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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궁의 은밀한 연서 (91)화 (91/123)

91화

“그럴 필요 없습니다.”

그녀는 나직하게 받아쳤다. 이번에도 음성은 매우 작아서, 모닥불 소리에 묻힌 척 외면할 수 있었다.

실제로 주안은 못 들은 척 딴청을 피웠다. 가윤은 눈살을 찌푸리지 않았다.

가윤은 다시 하늘을 살폈다. 이제 확실히 어두웠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그녀는 불과 몇 시간 전에 일어났던 긴박한 접전을 떠올리고 부르르 떨었다.

“관군은 어떻게 됐을까요? 시체들이랑.”

가윤은 어둠을 보며 물었다. 주안은 덤덤하게 대답했다.

“관군이 시체들을 제압했겠지. 몇 구 없었어. 전부 되살릴 만큼 신통력이 남아 있지 않았어.”

다행이다. 가윤은 생각했다. 다행이라고? 그녀는 자신의 위선이 께름칙했다.

시체들을 이용해 제국에 혼란을 퍼트리고 반군에게 명분을 실어 주는 계획은 그녀와 주안이 주도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한데 이제 와서 안도라니.

적어도 시내 한복판이 전쟁터로 변하는 상황을 원치 않는다는 점은 진심이었다.

평범한 백성과 군졸들이 구분되고, 전장과 후방이 확실히 분리되는 시대였다.

전쟁터에서 무장한 병사들을 상대로는 얼마든지 비열하고 잔혹해질 의향이 있었지만, 뭇사람의 일상이 펼쳐지는 도시와 마을만큼은 되도록 지켜 주고 싶었다.

무엇보다, 수도는 가윤의 고향이었다.

내 16년 평생의 추억이 담긴 이곳에 적어도 시체 군단이 판치지 않았으면 하는 소망은 역시 위선일까.

관군은 가윤의 적이긴 했으나, 이번만큼은 그들이 시체 떼를 초장에 진압해 줬기를 그녀는 진지하게 기뻐했다.

관군. 대장군. 온. 태자 전하.

가윤은 온을 생각했다.

“가윤아, 나 추워.”

주안이 갑자기 불렀다. 온을 떠올리던 와중에 주안의 목소리가 들리자 가윤은 공연히 흠칫했다.

“추우신가요? 땔감을 더하겠습니다.”

“아니, 그럴 필요는 없고. 그냥 내 옆에 네가 와 주면 될 것 같은데.”

주안이 수줍게 요청하자 가윤은 싸늘하게 쳐다보았다. 저 인간은, 아니지, 저 도깨비는 또 왜 저러는 거야.

사실 주안의 뜬금없는 애교가 이제는 그리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지만, 이런 상황에마저도 그의 뻔뻔함이 빛을 발한다는 게 조금 놀랍기는 했다. 거의 경이로울 지경이었다.

“뭐, 원하신다면요.”

가윤은 순순히 대답했다. 지금 그는 환자니까, 조금 너그러워지기로 했다. 어차피 지난여름부터 서로 볼 건 다 보고, 할 건 다 한 사이잖아. 이제 와서 새침을 떠는 것도 우스웠다.

가윤은 주안의 바로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주안은 곧바로 팔을 뻗어 그녀의 허리를 안았다.

연인의 엉큼한 동작에 그녀는 한숨짓는 시늉만 하고 그를 마주 안으며 그의 어깨에 뺨을 기댔다. 주안은 가윤이 편히 기댈 수 있도록 자세를 고쳐 잡았다.

“다친 곳은 괜찮으신가요?”

“응, 많이 나아졌어. 네가 열심히 뽀뽀해 준 덕분에.”

“……뽀뽀 아닙니다.”

“뽀뽀 맞았어. 완전 야했다고.”

“그건 그냥 당신의 평소 머릿속이 문제입니다.”

“흐음, 정말?”

“아마도요.”

“아마도, 라니. 별로 확신 있는 단어가 아닌데?”

“그럼 물론이죠, 로 수정하겠습니다.”

“뒤늦게 바꿔 봤자 소용없어.”

모닥불을 피워 놓고 서로의 체온을 느끼며 실없는 농담을 주고받았다. 현실감이 없었다.

오늘 우리는 분명 목숨이 위태로웠고, 우리 때문에 사람이 죽었으며, 아마 여러 군데가 여러 이유로 발칵 뒤집혔을 텐데, 지금 우리는 멀쩡해. 정확히 하자면, 멀쩡한 척하고 있어.

주안은 아직 몸에 독 기운이 남아 살짝 창백했고, 가윤도 곳곳에 생채기가 남았다. 하지만, 그런 보이는 상처보다도 더 깊게 그들을 갉아먹는 불안이 있었다.

