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만약 온이 떠나면, 륜의 선택지는 크게 두 개였다.
첫 번째, 수도를 벗어나 시골로 내려간 온을 그곳에서 조용히 죽이거나. 두 번째, 온이 그곳에서 정말로 죽은 듯 살아가게 두거나.
온이 죽은 것처럼 위장해서 낙향 도중에 빼돌리는 방법도 있었다. 하지만 정치적으로 계산했을 때, 두 번째와 세 번째는 륜과 화은에게 훨씬 위험한 선택이었다.
설령 온이 현재에는 권좌를 향한 욕심이 눈곱만큼도 없다 해도, 사람 마음은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거니까.
륜은 자신이 이복동생의 먼 미래와 깊은 속내까지 모조리 헤아린다고 자만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한 치 앞날도 확신할 수 없는 나약한 인간임을 순순히 인정했다.
동생의 무욕을 과신하여 그를 살려 뒀다가 위험의 여지를 남기느니, 그를 차라리 아예 죽이는 게 깔끔했다.
5년 전에 이미 해야 했을 일이었다.
만약 온이 끝까지 수도에 남았다면 그를 몰래 죽이고 사고사로 위장하는 게 까다로웠을 테지만, 지금 그는 오히려 형에게 도움을 건네고 있었다.
낙향한 온이 타지에서 변을 당했다고 둘러대는 게 건강하던 그가 황궁 한복판에서 비명횡사하는 것보다는 훨씬 그럴싸했다.
당신이 원한다면 나를 최대한 잡음 없이 제거할 수 있도록 무대를 마련해 드릴 테니, 제발 다른 사람은 엮지 말아 달라고, 온은 에둘러 부탁했다.
륜은 동생을 쳐다보았다. 형이 자신을 버렸음을 알고도 이에 대해 분노하거나 현실을 부정하지 않고 그저 순순히, 묵묵히 남들에게 피해 주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사람.
자신이 계속 수도에서 뻗대다간 자신의 어머니도, 부하들도, 궁인들도 자신과 엮여 해코지를 당할까 봐 그냥 잠자코 죽을 자리를 찾아 물러가겠다는 사람.
륜은 자신이 고통받을 자격조차 없음을 알고 비통한 눈빛을 삼갔다.
형은 동생과 달랐다. 륜은 상대방을 위해 순순히 죽어 줄 생각이 없었다.
옛날에 그가 제국의 안정과 동생의 안위만을 생각했다면, 결코 반정 같은 건 계획하지 않았으리라.
총명하고 인자한 황태자에게 마땅한 자리를 양보하고, 본인은 말없이 제거당했겠지.
<미안합니다.>
동생과 다른 삶을 택했다고 해서, 상대방의 삶을 통째로 부정할 생각은 없었다.
<미안해요, 아우님.>
제게 그럴 자격이 없음을 알았다. 나와 내 아이 대신 죽어 주겠다고 해 줘서 고맙다고 하는 것조차 가증스러웠다.
<만약, 나랑 그대가.>
만약, 우리가 동복형제였다면. 또는 둘 중 하나가 황녀로 태어났다면. 아니면 우리가 다른 평범한 가정에서 평범한 형제로 만났다면.
우리는 지금과 다른 이별을 맞이했을까.
<사과하지 마십시오, 폐하.>
온은 차갑게 선을 그었다. 늘 다정하던 그가 지금은 냉담했다. 5년 전에 처음으로 장착한 가면이었다. 이제는 그 아래 억눌린 따스한 눈빛조차 희귀한 것이 되었다.
<사과도 감사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고작 폐하께 그런 것들을 바라고 내린 결정이 아닙니다. 저는 그저.>
황제의 사과와 감사를 두고 ‘고작’이라니, 무엄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형은 나무라지 않았고, 동생은 움츠리지 않았다.
<저는 그저, 제가 배운 대로 실천하는 것뿐입니다.>
이 또한 불경한 언어였다. ‘배운 대로’ 앞에 생략된 문구가 ‘황태자 시절에’라는 내용임을 고려했을 때.
결국 온이 따른 건 그가 차기 황제로서 배운 가르침이었다.
때로는 공의를 위해 삿된 감정을 죽이고 군주로서 백성을 위해 희생할 줄도 알아야 한다고 성현들은 교훈을 남겼다.
