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가윤은 주안의 손목을 쥐고 그의 손바닥을 입술로 눌렀다.
엉망이 된 살을 입에 머금고 급하게 빨자 다소 텁텁한 단맛이 혀끝에 감겼다. 인간에게는 무해한 청자초의 맛이었다.
가윤은 빨아먹은 독을 대부분 삼키고 나머지는 침을 모아 땅에 뱉었다. 그럴수록 달착지근한 맛이 가시고 시큼한 체취만 진해졌다.
주안의 손에서 청자초 향이 줄어들자 가윤은 이제 아래로 내려갔다. 그녀는 주안의 허벅지에 끈적하게 달라붙은 옷가지를 뜯어내고 살에 다시 입술을 붙였다.
아까 그의 손이 그러했듯 그의 다리도 몹시 뜨거웠다. 그 온기가 그나마 그녀가 무너지지 않도록 붙들었다.
인간이든 도깨비든, 죽음이 가까울수록 차가운 건 마찬가지였으니.
“가윤.”
문득, 가냘픈 소리가 들렸다. 가윤은 심장이 내려앉는 듯한 기쁨 중에서도 미처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녀는 계속해서 독을 빨아내느라 바빴다.
“가윤아.”
탁한 저음에 힘이 조금은 돌아왔다. 가윤은 그제야 간곡한 시선을 들었다.
주안은 해쓱한 낯으로, 그러나 도렷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심각하게 속삭였다.
“아직 밤도 아닌데, 그렇게 유혹하면 곤란해.”
“뭐라고요?”
가윤은 너무 황당해서 제가 지금 응급 처치 중이라는 것도 잊었다. 그녀의 뜨악한 시선을 뻔뻔하게 받아 내며 주안은 속닥속닥 타일렀다.
“네가 그렇게 곳곳에 정성스럽게 뽀뽀해 주지 않아도 나는 평소에 이미 참는 게 너무 힘들어. 조금만 자제해 줄래? 난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점잖지가 않거든.”
“이 인간이, 진짜……!”
가윤이 으르렁댔다. 아, 나는 뭐 하러 이런 새끼 때문에 겁먹었을까. 그를 잃을까 봐 아찔하게 두려웠던 순간이 허탈할 정도였다.
“나 인간 아닌데.”
주안은 자그맣게 웃었다. 가윤은 눈을 부라리며 그의 팔을 퍽, 때렸다. 그러자 주안은 오만상을 찌푸리며 아파했다.
“아야야, 하지 마, 나 환자라고.”
“환자치고는 기력이 넘치십니다. 아주 주둥이에 활기가 가득하세요.”
“주둥이라니, 너무하네. 기왕이면 예쁜 말 좀 써 줘.”
“제게 예쁜 말까지 기대하진 마십시오. 이미 당신 목숨 하나 살려 놓은 것만으로도 힘에 부칩니다.”
“그래, 고마워. 힘에 부칠 정도로 날 살리느라 애써 줘서.”
주안은 찡그리면서도 가윤을 향해 웃었다. 본인의 말마따나 환자면서, 아직도 창백한 얼굴에는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힌 주제에.
“무서웠어?”
그는 슬프게 웃으며 조심스레 속삭였다. 그가 손을 뻗어 가윤의 뺨을 부드럽게 감쌌다. 피가 묻어 지저분한 오른손이 아니라, 그나마 청결한 왼손으로.
“미안해. 겁먹게 둬서.”
주안의 손에 담긴 가윤의 볼은 핏기 없이 창백했다. 눈빛도 낭떠러지를 앞둔 아이처럼 처량했다.
아까 그녀는 그를 치며 화를 냈지만, 그는 그녀의 분노를 믿지 않았고, 그녀를 원망하지도 않았다. 그 꺼칠한 태도 뒤에 숨겨진 여린 공포를 알았기에.
“걱정시킨 것도 미안하고.”
그가 순하게 덧붙였다. 가윤은 울컥하여 이를 악물었다. 그녀는 다시 그를 칠 듯 움찔하더니, 팔을 뻗어 그를 와락 안았다.
“아야야, 가윤아, 나 이것도 아파.”
“제발, 좀……. 조용히 좀 계십시오.”
“가윤아, 울어?”
“시끄럽습니다.”
“생명의 은인한테 못 하는 말이 없네.”
주안은 입으로는 엄숙히 나무라며 손으로는 가윤을 더 가까이 당겼다. 체열이 겹치며 떨림이 전해졌다. 주안은 가윤의 등을 다정하게 토닥였다.
