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지금 그리움의 대상은 바로 문밖에 있으니 원한다면 언제든지 고개를 내밀어 바라볼 수 있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핑계가 필요했다.
그리고 류하는 방금 산책하러 다녀온 데다가 옷도 이미 갈아입은 뒤라, 호위 무사에게 말을 걸 적절한 계기가 없었다.
핑곗거리가 없으면 만날 수도 없는 사이. 한낱 나뭇잎 쪼가리를 애틋하게 간직하며 꿈속에서만 입 맞춰야만 하는 관계.
이게 대체 뭔지, 꼭 이래야만 하는지, 구차하게 그리워하지 말고 그냥 깔끔하게 도려낼 수는 없는지, 류하는 가끔 자기 자신이 답답했다.
그게 말처럼 쉬웠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인간의 감정과 관계가 전부 계산적인 이성의 산물이었다면, 이런 암울한 연정에 휩쓸릴 필요 없이 나도 좀 더 현명한 삶을 살았을 텐데.
형의 아내로 팔려 와 동생을 사모하는 멍청한 여인. 게다가, 하필 요즘 그 동생 쪽이 너무 불안했다.
‘왜, 그런 식으로 말했어.’
첫눈이 아름답기를 빌어 주다니.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대해 덕담을 앞당겨 건네는 것이 마치 그때 가서 자신은 덕담 따위 할 상황이 안 되리라고 암시하는 듯했다.
‘그냥 그때도 옆에 있어 주면 되잖아.’
아름다울 필요 없어. 눈을 한 번도 본 적 없는지라 많이 궁금하고 기대되긴 하지만, 고작 하늘에서 내려오는 수분 따위 생각보다 조금 안 예쁘다 해도 나는 크게 실망하지 않을 거야.
하지만, 만약에 그때 그대가 내 곁에 없다면. 그렇다면 그냥 실망으로 끝나지 않겠지. 절망이 나를 무너트릴 거야.
나도 고작 사내 하나 곁에 없다고 낙담하고 방황하는 나약한 여인이 되고 싶지 않았어.
사랑은 사람을 강인하게 만들면서도 누구보다 연약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나는 너무 늦게 알아 버렸어.
‘으으, 월류하, 쓸데없는 생각은 그만하자.’
류하는 내적으로 고개를 휘휘 저었다. 그녀가 시집을 조심히 덮어 다시 책장에 꽂았다. 그녀는 심호흡으로 마음을 다잡은 뒤, 새로운 소일거리를 찾아 장롱을 뒤적였다.
‘내가 무슨, 점쟁이도 아니고.’
그저 기우다. 기우일 뿐이야. 황궁에 너무 오랫동안 갇혀서 금단의 사랑을 이어 가다 보니 내가 미쳐 버린 게지. 뭐만 해도 불안하고, 어딜 가든 갑갑하니까.
‘앞날을 걱정하면 안 돼. 하루하루 잘 넘기는 거나 신경 쓰고, 그러다 보면…….’
그러다 보면, 뭐?
그렇게 넘기고 견디고 무뎌지다 보면, 대체 남는 게 뭔데?
고작 나이 스물에 온 삶이 멈춰 버린 것 같았다. 더는 나아갈 길도, 나아질 것도 없었다.
도깨비 혈통의 황손이 태어날까 봐 황제는 그녀와 동침하지 않았고, 그러니 그녀는 앞으로도 평생 엄마가 될 수 없을 것이다.
아이를 낳아 기르고 나중에 그 아이가 자라 본인의 아이를 가지는 과정을 흐뭇하게 지켜보는 삶 따위 없을 것이다.
뭐, 자기가 절대 황제의 아이를 갖고 싶었던 건 아니지만.
나는 혼자 늙겠지. 발전의 가능성이 없었다. 새 친구를 사귄다고? 새 사람을 만날 기회가 없었다.
후궁인 그녀는 앞으로도 쭉 황궁에 살 테고, 똑같은 내명부의 여인들을 매일 계속 만날 것이다. 황제가 새 후궁을 들이지 않는 이상, 새 인연이 생길 일은 없었다.
나랏일을 공부해서 관직에 진출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황손을 낳아 비로 승격돼서 더 높은 자리로 올라갈 것도 아니며, 자유롭게 여행을 떠나지도 못하는데.
대체 무슨 재미로, 무슨 의미로. 나는 남은 평생을 살아가야 하지?
‘차라리.’
때때로 류하는 상상했다. 차라리 미친 척하고 온에게 달려가 자신의 간절한 소망을 털어놓는 모습을.
