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수연과 훤아는 근심하며 친구를 맴돌았다. 둘 다 순간 입덧을 의심했지만, 한평생 사내와 몸을 섞어 본 적 없는 류하 본인은 당연히 회임 가능성은 안중에도 없었다.
‘온.’
그녀는 단 한 사람을 생각했다.
미친 도깨비와 되살아난 시체가 공존하는 수도의 어딘가에서 태평하게 물건이나 구매하고 있을 휴가 중의 연인을 떠올리자 머리가 아찔해졌다.
물론, 비록 류하는 아직 몰랐지만, 휴가는 그저 핑계였다. 이때 온은 전혀 태평하지 않았다.
그는 그녀와 다른 의미로 악몽을 마주하는 중이었다.
온은 삼켰던 숨을 다시 탄식으로 뱉었다. 도깨비와 역적을 쫓아야 하는데, 그럴 틈이 없었다.
도깨비는 역적을 끌어안은 채 사라졌고, 온은 번쩍한 파란빛을 무시하며 검을 고쳐 잡았다.
‘젠장……!’
검을 고쳐 잡았으나, 곧 그게 무용한 짓임을 깨달았다.
아까 도깨비가 맨손으로 검날을 쥐고 우그러트리는 바람에 온의 무기는 형편없는 형체가 되었다.
온은 깔끔한 포기 끝에 맨몸으로 달려들었다. 객관적으로 꽤 미친 짓이었으나, 그만큼 절박한 상황이었다.
“으아악!”
한편, 온과 함께 있던 군졸들은 갈피를 잃고 오합지졸로 전락했다. 다들 단단히 훈련받은 황실의 자랑스러운 군인이었으나, 이런 상황에 부닥친 건 처음이었다.
그들은 류하 공주를 데리러 함께 월국으로 내려갔던 자들도 아니었고, 대전쟁 시절에 살아 있던 사람은 더더욱 아니었다.
분명 숨이 끊어졌던 동료가 일어나 허우적대며 다가오는 상황이 경악스러운 건 당연했다. 그들은 대응할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절규했다.
“팔다리를 노려! 그래야 움직임을 막을 수 있다!”
온은 유일하게 이성을 잃지 않고 소리쳤다. 동시에 그는 몸을 숙여 바닥에 버려진 검을 아슬아슬하게 회수했다.
그는 죽은 군인의 칼을 주워 몸을 일으킴과 동시에 사선으로 그었고, 시체를 문자 그대로 두 동강 내버렸다.
“당장 제압해! 명령이다!”
명령이라는 냉정한 말에 군졸들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움직였다.
초반의 충격을 벗어나고 나자 그들은 매섭게 움직였고, 곧 그들의 동료는 두 번씩 죽었다.
“아, 아…….”
시체를 쓰러트리고 나서야 그들은 다시 신음했다.
망자의 시신을 존중하는 게 대륙 인간들의 보편적 정서였고, 그런즉 방금 그들이 저지른 일은 동료들을 향한 극악무도한 죄였다.
이종족과 역적에게 억울하게 당한 그들의 시신을 자기들이 직접 썰어 버리다니.
온은 남의 칼에서 흙먼지를 털어 내며 이를 악물었다. 그 칼이 원주인은 아마 온이 휘두른 무기에 베여 죽음 후에도 죽었을 것이다.
‘설마, 동일인?’
온의 머리가 차갑게 식었다. 뭐, 정확히 말해서 동일인은 아니겠지. 그놈은 인간이 아니니까.
어쨌든 자신이 류하를 데리고 휘국으로 올 때도, 방금 도깨비와 역적이 도망치던 때도 망자가 시체로 되살아났다.
설마 정말로 같은 존재의 소행일까? 만약, 그렇다면.
‘……가윤 낭자.’
이번에 그 도깨비가 시체들을 되살렸듯 저번에도 그가 계곡에서 망자를 모욕했다면, 당시 가윤도 함께 있었을 확률이 높았다.
‘어떻게?’
어떻게 그대가 그럴 수 있어?
‘왜?’
뻔뻔한 위선임을 알지만, 그래도 묻고 싶어.
그대의 가족을 지키지 못한 내가 할 말은 없어. 나는 자격 없는 놈이야.
하지만, 그대의 가족이 몰살당했잖아. 역적이라는 이유로 고이 묻히지도 못하고 목이 저잣거리에 매달려 농락당했잖아.