“그래요, 생명의 은인이죠. 이미 저는 당신께 목숨을 빚졌습니다. 그러니까, 오늘은 쓸데없이 무리하셨습니다.”
가윤은 살벌하게 나무랐다. 그 살벌함도 기실 연약함의 일종이었다.
주안은 마주 성내는 대신 가윤의 머리에 뺨을 묻었다. 맞닿은 상체를 통해 느껴지는 심장 박동이 좋았다.
“중독된 와중에 이렇게 멀리 이동하면 어떡해요? 그리고 시체는 왜 굳이 되살린 겁니까? 힘을 써야 할 때가 있고, 아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아까는 확실히 후자였어요.”
“차례대로 답하자면, 사실 이유는 똑같아. 멀리 이동한 건 안전하게 도망치기 위해서고. 시체도 그 사람들 발목 묶어 두기 위한 거고. 뻔하지, 뭐.”
주안은 가볍게 해명하며 가윤을 연신 다독였다. 가윤은 흐느낌이 거세지기 전에 입술을 깨물었다.
그가 독에 당한 상태에서도 신통력을 써 가며 무리한 이유가 바로 자신의 안전을 위함이었음을 알고, 가윤은 더는 화낼 수 없었다. 애초에 같은 이유로 화내기는 했지만.
“그래도 목숨은 붙어 있어서 다행입니다. 차마 무사하셔서 다행이라고 말은 못 하겠네요.”
가윤은 짐짓 퉁명하게 말을 돌렸다. 주안은 쌩긋 웃었다.
“너, 정말 많이 걱정했구나.”
주안은 가윤의 어깨를 살짝 밀고 가윤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그녀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가 그녀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마음 같아서는 입에 진하게 뽀뽀해 주고 싶은데, 네 입술에 독이 묻어 있어서 안 되겠네. 이해해 줘.”
“참나, 기대한 적도 없습니다.”
“정말로? 정말 기대한 적 없어?”
가윤이 실소를 내뱉자 주안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순진한 척했다. 가윤은 다시 기가 막혀 헛웃음을 흘렸다.
“주안 님, 방금 죽다 살아난 주제에 머릿속에 고작 그런 생각뿐이 없습니까? 지금 뽀뽀 얘기가 나와요?”
“고작이라니, 뽀뽀의 욕구가 얼마나 성스럽고 중요한데. 사실은 뽀뽀보다 더한 것도 하고 싶, 윽!”
“헛소리 작작 하고 몸이나 추스르세요. 불을 지피겠습니다.”
가윤은 주안을 무자비하게 밀어냈고, 주안은 다시 환자로 돌아와 낑낑거렸다.
가윤은 빨개진 얼굴을 숨기기 위해 서둘러 일어나 그를 등졌다. 주안에겐 화내놓고 정작 심장이 벌렁대는 자기 자신이 한심했다.
“으윽, 가윤아, 불은 그냥 내가 지펴도 되는데…….”
“제가 헛소리 작작 하라고 방금 말씀드리지 않았나요? 그냥 가만히 쉬면서 계세요. 신통력은 당분간 쓸 생각도 하지 마시고요.”
가윤은 날카롭게 경고했고, 주안은 여전히 독 때문에 어지러워 반박할 힘이 없는지라 결국에는 조용해졌다.
가윤은 주변을 뒤져 땔감을 골랐다. 그녀는 나뭇가지를 이용해 능숙하게 모닥불을 지폈다.
“너는 어디 다친 데 없어?”
주안이 나직하게 물었다. 가윤이 끄덕였다.
“네, 저는 괜찮습니다.”
그녀는 주홍빛 불꽃에 나무를 더했다. 북쪽의 써늘한 가을바람에 맞서 모닥불은 힘차게 차올랐다.
가윤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살폈다. 아까는 한낮이었는데, 슬슬 어두워지고 있었다.
“……저는 제가 대장군을 속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보네요.”
가윤이 불쑥 말했다. 주안은 침묵하며 그녀를 지켜보았다.
“우리 둘 다 휘결 나리께 돌아가진 못하겠죠?”
죽었다고 알려졌던 역적의 딸도, 기이한 힘을 부리는 도깨비도 오늘 대장군과 군졸들 앞에서 너무 화려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자신들이 반군에게 이어지는 꼬리가 되지 않도록, 이제부터 모습을 감추는 게 마땅했다.
“우리 없이도 잘할 사람들이잖아. 오히려 오늘 일을 어떻게든 써먹을걸.”