‘차라리, 그냥 같이 떠나고 싶어.’
흔히 말하는 야반도주. 사랑의 도피라고나 할까. 당신과 나, 내 삶에 그거면 돼. 둘이 함께한다면, 어디서 무얼 해도 괜찮아.
‘그냥 다 버려두고 도망치고 싶어…….’
제발, 아무나 나를 여기서 꺼내 줘.
다소곳이 앉아 자수에 집중하려 했던 류하는 무의식중에 천을 수중에서 구겨 버렸다.
황후의 회임 때문에 이미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연인의 손을 붙잡고 황궁을 탈출하고 싶었다. 상상만으로도 해방감이 벅차올라 눈시울이 뜨거울 지경이었다.
그러나 류하는 곧 현실을 직시했고, 자신이 사라진다면 온갖 고초를 당할 아랫사람들과 온의 어머니, 온의 부하들, 그리고 불똥을 뒤집어쓸 고국 사람들을 생각하며 이를 악물었다.
‘도망칠걸.’
류하는 반쯤 완성된 손수건에 바늘을 푹, 박았다. 피처럼 붉은 실이 꽃무늬를 완성했다.
‘여기 오기 전에 도망칠걸.’
완벽한 기회를 노리겠답시고 계속 시간을 끌다가 결국 여기까지 와 후궁이 돼 버린 과거의 멍청한 나를 원망해.
타국의 황족과 사랑에 빠지는 바람에 끝내 돌아서지 못했던 과거의 내가 한심해.
사실 그건 과거가 아니고, 현재 진행형이야.
류하는 묵묵히 자수를 이어 갔다.
약속된 이레가 지났다. 가윤은 온을 만나러 떠났다.
반군의 계획은 이러했다. 정보는 이미 흘려 놨고, 그런즉 황후와 황제는 온이 오늘 가윤을 만난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아마 둘이 만나는 현장을 덮치기 위해 대장군에게 미행을 붙이겠지.
온이 역적의 딸과 접촉한 죄로 즉석에서 체포되는 그때, 반군 측은 가윤을 빼돌려 무사히 도망치면 끝.
일단은 그게 계획의 골자였다. 어디 하나라도 조금만 틀어지면 금방 와르르 무너질지도 모르는, 그런 계획.
어차피 반정이라는 게 처음부터 엄청난 위험 부담을 안고 시작하는 일인지라 다들 이미 각오는 마친 뒤였다. 애초에 가늘고 길게 사는 게 목표였다면, 이런 일에 가담하지도 않았겠지.
가윤은 이레 전에 온과 재회했던 곳에서 석상처럼 고요하게 기다렸다.
억겁처럼 느껴진 기다림 끝에 문이 삐걱, 하고 열렸다. 가윤은 품속에 감춰 둔 단검을 생각하며 휙 뒤돌았다. 온이 들어왔다.
“대장군님.”
가윤은 안도하며 속삭였다. 안도는 연기가 아니었다.
무장한 군졸들이 우르르 들이닥치는 최악의 상황은 아니었으니, 터질 듯 팽창했던 마음이 조금은 평정을 되찾았다.
“가윤 낭자. 그동안 무사해서 다행입니다.”
온은 부드럽게 인사하며 문을 닫았다. 그의 눈빛은 지극히 조심스러웠다. 적당량의 경계심과 기본적인 다정함, 그리고 첨예한 불안감이 억눌린 채 공존하는 눈빛.
“감사합니다. 물건은…….”
가윤은 자연스럽게 말꼬리를 흐렸다. 그녀가 한 발짝 가까워졌다. 온도 거리를 좁혔다.
“여기 있습니다.”
온이 품속에서 길쭉한 꾸러미를 꺼냈다. 천으로 둘둘 감아 형체를 정확히 파악하기는 어려웠다.
돈으로 바꿀 만한 것을 가져오겠다고 했는데, 저건 뭐지? 금괴? 가윤은 머리를 굴렸다.
“가윤 낭자.”
온은 물체를 손에 쥔 채 나직하게 불렀다. 가윤은 그와 눈을 맞췄다. 그의 눈에 담긴 진심은, 고통이었다.
“용서를 빌지는 않겠습니다.”
참으로 모순적인 사내. 정말로 위선적인 사람. 가윤은 속으로 그를 욕했다.
예나 지금이나 모두를 지키고 싶어서 모두를 위해 아파하다가 결국 누군가를 잃고 마는, 그런 바보 같은 태자.