계획이 실패했다. 일이 너무 커졌다. 알아서 잘할 사람들이라고 반정 세력에 대해 가볍게 호평하긴 했으나, 사실 가윤도 주안도 그들을 걱정했다. 애정은 없어도 책임감은 있었다.

게다가 가윤은 주안 몰래 조금 다른 우울까지 끌어안았다. 일부분은 온에 관한 비애였고, 대부분은 주안으로 인한 애수였다.

‘정말로 죽이려 했어.’

내가, 태자 전하를. 가윤은 회상했다. 위기의 순간에 냉정한 본능에 따라 진심으로 그를 찔렀었다. 결국 빗맞긴 했지만, 살의는 진짜였다.

‘그자는 나를 황실에 넘기려 했고…….’

서로 완벽한 배신이었다. 마음을 나눈 적 없기에 상처받지는 않았지만, 기분이 묘한 건 사실이었다. 어쩌면 우리는, 한때 부부가 될 운명이었으니.

‘처벌받으려나.’

그녀는 궁금해했다. 나를 잡기 위해 나섰다가 끝내 놓쳤으니, 황제가 가만히 있을까. 안 그래도 황후가 회임한 뒤로 입지가 위태로울 텐데.

휘온이 이번 기회에 아예 실각하거나 죽임을 당한다면 반군에게 훨씬 좋은 일이었다. 가윤은 그들의 뜻대로 되기를 소원했다. 동시에, 마음 한쪽은 서글펐다.

“안 피곤해, 가윤아?”

주안이 가윤을 쓰다듬었다. 가윤은 상념을 그치고 연인을 돌아보았다.

“안 피곤합니다. 만약 불침번 얘기를 꺼내려는 거면, 생각하지도 마십시오. 당신이 먼저 주무세요.”

“으음, 그러기 싫은데.”

가윤의 단호한 권유에 주안은 투정을 부렸으나, 의외로 더는 뻗대지 않았다. 그의 다음 말을 듣고 가윤은 더욱 슬퍼졌다.

“그래도, 네가 생각하지 말라면 생각하지 말아야지.”

짐짓 장난스레 말했지만, 주안의 눈빛은 침울했다.

평소였다면 당연히 가윤을 재우고 자신이 불침번을 서겠다고 고집했을 텐데, 독의 후유증은 아직 짙었다. 속으로 그는 휘온을 욕했다.

“좋은 태도입니다. 생각 같은 건 하지 말고 그냥 푹 쉬세요.”

가윤은 주안을 부드럽게 다독이며 지그시 밀어 반강제로 눕혔다.

얼결에 가윤의 다리를 베고 눕게 된 그는 미안한 마음에 처량한 표정을 지었다. 그를 내려다보며 가윤은 빙그레 웃었다.

“저는 진짜로 팔팔하니까, 걱정하지 말고 어서 주무세요.”

팔팔하기는, 무슨. 팔팔할 리가 있나.

지금이야 이렇게 태평하게 있지만, 그녀도 오늘 목숨이 경각에 달린 상황에서 아슬아슬하게 도망친 신세였다. 지치지 않았을 리 없었다.

주안은 자신을 위해 강인한 눈빛을 띤 여인을 하릴없이 올려다보다가, 진지하게 고백했다.

“사랑해, 가윤.”

가윤의 미소가 짙어졌다.

“저도 사랑합니다, 주안 님.”

주안은 아직도 제 입술에 청자초가 남아 있을까 봐 손으로만 그를 어루만졌다. 그는 곧 기절하듯 곯아떨어졌다.

가윤은 연인의 얼굴을 물끄러미 살폈다. 모닥불의 빛이 그의 숙면을 방해하지 않도록 손으로 눈가를 살포시 덮은 채, 그의 체온을 느끼고 호흡을 셈했다.

“저도 사랑해요, 주안 님.”

그가 잠든 후에도 그녀는 고백했다. 이윽고 입술을 꾹 씹었다.

‘그래서 너무 무서워.’

아까 당신이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너무 무서워졌어.

우리가 계속 사랑한다면, 언젠가 내가 당신보다 먼저 죽겠지.

그때 당신은 어떡하지? 오늘 나의 절망을, 공포를, 아득하고 지독한 고독을, 훗날 당신이 혼자 짊어져야 한다면?

질문은 정답 없이 머릿속에 맴돌았고, 가윤의 고뇌는 막아 줄 이가 없어 한없이 깊어졌다.

사람이 목숨을 잃고 시체로 되살아난 그날, 많은 이들이 각자 다양한 이유로 고통받았다.

