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펑! 하고 불꽃이 터지며 군졸들을 새파랗게 덮쳤다. 몇몇은 단숨에 먹혔고, 몇몇은 제때 도망쳤다.
뿜어진 빛과 열기가 너무 강렬해서 똑바로 바라봤다면 안구까지 그을릴 정도였다. 가윤과 온은 도깨비의 말대로 얼굴을 가려 눈이 머는 걸 피했다.
“젠장……!”
주안은 비속어를 짓씹었다. 정확히 겨냥해서 전부 태워 버리려고 했는데, 온의 맹공이 집중력을 흐트러트리는 바람에 여전히 상당수의 적군이 남았다.
“가윤아, 뛰어!”
주안은 가윤의 손을 다급히 잡았다. 방금 불꽃에 신통력을 쏟아부은 바람에 지금은 원시적인 방법으로 도망쳐야 했다.
온은 불꽃의 잔열이 버거워 아직 눈을 감은 채 주춤하고 있었고, 불꽃이 빗맞은 군졸들도 현재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 틈을 타서 주안과 가윤은 냅다 뛰었다.
“정신 차려, 화상을 입지 않은 자들은 역적을 쫓는다!”
온이 버럭 외쳤다. 도깨비불이 지나간 자리에 나무와 인육이 타는 매캐한 냄새가 났다. 후자는 특히 역했고, 비참했다.
온은 이를 악물었다. 그는 숯처럼 변해 목숨이 끊어진 군졸들을 애도할 틈도 없이 본인이 가장 먼저 창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가윤과 주안은 필사적으로 뛰었다. 흥분과 긴장 때문에 그리 오래 달리지도 않았음에도 벌써 목에서 단내가 났다.
“가윤아, 지금.”
주안이 긴박하게 속삭였다. 가윤은 뜀박질을 멈추고 주안을 향해 돌아섰다.
주안은 조급하게 가윤을 끌어당겼다. 군졸들을 일단 따돌렸으니, 이제는 신통력을 써서 사라질 차례였다.
하지만, 이번에도 그들의 적은 순식간에 그들을 따라잡았다.
“주안 님, 뒤에!”
가윤이 경고를 끝내기도 전, 주안은 빙글 뒤돌며 단검을 쥐었다. 성가신 인간 같으니. 주안의 어금니가 뾰족하게 갈렸다.
“너는 좀 그만, 윽!”
주안의 코앞까지 접근한 온은 깜찍한 수를 썼다. 한쪽 무릎을 빠르게 굽히며 지면을 쓸더니, 한 움큼 그러모은 흙과 자갈을 주안의 안면에 던진 것이다.
오롯이 신체적인 힘만 따진다면 인간이 도깨비와 맞서봤자 승산이 별로 없었다.
온은 비겁해지기로 했다. 장수의 명예나 정정당당한 승부 따위를 고려할 때가 아니었다.
“하, 퉤! 미치겠네.”
입 안에 들이닥친 흙먼지를 한 모금 뱉어 내고도 주안은 제대로 시야를 확보하지 못해 눈살을 찌푸렸다.
그 와중에도 손은 본능적으로 움직여 그의 명치를 노린 온의 공격을 막아 냈다.
“주안 님!”
가윤은 겁에 질렸다. 그녀는 아까 탈취한 장검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그녀가 알기로 제국의 모든 검사 중에 휘온의 실력을 따라갈 자는 아마 휘륜을 빼고 없으며, 아무리 주안이라도 시력이 흐려진 틈이라면 온을 상대로 위험에 처할 수 있었다.
가윤은 연인을 돕기 위해 달려갔다. 그러나 먼저 처리해야 할 방해물이 있었다. 아까 도깨비불을 피해 간 군졸들이 가윤과 주안을 에워쌌다.
“제발, 좀…….”
가윤은 대상이 불명확한 애원을 뱉으며 검을 고쳐 잡았다. 그녀의 눈이 결연하게 빛났다. 군졸들이 달려들었다. 가윤은 침착하게 맞대응했다.
‘안 돼, 가윤……!’
주안은 조급한 마음에 이를 악물었다. 가윤의 검술이 빼어나다는 사실은 예전부터 익히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냥 믿고 맡기기엔 그녀를 향한 그의 애정이 너무 컸다.
‘어서 가서 도와야 하는데……. 젠장, 이놈이, 진짜!’
온을 노려보는 주안의 눈빛에 처음으로 삿된 살의가 담겼다.
이전까지만 해도 주안에게 온은 그저 공적으로 처리해야 할 적일 뿐, 개인적인 원한으로 얽힌 적이 없었다.