온이 살아남기 위해서 택할 수 있는 한 가지 확실한 방법이 있었다. 5년 전 형이 그랬듯, 반정을 일으키면 된다.
온에게 명분은 충분했다. 선황의 적장자인 그가 패륜 천출 황제를 몰아내고 제자리를 되찾는 것뿐이었다.
분명 제국 어딘가에는 여전히 마음속으로나마 현 황제에게 지독한 원한 또는 불만을 가진 자가 있을 테고, 그들과 손잡고 반정을 일으킨다면 승산은 넉넉했다.
황후가 아들을 낳고 자신이 어린 조카를 위협하는 장성한 숙부로 낙인찍혀 숙청당하기 전에, 자신이 먼저 움직이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온은 거부했다.
또다시 황제가 바뀌어 피바람이 불고 륜이 가까스로 회복한 황실의 안정이 무너지는 걸 온은 원치 않았다.
<그러니 허락해 주십시오. 저 혼자만, 낙향하겠습니다.>
수도에 남아 쓸데없이 세력을 모아보려 하지 않을 테니, 그냥 나 하나 쫓아내거나 죽이는 걸로 만족하소서.
<……허락하지요.>
륜이 말했다. 동생에게 사형선고를 내리는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눈빛으로, 애처롭게.
<오직 아우님 한 분만 낙향할 겁니다.>
온은 가는 길마저 쓸쓸할 예정이었다.
<감사합니다, 폐하.>
온은 건조하게 아뢰었다. 이어서 고개를 공손히 조아려 자신이 따르는 군주에게 복종의 뜻을 밝혔다.
그게 며칠 전이었다. 이제 바로 내일, 온은 가윤을 만나러 간다.
“물론, 내게도 유독 어울리는 색이 있지요. 예컨대, 이런 밝은 파란색과 이런 짙은 붉은색.”
한편, 류하는 계속해서 뻔뻔하게 재잘댔다.
아까 자기는 그 어떤 색을 두르든 어울린다고 선포한 뒤로 궁인들은 여전히 떨떠름한 표정이었으나, 온은 진지하게 경청했다.
“결국 그대의 말이 맞았네요. 내 선물을 골라 준 사람, 안목이 몹시 뛰어나요.”
류하는 밝은 파란색 노리개와 짙은 붉은색 팔찌를 뽐내며 온에게 빙그레 웃어 주었다. 장신구 고르는 눈을 칭찬받은 온은 뿌듯한 미소를 그렸다.
“네, 저도 동의합니다.”
각자 자화자찬에 도가 튼 연인들이었다. 한쪽은 자신의 미모를 칭찬하고 한쪽은 자신의 심미안을 자랑하며 단풍잎 아래에서 평온한 시간을 보냈다.
“그나저나, 슬슬 황궁의 겨울이 궁금하군요.”
“황궁의 겨울이요?”
류하가 화제를 돌리자 온이 뜻을 물었다. 류하는 눈을 빛내며 끄덕였다.
“네, 겨울이요. 내가 황궁에 도착한 게 봄이고, 그사이 여름이 지나 가을이 되지 않았습니까. 한 해의 사계 중에 세 계절을 즐겼으니, 이제 마지막 계절이 궁금합니다.”
과연,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흘렀구나. 온은 문득 감동했다.
내가 당신처럼 귀한 사람을 알고 지낸 지 무려 세 계절째야. 단 하루만 알아도 영광인 사람인데, 장장 몇 달을 당신과 함께 보냈어.
“황궁의 겨울도 아름다울 겁니다. 봄부터 지금까지 그랬듯이요.”
온은 과장 없이 다짐했다. 류하는 다시 고개를 주억거렸다. 마치 선물을 약속하는 아이처럼.
“벌써 기대됩니다.”
류하의 먹색 눈은 호기심으로 반짝였다. 온은 연인의 저 반짝임이 언제 봐도 신비했다.
참으로 당차고 씩씩한 공주로다. 호기심을 품는 데 거리낌이 없었고 원한에 사로잡혀 스스로 불행하게 만들지 않았다.
스무 살 앳된 나이에 머나먼 타지로 끌려와 폭군 황제의 후궁 노릇을 하면서도 저리 밝다니, 사실 그건 굉장히 어려운 일이었다.
끌려온 지 어느덧 반년이 흘렀으니 그동안 많이 적응한 탓도 있겠지만, 아직 많은 것이 낯선 외국의 황궁에서 겨울 풍경이 궁금하다고 태평하게 떠드는 게 신기했다.