오늘 온은 휴가를 냈다. 살 물건이 있어서 잠시 출궁한다던가. 류하는 의심 없이 받아들였다.

애초에 제 휴가를 제가 쓰겠다는 호위대장의 의도를 의심할 이유가 없었다. 그저 그리울 뿐이었다. 고작 하루를 떨어져 지내도 외로웠다.

“처음 보는 팔찌네요, 월빈.”

류하는 그리움에 매몰되지 않으려고 오늘도 바쁘게 친목 활동에 나섰다. 훤아의 처소에서 함께 차를 마시던 수연이 류하의 소매를 가볍게 건드렸다.

“아아, 네. 예전에 선물로 받은 거예요.”

“월국에서 가져온 건가요?”

“네, 맞아요.”

류하는 매끄럽게 거짓말했다. 휘국에서는 수연과 훤아 빼고 류하에게 뭔가를 선물할 만한 사람이 없으니, 진실을 감추기 위해서는 아예 딴소리하는 게 나았다.

류하가 처소에 두고 온 노리개도, 현재 손목에 두른 팔찌도 전부 월국에서 가져와 아까운 마음에 고이 모셔 놨다가 요즘에야 밖에 내보이기 시작한 걸로 그녀는 스스로 각본을 정했다.

‘보고 싶어.’

류하는 시무룩해졌다. 분명 어제도 산책을 핑계로 거의 온종일 붙어 있었는데 이리도 결핍을 느끼다니, 나도 참 중증은 중증이라고 그녀는 심각하게 자책했다.

류하는 필사적으로 쾌활한 척하며 다과에 집중했다. 순간, 섬뜩한 전율이 그녀를 관통했다.

류하는 퍼뜩 굳었다. 뭐지? 묘하게 오싹했다.

갑자기 기분이 급격히 나빠지면서 류하는 고개를 들어 창밖의 먼 하늘을 살폈다.

“월빈, 무슨 일이에요?”

“네? 아아, 오늘 날씨가 유독 좋은 것 같아서요.”

실제로 하늘은 예쁘고 산뜻한 파란색이었다. 류하는 그럴싸하게 둘러대며 최대한 자연스럽게 미소 지었다. 하지만 속은 여전히 이상하게 울렁였다.

‘뭐지? 뭔가 느낌이……. 이상하게 친숙한데…….’

아니야, 이걸 친숙하다고 해야 하나? 누군가를 도망가고 싶게 하는 느낌.

류하는 본능적으로, 지금 이곳에 있는 세 사람 중에 오직 자신만 방금 경악했음을 깨달았다.

‘그때, 휘국으로 오던 길에.’

그때 이와 비슷한 느낌을 받았었지. 음침한 산길에서, 내가 아직 후궁이 아닌 공주이던 날에.

현재의 감각은 훨씬 흐릿했다. 하마터면 그저 착각이 아닐까, 그렇게 철석같이 믿어 버릴 만큼.

하지만 류하는 이게 착각이 아님을 알았다. 본인도 정확히 정의할 수 없는 흐름이라 미처 확신하지 못할 뿐, 그녀의 직감은 끊임없이 불길한 기시감을 속삭였다.

‘그런데 이게 여기서 왜?’

류하의 고민이 깊어졌다. 그녀의 머릿속에 골짜기를 메웠던 시체 떼가 떠올랐다.

아, 어찌 잊을까? 황궁에서 내내 편하게 지내며 예쁘고 우아한 것만 보고 살았기에 머릿속에서 지워진 줄 알았던 기억이었으나, 이제 보니 망각이 아니었다. 외면이었을 뿐.

너무 가깝지도, 너무 멀지도 않은 곳에서 누군가 주술을 썼다. 동족이었다. 류하의 아비와 정체가 같은 반쪽짜리 동족.

단순히 파랗고 포근한 불꽃을 피우는 귀여운 요술 정도가 아닌, 절박한 악의가 가득 담긴 살벌한 술법이었다.

“월빈?”

수연이 깜짝 놀라서 불렀다. 훤아가 벌떡 일어났다.

“세상에, 월빈, 괜찮아요?”

류하는 입을 틀어막고 헛구역질을 했다. 화기애애한 다과회와 어울리지 않는 행동이었다.

류하는 미안함과 민망함을 동시에 느끼고 멈추려 했다. 그러나 그런 평범한 감정보다는 지금 그녀의 폐부를 후비는 혐오감이 훨씬 강했다.

“우욱…….”

어떤 미친 도깨비가 황성 안에서 시체를 되살렸다.

행위 자체에 대한 반감이 사술에 대한 본능적인 거부 반응과 맞물려 류하를 괴롭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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