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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궁의 은밀한 연서 (86)화 (86/123)

86화

하긴, 그 삭막한 집안에서 평생 버티다 황궁에서도 여태까지 살아남았으니 예빈도 보통은 아니라고 화은은 생각했다.

아마도, 그 삭막한 집안에서 평생 버틴 게 문제였다.

딸을 가장 비싸게 팔아먹을 궁리만 하다가 옳다구나 하고 후궁으로 바친 부모에게서 벗어나, 황궁에서 그토록 친절한 사람을 만났으니, 마음이 물러질 만도 하지.

오랫동안 어여쁜 상품 취급을 받다가 아비를 죽인 패륜 황제와 마음에도 없는 정략혼을 위해 반강제로 입궁했다. 겁에 질린 그녀에게 훤아가 다가왔다.

가장 먼저 후궁으로 간택된 훤아는 선임으로서 책임감을 느끼고 예빈을 다정하게 돌봤다. 애착은 그때부터 뿌리내렸다.

다른 여러 단어로 표현할 수 있겠지만, 예빈의 훤아를 향한 감정은 무엇보다 집착이었다.

해비를 향한 독점욕에 이방인을 향한 경멸까지 더해져 사태가 이만큼 악화했겠지. 예빈이 원래 유한 성격도 아니었고. 화은은 그리 결론지었다.

“아니. 굳이 고칠 필요 없네, 예빈.”

황후는 내명부 곳곳에 손발이 있었다. 다른 후궁들은 가문의 권세에 힘입어 궐내에서 사람을 부렸지만, 황후는 순전히 본인의 영향력으로 각지에 눈과 귀를 심었다.

류하가 낙마할 뻔하고 얼마 뒤, 뜬금없이 예빈이 류하의 처소에 들렀다고 한다.

정보를 입수한 화은은 고민했다. 평소 사이가 나쁘기로 유명한 그 둘이 편안하게 담소나 나누려고 만나지는 않았을 테고. 그렇다면, 왜?

“나는 그대가 한 일이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내가 성인군자도 아닌데 어찌 그대를 탓하겠나. 우리 모두 미운 사람이 한 명쯤은 있기 마련이지. 미우면 콱 죽여 버리고 싶고, 그러다가 실제로 콱 죽이기도 하고, 그런 거 아니겠나?”

“저, 전하. 저는 전하께서 지금 무슨 말씀이신지…….”

예빈은 이제 대놓고 변색했다. 화은은 싱긋 웃었다. 아, 영특하지만 때로는 서툰 가여운 그대여. 그대는 초보적인 실수를 저질렀어.

“월빈의 말에 무슨 짓을 했지?”

자신이 의심받을 수도 있는 상황에는 몸을 사렸어야 했다. 절대로 사과하겠답시고 월빈의 처소를 찾아가선 안 됐었다.

평소에 안 하던 짓을 하자 눈에 띄었고, 이에 주목한 화은은 한 가지 합리적인 결론을 도출했다.

“월빈이 그렇게 싫었어? 왜, 그 아이가 이방인이라서? 하찮은 나라에서 온 것치고는 꽤 기품 있고 사려 깊은 아이로 알고 있는데, 굳이 그대가 살의를 품을 이유가 있었나?”

“전하, 용서하십시오. 맹세코 해칠 마음은 없었습니다. 그저 골리고 싶은 마음이 과도하여 제가 황실의 여인에게 죄지었으니, 어떤 벌이든 달게 받겠습니다. 부디 사하여 주십시오.”

예빈은 바짝 엎드렸다. 적어도 그녀는 절박한 상황에서 자존심을 챙길 만큼 거만하거나 어리석은 자는 아니었다.

제 약점을 틀어쥐고 우아하게 위협하는 황후에게 그녀는 비굴할 만큼 간곡하게 용서를 구했다.

“내가 말했지. 나는 그대가 한 일이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오히려 매우 잘 이해해.”

화은이 부드럽게 말했다. 예빈은 창백한 얼굴로 바닥을 보며 황후의 말뜻을 곱씹었다.

“하지만, 황실의 다른 사람들이 나와 같은 생각일지는 모르겠군.”

예빈은 움찔 떨었다. 화은은 권력이 주는 안정감을 음미하며 조곤조곤 말을 이었다.

“그러니 나는 그대의 기행을 비밀에 부칠 생각이네. 황손의 출산을 기다리는 경건한 때에 굳이 내명부에 혼란을 부르고 싶지 않아.”