그런 아픔을 아는 그대가 다른 이의 송장을 이런 식으로 짓밟으면 안 되지.
그는 가윤의 선택에 진노를 느꼈다. 정말이지, 뻔뻔하게도.
동시에, 그는 가윤의 원한이 얼마나 지독하고 위태로운지 새삼스레 깨달았다.
가윤도 휘국의 귀족으로서 이 나라의 보편적인 인륜을 익히며 자랐으니, 시체를 되살려 군대로 쓴다는 발상을 처음부터 기껍게 여겼을 리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기어코 이에 가담했다.
실망스러웠다. 실망했다는 사실조차 부끄러웠다. 멋대로 기대하고 멋대로 실망하다니. 그녀를 체포할 생각이었으면서.
‘결국 실패했네.’
주변의 난장판을 돌아보며 온은 낭패감을 삼켰다. 이제는 분노가 아닌 절망으로 마음이 서늘해졌다.
‘내가 아뢴 계획인데, 내가 실패했어.’
스스로 미끼가 되기를 청하고 군권을 위임받아 역적을 잡으러 나섰다.
그러나 역적은 도망쳤고, 두 번 죽은 군졸들과 화상 입은 병사들만 남았다.
온은 제 발치에 놓인 낭떠러지를 보고도 탄식조차 할 수 없었다.
그는 참으로 완벽하게, 스스로 무덤을 팠다.
류하는 구역질을 겨우 가라앉혔다. 그녀는 처소로 돌아가야겠다며 양해를 구했고, 훤아와 수연은 순순히 그녀를 보내 주었다. 착한 그들은 류하의 건강을 염려하며 푹 쉬라고 타일렀다.
류하는 그들을 향해 희미하게 웃어 주었다. 그들의 당부대로 할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으면서.
류하는 어의를 부르지 않았다. 그녀는 처소에 틀어박혀 그저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순간 그녀를 난자했던 괴이한 기시감을, 뒤따른 메슥거림을, 그리고 오늘 외출한 온을.
또한, 얼굴조차 모르는 자신의 동족을 오래도록 곱씹었다.
‘설마, 그때 그 도깨비?’
아니, 어쩌면 얼굴은 이미 알지도 모른다.
‘그놈이 이놈이라고? 그러면, 내가 휘국으로 오던 길에도?’
류하는 살면서 순혈 도깨비를 본 적이 딴 한 번이었다. 그때 공교롭게도 온의 목숨을 살렸던 그 남성.
제국의 수도에 정확히 얼마나 많은 도깨비가 숨어 살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무려 두 명 이상의 도깨비가 황성 한복판을 돌아다니다가 소란을 피울 일이 확률이 얼마나 높을까.
그런즉, 당시 자객의 머리를 깨부숴 온을 살렸던 도깨비와 지금 아마 사술을 부려 시체를 되살린 도깨비가 동일할 거라고 류하는 추론했다.
그리고 만약, 그녀의 추측이 사실이라면.
‘개자식, 진짜…….’
류하는 어금니를 으득, 물었다. 휘국으로 오는 길에 시체들을 해치우고 나서 치를 떨던 기억이 선명하게 살아났다.
그때 그녀는, 송장을 인형처럼 헤집어 멋대로 망자를 능욕한 미지의 존재를 증오했었다.
모든 도깨비가 서로 같은 힘을 쓰는 건 아니었다. 인간끼리도 개인차가 드러나듯이 도깨비의 신통력도 조금씩 고유한 면이 있었다.
도깨비라 해서 모두 송장을 되살릴 수는 없으며, 이는 지금 수도 어딘가에서 사고를 친 도깨비가 류하가 휘국으로 올 때 시체 떼를 보낸 자와 일치한다는 뜻이리라.
류하가 아버지의 동족에 대해 번뇌하며 쉬는 척할 때, 제하가 세숫물을 가지고 들어왔다.
제 상전이 다과회 도중에 메스꺼움을 느끼고 처소로 돌아왔다는 걸 알고 있는 그녀는 걱정스레 울먹이며 류하에게 다가왔다.
“월빈마마, 혹시 해비마마나 성빈마마가 마마의 차에 독을 탄 건 아니겠지요?”
음, 만약 정말 그런 것 같다면 그걸 소리 내어 말하면 안 되지, 제하야.
“제하야, 소설을 너무 많이 읽었구나.”