어차피 배신할 거라면, 사과 따위 하지 말지.
적어도 제게 용서를 빌 염치가 없다는 걸 알고 있다는 점에서는 그나마 봐줄 만했다.
쾅!
“저자를 잡아라!”
문은 아까보다 시끄럽게 열렸다. 황제의 군졸들이 들이닥쳤다.
여기서 저들이 온에게 달려든다면 반군의 성공일 텐데, 지금 그들은 명백하게 가윤을 노리고 있었다.
가윤은 즉시 단검을 꺼냈고, 온은 그녀에게 손을 뻗었다. 이 모든 게 단 한 박자의 호흡만큼 짤막한 순간에 일어났다.
그 긴박한 현장에 순식간에 이질적인 존재가 나타났다.
“가윤!”
도깨비였다. 군졸들이 계획대로 나타나 온을 체포하고 나면 미끼 역할을 마친 가윤을 무사히 빼내기 위해 휘결이 보낸 핵심 인력.
가윤을 움켜쥔 온은 고개를 휙 들었고, 가윤은 주안의 부름에 따라 온을 뿌리쳤다.
도깨비의 요란한 등장에 잠시 정신이 팔렸던 온은 날카로운 통증을 느끼며 껑충 물러섰다.
“윽……!”
가윤은 온의 집중력이 흐트러진 틈을 타 그의 뺨을 긁은 뒤, 단검 끝에서 핏방울을 흩뿌리며 냉큼 주안의 손을 잡았다.
원래는 온의 눈을 찌를 생각이었으나, 전쟁터에서 몇 년간 구른 명장의 민첩함은 대단했다.
온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틀어 치명상을 피했고, 대신 눈시울에 실선 같은 상처를 얻었다.
“둘 다 생포해!”
온이 다급하게 외쳤다. 현장에서 대장군의 지시를 따르라는 황명을 받은 군졸들은 즉각 움직였다.
온 본인도 한 손으로는 눈가의 피를 쓸어 닦으며 한 손으로는 장검 손잡이를 낚아챘다.
주안은 가윤을 끌어안은 채 신통력을 발휘하려 했다. 예전에 한 번 온 앞에서 사라졌듯 이번에도 눈부신 파란빛 속으로 사라질 계획이었다.
이번에는 온이 조금 더 빨랐다. 가윤을 공략하다 보면 도깨비와 한 번쯤은 꼭 재회할 거라고 충분히 예상한 바였다. 예상한 만큼, 이미 준비는 마쳤다.
온은 주안을 직접 공략하는 대신 주안의 약점을 노렸다.
여태 주안과 마주친 모든 짧은 순간들을 통틀어 봤을 때, 온이 파악한 주안의 약점은 명백했다.
온이 검집을 뽑아 장검을 휘두르자 칼끝은 정확히 가윤을 향했다. 주안은 도주를 일시적으로 포기하고 빙글 돌아 단검으로 온의 공격을 막았다. 장검과 단검이 부딪쳤다.
“윽……!”
온의 악물린 잇새로 신음이 흘렀다. 역시, 인간을 뛰어넘는 신체 능력이었다. 단지 무기를 교차한 것만으로도 팔이 저릿하게 울렸다.
주안은 새파란 안광을 번쩍이며 단검을 내리그었다.
온은 본인의 무기가 깨지기 전에 잽싸게 오른팔을 뒤로 뺐다. 동시에 왼손에 쥐고 있던 검집으로 제 얼굴을 사선으로 막았다.
온의 목을 향해 날아든 주안의 단검은 검집에 가로막혀 미끄러졌다.
“주안 님, 군졸들이 옵니다!”
가윤이 비명을 질렀다.
주안이 온을 막는 동안 가윤은 용케 군졸 하나를 무찌르고 그자의 무기를 갈취한 뒤였다.
아직 온전히 숨이 끊어지지 않아 바닥에서 꿈틀대는 군졸의 목을 가윤은 정확하게 찔러 아예 시체로 만들었다.
“가윤, 눈 감아!”
주안은 눈살을 잔뜩 찌푸리며 외쳤다. 가윤은 고분고분 머리를 감싸며 눈을 질끈 감았다.
주안의 안광이 더욱 짙어졌다. 평온한 때에 느긋하게 감탄할 수 있었다면 참 아름답다고, 정말 찬란하다고 진심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온도 본능적으로 주안의 지시를 따랐다. 그는 두 걸음 더 물러서며 얼굴을 가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