이제 온은 가윤을 진심으로 공격하고 지금은 주안이 가윤을 도우러 가는 걸 막는 철천지원수가 되었다.
주안의 공격에 진심이 담기면서 이전보다도 훨씬 매서워졌다.
“그냥 죽어, 제발.”
주안의 당부는 상냥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모래가 눈에 들어가 다소 부정확한 와중에도 그의 공격은 결코 상냥하지 않았다.
온은 검이 아닌 검집으로 막았다. 한 손에는 검을, 한 손에는 검집을 들고 마치 쌍검처럼 다루며 그는 막상 검을 써야 할 때를 최대한 미뤘다.
‘곧 깨진다.’
온은 정확하게 추론했다. 이미 그의 검집에는 거미줄처럼 금이 가 있었다. 주안의 공격을 족족 막아 내느라 그 충격을 고스란히 받아 낸 결과였다.
‘지금……!’
우득! 드디어 균열이 벌어졌다. 검집이 뚝, 하고 반으로 쪼개졌다.
갈라진 틈으로 주안이 매섭게 파고들자 온은 오히려 가까이 다가가며 양손을 서로 다른 방향으로 차갑게 휘둘렀다.
“악!”
주안은 비명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온이 고개를 젖혀 그의 공격을 피하는 동시에 검집의 깨진 끝을 그의 허벅지에 쑤셔 박은 탓이었다.
“으윽…….”
아찔한 통증 속에 주안의 몸이 꺾였다. 검날이 날아왔다. 주안은 맨손으로 검을 낚아챘다. 금속이 살을 찌르는 동시에 찰흙처럼 구겨졌다.
악력으로 금속을 으깨며 주안은 탄식했다.
“너, 여기 뭘 바른…….”
손이 불에 타는 듯했다. 토할 것처럼 괴로웠다. 온몸의 혈관이 고통을 호소하며 비명을 지르는 느낌이었다.
인간에게는 평범한 잡초지만 도깨비에겐 스치는 것만으로도 독으로 작용하는 특정한 풀이 있다. 실제로 대전쟁 시대에 이종족을 상대하는 무기로 흔히 쓰였다고 한다.
륜이 특별히 허락한 덕분에 온은 황실 서고에 입장해 과거의 전술 기록을 찾아볼 수 있었다.
도깨비, 불여우, 달귀신, 수룡 등등 종족별로 약점이 상세히 기술된 보물과 같은 기록이었다.
물론, 다른 살아 있는 존재를 어떻게 하면 가장 확실하고 깔끔하게 죽일 수 있는지 친절히 설명하는 기록이라는 점에서 보물이라는 예쁜 표현은 다소 해괴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해괴하든 뭐든, 온에게는 몹시 유용한 정보였다.
가윤을 사로잡기로 결정한 순간부터 가윤과 함께 다니던 그 도깨비는 요주의 표적이 되었다.
생포할 자신이 없다면, 죽여야 했다.
청자초라는 식물을 으깨 칼날에 정성스레 덧바른 온은 빠른 효과를 보고 냉정하게 감탄했다.
도깨비의 동작이 눈에 띄게 더뎌진 게 보였다. 그는 살생을 위해 움직였다.
“안 돼!”
그때, 가윤이 나타났다.
가윤도 휘국의 귀족답게 어릴 적부터 검술을 익혔다. 소질이 뛰어나다는 칭찬도 많이 들어 봤다.
열여섯 살에 가족을 잃고 각지에서 험한 삶을 견디면서 그녀의 실력도 더욱 단단해지고 날카로워졌다.
저를 공격한 군졸들을 어렵지 않게 쓰러트린 가윤은 온의 검을 움켜쥔 채 바닥에 반쯤 꿇어앉은 주안의 앞을 가로막으며, 칼을 들었다.
“윽.”
쇠끼리 맞부딪치자 온은 반사적으로 찌푸렸다. 장검은 주안의 손에 잡힌 터라 비상용 단검을 꺼내 들었던 그는 가윤에 의해 일격이 가로막혔다.
온의 무기를 쳐낸 가윤은 이제 발을 들어 온의 무릎 관절을 살벌하게 걷어찼다.
근육과 근육 사이의 여린 부분을 무참하게 가격당한 온은 별수 없이 몸이 휘청댔다.
“으으…….”
“주안 님, 어서요, 어서 가요!”
온이 중심을 잃은 틈에 가윤은 주안의 허벅지에서 검집 조각을 빼내고 그를 붙안으며 애타게 절규했다. 주안은 청자초의 독소로 인한 극통 가운데 목소리를 쥐어짰다.
