 아우님도 다치고, 군졸들도 다치고, 심지어 몇 명은 죽고, 빌어먹을 도깨비는 모두가 보는 앞에서 사술을 부리고 달아났다, 라.”
륜이 차가운 한숨을 뱉었다. 온은 무표정한 얼굴로 처분을 기다렸다.
“아우님. 이번 일만 무사히 끝내고 나면 혼자 조용히 낙향하기로 한 거 아니었나요?”
륜은 이를 악문 채 되물었다. 온은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전부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어떤 벌이든 달게 받겠습니다.”
“당연히 아우님이 책임져야죠. 아우님이 아니면 달리 누가 책임집니까?”
온은 침착하게 고했고, 륜은 까칠하게 받아쳤다. 그러자 온이 사뭇 삐딱한 표정을 지었다. 이럴 때면 두 형제는 서로를 무척 닮아 보였다. 평소보다도, 더.
“어차피 내치시기로 한 거 아닙니까? 이제 완벽한 구실이 생기셨으니, 어서 실천하십시오.”
“하, 뭐라고요?”
온이 냉담하게 아뢰자 륜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온은 뚝뚝하게 덧붙였다.
“제 실책으로 인해 폐하의 병사들이 목숨을 잃었으니 폐하께서 분노하시는 건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외에, 왜 폐하께서 이렇게까지 감정적으로 구시는지 저는 모르겠습니다.”
왜 안타까워해? 나를 단순히 나무라는 게 아니라, 짜증 내고 있잖아.
당신이 나를 지키는 걸 한층 힘들게 만들어서, 그래서 화내는 중이잖아.
우스운 일이었다. 형은 이미 동생을 버렸고, 동생은 그 사실을 진즉 받아들였다. 그런데 아직도 륜은 때때로 이를 잊어버린 것처럼 행동했다.
“지금 나한테 말대꾸하는 건가요?”
륜은 어이가 없어서 재차 되물었다. 네가 뭘 잘했다고 내게 개기느냐, 이런 뜻이었다. 동생은 쌀쌀맞게 응답했다.
“폐하께서 그리 여기신다면 그런 거겠죠.”
륜은 동생을 노려보았다. 온은 형을 뻔뻔하게 맞바라보았다. 륜은 다시 헛숨을 토했다.
“정말로, 단순히 낙향시켜 줄 생각이었습니다.”
륜은 탁하게 고백했다. 온은 시선을 내리깔았다. 륜의 음성도 함께 바닥을 긁었다.
“그런데 이제는…….”
너 때문에 군졸들이 죽었어. 이게 무슨 뜻인지 알아?
이참에 너를 완벽하게 제거하기 원하는 이들이 그대의 목숨줄을 물어뜯을 빌미를 얻은 거야.
“폐하께서 원하신 일입니다.”
온은 나직하게 상기시켰다. 아내와 아이를 지키고 싶어서 동생인 나를 버리겠다고 만인 앞에서 공표한 게 누군데. 그런 당신을 탓한 적 없어.
“그리고 황후 전하께서 원하시지요.”
그는 쓰디쓴 눈빛으로 첫째 형수를 언급했다. 륜은 반박하는 대신 이를 악물었다.
“저 때문에 인명이 낭비된 건 사실이니, 아까 말씀드렸듯 어떤 벌이든 달게 받겠습니다.”
빨리 내 숨통을 끊어 달라고 스스로 조르는 꼴이 우스웠으나, 조금 지친 것도 사실이었다. 객관적으로, 이번에는 빠져나가기 힘들 거라는 생각도 했다.
마지막을 곱씹자니 류하가 떠올랐다.
사랑스러운 내 공주님. 적어도 내가 명예롭게 대장군 자리를 사임하고 조용히 낙향했다가 거기서 ‘사고’로 죽었다면, 당신이 덜 슬퍼하지 않을까 생각했거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