류하는 심각하게 타일렀다. 제하는 여전히 시무룩한 표정이었다. 이후, 궁녀는 묵묵히 후궁의 세수 시중을 들었다.
“대장군께서는 혹시 복귀했니?”
류하는 제하가 건넨 수건으로 안면의 물기를 닦으며 태연하게 물었다. 제하는 류하를 잠시 보더니, 공손히 아뢰었다.
“네, 마마. 얼마 전에 환궁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래. 그렇구나.”
“그런데 궐 밖에서 다치셨다고 합니다.”
“뭐라고?”
류하의 음성이 날카로워졌다. 제하는 주춤했다. 연기를 잊은 류하는 제하를 절박하게 바라보았고, 제하는 조심스레 부연했다.
“오른팔을 다치셨다고 들었습니다. 정확한 사정은 저도 알지 못합니다. 송구합니다, 마마.”
뒷방 후궁은 이래서 문제였다.
제국의 현지인 궁녀들을 아직 온전히 휘어잡지 못했고 든든한 친정 가문도 없는 류하는 아무래도 정보를 얻는 속도가 내명부에서 가장 느렸다.
온이 다쳤다니. 류하는 염려 가운데 이를 악물었다.
휴가를 내고 평범하게 외출했던 그가 뜬금없이 다쳐서 돌아왔다니, 걱정과 함께 의아함이 솟구쳤다.
하지만 역시, 의아함보다는 걱정이 더 컸다. 류하는 팔을 다쳐 환궁했다는 연인을 위해 근심했다.
그를 불러 상태를 자세히 확인하고 싶었지만, 자신이 그래도 될지 알 수 없어서 그녀는 주저했다.
거동이 불편할지도 모르는 환자에게 오라 가라 명령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자신이 먼저 찾아가기에는 남들의 시선이 마음에 걸렸다.
공식적으로 류하는 온보다 윗사람이었기에, 만약 그 둘이 만나고자 한다면 호위대장 온이 월빈마마께 찾아오는 게 먼저였다.
류하가 구태여 온을 먼저 찾아 나서는 건 심히 이례적인 일이리라. 이례적인 일은 시선을 끌기 마련이고, 주목은 의심으로 이어지기 쉬웠다.
아아, 답답해.
“그 외에 다친 곳은 없다더냐?”
류하는 결국, 이를 악물고 제하를 닦달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자신의 제한적인 수단이 비참했다.
“달리 들은 바가 없습니다. 송구합니다.”
제하는 초조하게 고개를 조아렸다. 평소에는 유쾌하고 상냥한 자신의 상전이 지금 유독 날카로운 게 느껴져서, 그녀는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긴장 외에도 무의식적인 공포가 있었다.
“아니다. 네가 송구할 이유는 없어.”
류하는 재빨리 자신을 추슬렀다. 가여운 궁녀에게 분풀이한 게 미안했고, 부끄러웠다.
아랫사람의 힘은 대체로 윗전의 힘과 비례하며, 제하의 정보력이 달리는 건 어디까지나 제하의 상전인 류하의 정보력이 달리기 때문이었다.
그런즉, 류하가 그토록 애타게 궁금해하는 온에 관한 보고를 제하가 재깍재깍 올리지 못한다 하여 류하가 화낼 자격은 없었다.
류하는 이를 이해했고, 애써 참았다.
아아, 어찌 내가 너를 탓하랴? 무슨 자격으로 너를 다그치고, 네가 움츠리며 내게 사과를 거듭하게 할까.
내가 바보처럼 내 시동생과 사랑에 빠진 건 네 잘못이 아니야.
차마 패륜적인 연정을 드러내지 못해 연인이 다쳤다는 소식을 듣고도 한걸음에 달려갈 수 없는 것도, 네 잘못이 아니란다.
“혹시 대장군에 대해 더 들리는 게 있다면 그때마다 내게 고하렴.”
“네, 월빈마마.”
“그자가 왜 다쳤는지는 혹시 알고 있니? 궐 밖에서 사고를 당했다더냐?”
“그게, 아직 확실치는 않은데요, 대장군님뿐 아니라 황실의 군졸 여럿이 오늘 바깥에서 부상을 당했다고 합니다.”
“뭐?”
류하의 눈이 커졌다. 이건 또 무슨 뜬금없는 상황일까. 황제의 동생과 황실의 군졸들이 한날한시에 우르르 다쳐서 돌아올 일이 뭐가 있다고. 갑자기, 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