“가윤아, 너만 가, 너라도 먼저 가…….”
당연히 가윤은 연인의 말을 들어줄 의향이 눈곱만큼도 없었다.
온은 그사이 평정을 회복하고 인간과 도깨비를 동시에 붙잡고자 성큼 다가갔다.
“아……!”
순간, 목덜미에 소름이 쭈뼛 돋으며 온은 잽싸게 검을 휘둘렀다. 청명한 하늘에서 쏟아진 화살 떼가 온의 검에 쓸려 땅으로 우수수 떨어졌다.
“주안 님, 원군이에요, 어서 가요!”
가윤은 안타깝게 재촉했다. 가윤과 주안을 빼내기 위해 휘결이 또 다른 지원군을 보냈다.
주안은 힘겹게 찡그렸다. 독성에 억눌린 신통력이 아슬아슬하게 바닥을 드러냈다.
정말 목숨을 걸고 힘을 짜낸다면, 그렇게 한다면 이동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주안은 욱신대는 팔로 가윤을 껴안았다. 내가 여기서 이동을 마치고 죽는 한이 있어도, 가윤 너는 무사히 옮겨 줄 거야.
“잘 있어, 인간.”
주안은 온을 똑바로 올려다보며 중얼댔다. 여름에 대장군과 월빈을 우연히 만나 그의 목숨을 구해 준 것을 후회했다.
사지에 힘만 남았다면 당장이라도 저 인간에게 지금 자신이 겪고 있는 고통을 그대로 갚아 주고 싶었으나, 지금은 힘도 시간도 없었다.
원군이 도착하긴 했지만, 온과 다른 군졸들이 아직 훨씬 가까웠다. 연인을 위해서, 후퇴할 때였다.
주안의 눈이 다시 선명하게 파래졌다. 온은 그가 신통력을 쓰려는 걸 알고 다급히 손을 뻗었지만, 참담한 절규를 듣고 멈칫했다.
“으아악!”
무심코 돌아선 온은 끔찍한 광경을 보고 숨을 삼켰다. 끔찍했고, 익숙했다. 살면서 딱 한 번, 월국에서 휘국으로 오는 길에 이와 같은 장면을 본 적 있었다.
방금 가윤에게 당해 땅에 널브러졌던 군졸들의 시체가 삐걱삐걱 일어서더니, 한때 저들의 동료였던 이들에게 기괴한 인형처럼 달려들었다.
온은 삼켰던 숨을 다시 탄식으로 뱉었다. 그사이, 주안은 가윤을 안고 빛 속으로 사라졌다.
시공간을 찢고 질주하는 느낌에 가윤은 눈을 질끈 감았다. 여러 번 해 봤기에 익숙하지만, 동시에 아무리 겪어도 편해지지 않는 생경한 느낌.
물론, 그녀가 실제로 질주하는 건 아니었다.
신통력을 써서 이동할 때마다 그녀가 하는 유일한 일은, 주안이 이 세상에서 실체를 지닌 유일한 존재인 듯 그를 절박하게 끌어안는 것.
털썩, 하는 충격과 함께 가윤과 주안은 이동을 마쳤다. 수도 외곽의 야산이었다. 숲속의 서늘한 공기가 가윤의 달아오른 얼굴을 훑었다.
“주안 님? 주안 님!”
가윤은 주안의 어깨를 쥐고 부드럽게 흔들었다. 땅에 닿자마자 가윤을 내려놓고 풀썩 쓰러진 주안은 매우 흐리게 신음했다. 가윤의 공포가 깊어졌다.
“주안 님, 제발…….”
묘하게 새콤한 냄새가 났다. 가윤은 창백해졌다. 담백한 듯하면서 은근히 역한 그 악취는 도깨비의 피 냄새였다. 인간과 도깨비는 혈액조차 서로 달랐다.
“주안 님, 제발 정신 차리세요.”
가윤은 간절히 속삭였다. 그러나 고작 속삭임 몇 마디로는 사지를 짓누르고 정신을 희뿌옇게 흐리는 독성을 당해 낼 수 없었다.
가윤은 주안의 무거운 몸을 뒤집어 환부를 찾아냈다. 온의 검을 막느라 으깨진 오른손, 그리고 엉망이 된 허벅지가 보였다.
“실례하겠습니다.”
그녀는 다급히 중얼댔다. 양해를 구하는 언어는 어차피 형식적이었고, 주안도 그녀에게 승낙을 내리거나 거부의 의사를 밝힐 상황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