화은은 자신의 배를 사랑스럽게 쓰다듬었고, 예빈은 저 인자한 어미의 모습과 자신을 내리찍는 차디찬 황후의 괴리 속에서 숨죽여 기다렸다. 지금은 차마 황송하다고도 말할 수 없었다.

“다만, 그 대가로 그대가 자그마한 성의를 보였으면 하는데.”

화은은 본론을 덧붙였다.

예빈의 약점을 캐낸 건 이를 위함이었다. 예빈이 다른 후궁을 죽이려 했다고 잔뜩 부풀려 황제에게 일러바치지 않는 대신, 예빈을 장기짝처럼 이용하기 위하여.

“하명하십시오.”

예빈은 자그맣게 청했다. 이제 와서 제게 선택권이 없음을 알았다.

그녀는 류하의 처소에 찾아간 과거의 자신을 원망했고, 애초에 류하의 기마에 장난질한 것을 후회했으며, 궁극적으로 류하를 더욱 증오했다. 남 탓하는 게 가장 쉬운 일이었다.

“때가 되면 내가 그대에게 부탁을 하나 할 거야. 내가 일러 주는 그대로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폐하께 고하게. 알겠나?”

“명심하겠습니다, 전하.”

대체 무슨 내용의 고발이기에 그러지? 예빈은 긴장했다. 기껏해야 시시콜콜한 일에 써먹으려고 굳이 나를 이렇게 겁박하신 건 아닐 터.

예빈은 화은이 염두에 둔 계획이 궁금했으나, 감히 여쭈지 않았다. 화은 역시 아직은 설명하지 않았다. 때가 되면 말하리라.

“앞으로 잘 처신해 주길 부탁해, 예빈.”

화은은 온화한 음성으로 쐐기를 박았다. 예빈은 화은이 독설을 퍼부은 듯 움츠렸다.

“나는 성품이 그리 너그럽지 않거든.”

그러면서 황후는 정녕 선녀처럼, 활짝 웃었다.

“그래서 기회를 두 번 주지도 않아.”

굳이 황후가 그리 말해 주지 않아도 예빈은 상대방의 인내심을 시험할 생각이 없었다.

여름에 그런 일이 있었다. 그 결실은 가을에야 형체를 드러냈다.

약속한 날짜가 임박했다. 온은 다음 날 가윤을 만나기 위한 만반의 준비를 끝냈다. 말하자면, 철저하게 함정을 준비했다.

“대장군, 그대의 말이 맞았어요.”

옛 약혼녀 후보와 재회하기 전날, 그는 어김없이 류하와 후원에 있었다.

날씨가 점점 추워졌으나, 류하는 아직도 날마다 산책을 고집했다. 사랑하는 이와 조금이라도 더 오래 있기 위해.

“계절이 깊어질수록 단풍도 더 곱네요. 그대가 그렇게 말했잖아요.”

류하는 눈매를 접으며 달게 웃었고, 그 뜻을 알아들은 온도 남몰래 미소를 머금었다.

“물론이지요. 저는 마마께 틀린 말씀을 드린 적이 없습니다.”

그가 살짝 우쭐대자 류하는 예전처럼 입술을 물었다. 저렇게 가끔 재수 없게 구는 모습을 보고도 귀엽다는 생각이 들다니, 제 콩깍지가 꽤 중증이라고 생각하며.

“흐음, 한번 잘 생각해 보세요. 사람이 어떻게 항상 맞는 말만 하고 살겠어요? 그대도 분명히 내게 한 번쯤은 궤변을 늘어놓은 적이 있을걸요.”

“궤변…….”

류하가 짐짓 근엄하게 받아치자 온은 으쓱대던 것도 잊고 단번에 시무룩해졌다. 궤변이라니, 말이 너무 심하잖아.

‘아, 어떡해.’

류하는 다시 겨우 변태적인 미소를 참았다. 어떡해, 어쩜 좋아, 풀 죽은 모습도 귀여워. 강아지 같아. 나만 보고 싶어.

‘꼬집어 보고 싶다.’

류하는 온의 볼을 보며 진지하게 생각했다.

꼬집을 살집도 별로 없는 뺨이지만, 그래도 막상 만지면 굉장히 말랑말랑하던데. 매끄럽고.

장수답게 거칠지 않고 황족처럼 보드라운 살이었다.

류하는 저 뺨을 싸쥐고 입 맞추던 빗속의 추억을 떠올렸다. 눈빛이 슬프게 가라앉았다.