아니, 이곳의 겨울이 아름답든 말든 당신과 무슨 상관이야? 당신이 미워하는 나라잖아.
당신은 이곳에 볼모로 끌려왔어. 당신은 충분히 우울해하고, 원망하고, 무너질 자격이 있어.
하지만 여전히 당신은 나를 보며 웃어.
“눈 내리는 걸 본 적이 없다고 하셨죠?”
“네, 없습니다.”
온이 언젠가 들었던 얘기 한 조각을 되묻자 류하가 수긍했다. 근처에 있던 휘국 궁인들은 다시 묘한 표정을 지었다. 눈을 본 적이 한 번도 없어?
“마마의 첫눈이 특히 아름다웠으면 좋겠습니다.”
북쪽에서 나고 자란 궁인들이 남쪽에서 온 마마님의 경험을 이해해 보려고 애쓰는 동안, 온은 류하를 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류하는 주춤했다.
“네, 분명 아름다울 거예요.”
그녀가 대답했다. 그러더니 이전과는 다른 느낌으로 웃으며 또렷이 덧붙였다.
“그대도 같이 볼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그 첫눈을.”
고작 한두 달 뒤의 일이야. 제발, 그때 그대는 여기 없을 것처럼 얘기하지 마.
우리의 첫눈이 아니라 내 첫눈이 아름다울 거라고 그렇게 콕 집어 말하며, 그런 애틋한 눈빛을 짓지 마.
이번에는 온이 주춤했다. 종종 예리하게 작동하며 허를 찌르는 류하의 직감이 그를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죽어서든 살아서든 그는 겨울철에 이곳에 없을지도 모르니, 그가 없을 때도 그녀가 아름다운 풍경을 보기를 빌어 준 그의 마음이 혹 들켰을까 봐, 그는 두려웠다.
내가 며칠 만에 마음을 바꿔 방물장수에게서 붉은 팔찌를 산 것도.
내가 이번 일을 정리하고 무사히 사라졌을 때, 당신이 내가 남긴 작은 물질적인 추억 하나라도 간직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마음 때문이었어.
아아, 나는 이미 작별을 준비하고 있어. 당신은 끝까지 몰랐으면 좋겠어.
“분명 같이 볼 수 있을 겁니다.”
온은 거짓말했다. 황족은 본래 속임수에 능하니, 별로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저는 마마의 호위입니다. 마땅히 그때도 곁에 있겠습니다.”
호위로서도 계속 남을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제는 그 욕심도 꿈이었다.
“그래야죠.”
류하는 다시 웃었다. 치마폭을 정돈하는 척, 옷깃에 단 노리개를 꾹 움켜쥐며.
“마땅히 내 곁에 남으세요.”
그렇게라도 불안을 삼켜야 했다.
류하는 방으로 돌아왔다. 옷을 갈아입고 장의자에 편한 자세로 앉아 독서를 시도하던 류하는 곧, 포기했다.
‘집중 안 돼.’
그녀는 초조하게 입술을 물었다. 하얀 건 종이요, 까만 건 글씨로다.
그녀는 읽는 척하던 서책을 덮고 다시 책장으로 갔다. 이번에 그녀는 독서가 아닌 다른 것을 목표로 책들 사이를 뒤적였다.
‘찾았다.’
그녀가 서책을 하나 꺼냈다. 고향에서 가져온, 예전에 어머니가 살아 계시던 시절부터 즐겨 읽은 어느 시집이었다.
모퉁이가 너덜너덜한 책을 조심히 펼치자, 나뭇잎을 끼워 둔 쪽이 나타났다.
온이 잡아 준 단풍잎도 당연히 고이 모셔 두고 있었다. 땅에 닿기 전에 잡으면 첫사랑을 이뤄 준다는, 고작 미신에 기대어 의미를 찾은 나뭇잎 한 장.
고작 미신이지만, 그저 나뭇잎일 뿐이지만, 류하에게는 소중했다.
단지 사랑하는 사람과 닿았다는 이유만으로 식물 이파리는 성스러운 물건이 되어, 류하의 추억에 중대하고 아름다운 자국을 남겼다.
류하는 단풍잎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숙여 잎 끄트머리에 조심스레 입을 맞췄다. 그저 입술이 스칠 정도로만, 가볍게.
‘보고 싶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