주안은 신중하게 판단했고, 가윤은 동의의 뜻으로 묵언했다. 주안은 그녀를 조심히 직시했다.
“이제 너는 어떻게 하고 싶어? 가윤아.”
이번에도 그는 그녀의 뜻을 물었다. 그는 여태 단 한 번도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만 한 적이 없었다.
그는 늘 그녀의 의중을 물으며 기다리고 헤아리며 결정권을 맡겼다. 복수에 대해서도, 연정에 대해서도, 또는 다른 그 무엇이든 간에.
때로 가윤은 주안이 그저 이기적인 폭군이라 제게 강압적으로 굴며 저를 멋대로 휘두르려 하는 못돼먹은 놈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곤 했다.
그랬더라면 차라리 미워하고 멀리하며, 진즉에 어떻게든 벗어났을 텐데.
절대 사랑에 빠지지 않았을 텐데.
오늘처럼 당신을 잃을까 두려워 세상이 무너진 듯 겁먹을 일도 없었겠지.
내 의사를 진지하게 존중하는 당신으로 인해 책임감이 곱절로 불어나 숨이 막힐 만큼 버거운 일도 없었을 거야.
“당분간 조용히 지내야지요. 그러다 전면전이 일어나면, 그때 휘결 나리께로 돌아가겠습니다. 그때는 꼬리가 있든 없든 별 의미가 없을 테니까요.”
만약 오늘 그 난리를 쳐 놓고 지금 당장 휘결에게 돌아간다면, 휘결 본인이 가윤과 주안을 제거하려 할 확률이 높았다.
두 사람을 받아 줬다가 들키기라도 하면 대놓고 우리 반역을 꾸미고 있어요, 라고 홍보하는 것과 다름없으니까.
휘결의 냉정함에 가윤은 상처 입지 않았다. 애초에 서로 상처 줄 정도로 각별한 사이는 아니었다.
각자의 꿈이 우연히 일치해서 상부상조를 선택했을 뿐, 가윤은 그에게 기본적인 전우애 이상의 의리를 기대해 본 적 없었다.
5년 전 가족을 잃은 뒤로, 가윤에게서 계산 이상의 애정을 받아 낸 존재는 주안이 유일했다.
가윤의 진중한 대답을 듣고 주안은 쓴웃음을 삼켰다.
지금은 몸을 숨기다가도 나중에 전면전이 일어나면 돌아가겠다고 다짐하는 가윤의 말을 듣고, 그녀의 변함없는 우선순위를 확인해 버려서.
“내친김에 그냥 우리 둘만 도망치자고 내가 졸라도, 너는 안 들어주겠지?”
그가 부드럽게 한탄했다. 거의 혼잣말처럼, 모닥불 소리에 묻혀 가윤이 안 들리는 척해도 전혀 하자가 없을 만큼.
가윤은 오랫동안 잠잠했다. 그러다 집요하게 속삭였다.
“저는 반드시 원수를 갚아야 합니다.”
원수를 갚고 싶다, 도 아니고 갚아야 한다, 고 말했다. 소원이 아니라 사명인 것처럼. 스스로 선택했다기보다는, 억지로 떠밀린 것처럼.
주안은 가윤을 안타깝게 바라보았다. 여전히 5년 전의 비극에 묶여 죄책감 속에 살아가는 가여운 사람이 보였다.
그녀는 복수와 반역을 논하며 미래를 계획하는 듯했지만, 실은 과거로부터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한 부자유한 존재였다.
본인도 인간들의 황실에 원한을 간직한 주안은 가윤의 아집을 비웃지 않았다.
지나간 일이라고, 어차피 엎질러진 물 아니냐고 무책임하게 말하며 망각을 종용하고 싶지 않았다.
이미 다 끝난 일이라니, 슬슬 잊을 때가 됐다니, 이제 너는 지겹지도 않으냐니, 그게 대체 다 무슨 망언이란 말인가.
가족이 죽고 삶이 무너졌는데 어찌 그런 간편한 마음으로 훌훌 털어 버릴 수 있을까.
이제 좀 잊으라고 그토록 가볍게 말하는 작자들이 막상 본인들이 똑같은 일을 겪고도 똑같이 나불댈 수 있을지 궁금했다.
가윤은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그리고 주안은 항상 그래 왔듯, 그녀의 뜻을 존중했다.
“그리고 나는 너를 끝까지 도울 거야.”
주안은 엄숙하게 약속했다. 가윤은 그를 아프게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