“그래도 이번에는 궤변이 아니었어요. 칭찬해 드릴게요, 대장군.”

류하는 일부러 발랄하게 덧붙였다. 동시에, 차림새를 정돈하는 척하며 옷깃을 살짝 뒤집었다.

소매가 흘러내리며 붉은빛 팔찌가 드러났고, 투명한 구슬로 장식한 파란 노리개가 반짝였다.

“……새 장신구를 구하셨군요. 아름다우십니다.”

잠시 눈을 크게 뜬 온이 곧 부드럽게 웃으며 아뢰었다. 류하의 눈꼬리가 둥글게 휘었다.

“귀한 이에게 선물로 받았습니다. 그간 다른 이들에게 보이기 아까워 꼭꼭 숨겨 뒀는데, 생각해 보니 자랑하고 싶더라고요.”

그러니까 삐치지 마세요, 온. 절대 차고 싶지 않아서 안 찬 게 아니니까.

류하는 눈빛으로 열심히 전언을 보냈지만, 한 번도 삐친 적 없는 온은 이해하지 못했다. 대신 자화자찬에 나섰다.

“선물하신 분의 안목이 몹시 뛰어난가 봅니다. 마마와 완벽하게 어울리는 색깔입니다.”

연인이 또 재수 없게 굴자 류하의 웃음이 뚝 그쳤다. 그녀는 새침해진 시선으로 뻔뻔하게 대꾸했다.

“글쎄요, 선물한 이의 안목이 뛰어나다기보다는 내 미모가 빼어난 게 아닐까요? 어떤 색이든 나와는 잘 어울리니까요.”

헐. 근처에 있던 궁녀들의 눈빛이 조금 어색해졌다. 온조차 살짝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 류하 혼자 당당하게 제 외모에 대한 자신감을 발산했다. 온은 끝내 웃고야 말았다.

“마마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기꺼이 받아들이겠습니다.”

차마 소리를 내지 못하고 눈과 입술로만 방긋대는 웃음이었다.

나도 평범한 연인처럼 자유롭게 폭소하며 당신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고 싶다.

안색 한 번 변하지 않고 스스로 미모를 치켜세우는 당신의 사랑스러운 철면피를 귀여워하며 장난스레 타박하고 싶어.

그러나 현실에서 그는 공손한 언어로 돌려 말했고, 류하는 가까스로 만족하며 찬란하게 마주 웃어 주었다.

온은 류하의 고운 얼굴을 보며 이목구비 하나하나를 기억에 새기듯 소중하게 음미했다.

일이 계획대로 풀린다면 조만간 영영 보지 못하게 될 얼굴인지라, 그토록 필사적이었다.

온이 륜에게 청한 바가 이루어진다면, 정해진 순서는 어차피 이별이었다.

<폐하. 이번 일을 무사히 성사하여 제가 폐하를 향한 충정을 입증하고 나면, 그 대가로 작은 상을 청해도 되겠습니까?>

<어떤 청인데요?>

가윤이 보낸 쪽지의 내용을 황제께 일러바치기 위해 갔던 날, 온은 스스로 미끼가 되기를 구하며 감히 사적인 소원을 덧붙였다.

<단가윤이 무슨 이유로 제게 접근했는지 알아내고 그 배후에 누가 있는지 밝혀내고 나면, 저는 대장군 자리를 사임하고 낙향하기 원합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륜은 당황하여 되물었다.

<낙향이요?>

<네, 폐하. 출궁해서 아예 수도를 벗어나겠습니다.>

<아우님이 왜…….>

륜이 말꼬리를 흐렸다. 동생이 떠나고자 하는 이유를 본인이 가장 잘 알았기에 더는 물을 수가 없었다. 온의 표정은 계속해서 침착했다.

<아무에게도 폐 끼치지 않고 조용히 잠적하겠습니다. 수도에서 알고 지내던 사람들과도 전부 연을 끊겠습니다.>

약속의 내용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온은 륜을 똑바로 보며 나직하게 덧붙였다.

<그러니 부디, 폐하께서 어떤 결과를 원하시든 저 하나만 영향을 받게 해 주십시오.>

조용히 떠날게. 연을 끊을게. 그러니 나 하나만 죽는 걸로 끝나게 해 줘.

온이 당부한 내용은 사실상 그거였다. 어영부영 황성에서 시간 끌지 않을 테니, 어떻게든 발버둥 쳐 이겨 보려 하지 않을 테니, 이제 나를 놓아 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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