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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궁의 은밀한 연서 (85)화 (85/123)

85화

화은이 딸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륜은 이 모든 과정을 살짝 긴장한 채 지켜보았다.

“글쎄, 꼭 그런 것만도 아닌 것 같구나.”

화은은 부드럽게 대꾸했고, 선은 모친의 뜻을 헤아리지 못해 말똥말똥 바라보았다.

딸아이의 앙증맞은 모습에 엄마는 피식 웃으며 꼬마의 머리를 재차 쓰다듬었다.

“반드시 훌륭한 어른이 되어 어마마마와 아바마마를 기쁘게 해 드리겠습니다. 미래의 제 동생도요.”

선은 야무지게 다짐했고, 화은은 다시 맑게 웃었다. 엄마는 딸을 보며 기꺼이 끄덕였다.

“그래, 선아. 이 어미는 너로 인해 이미 기쁘단다.”

진짜? 륜은 속으로 반문했다. 진짜이기를 바랐다.

이후, 선은 다시 아버지와 물감 놀이를 하다가 임부의 몸이 슬슬 피로를 느끼자 유모와 함께 처소로 돌아갔다. 륜은 아내의 곁에 남았다.

“아이한테 많이 부드러워지셨군요.”

화은의 손을 잡으며 륜은 조심스레 지적했다. 화은의 표정은 담담했다.

“어찌 평생 서먹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도 제 피붙이고, 폐하의 딸인데.”

화은이 온갖 고생 끝에 선을 낳았을 때, 그녀도 륜도 아이의 성별을 보고 내심 실망했다.

서로와 아이에게 퍽 잔인한 생각이었지만, 현실이 그러했다.

당시 륜은 아직 황제가 아니었으나, 이미 황제가 되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마치고 기회만 노리던 때였다.

륜은 결코 막판에 마음을 바꾸어 반정을 결정한 충동적이고 준비성 없는 사람이 아니었다.

첫딸이 태어난 게 그가 황제가 되기 전 해였으니, 그때 이미 계획은 마련돼 있었다.

황제가 되기로 마음을 정한 그는 후계자를 염원했다. 아비를 베고 이복동생을 몰아내 옥좌를 차지할 제게 아들마저 없다면 안정을 되찾기가 몹시 어려울 것임을 그는 잘 알았다.

부디, 내 사랑하는 아내여, 아들을 낳아 다오. 나는 나의 불안정한 즉위를 안정적인 후계 구도로 뒷받침하고, 그대는 현 황제의 유일한 정비이자 차기 황제의 어미가 될 테니.

하지만 선은, 결국 딸로 태어났다.

깊게 상처받은 부모 중에 아비가 먼저 마음을 풀었다. 자신과 아내를 골고루 빼닮은 작고 귀여운 아이는 보기에 사랑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아들로 태어났다면 훨씬 나았겠으나, 딸이라는 이유로 핍박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저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어린아이를 핍박하는 게 얼마나 잔혹하고 위험한 일인지 륜은 알고 있었다.

봐봐. 나는 천출의 장자로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게 아니야. 내가 어찌할 수 없는 태생 때문에 내 아비와 계모들은 나를 핍박했고, 결국 나라는 괴물을 낳았지.

여러모로 부족한 아비였지만, 적어도 자기 딸을 상대로는 그런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고자 했다.

여아로 태어난 건 이 아이의 잘못이 아니다. 아이를 세상으로 끌어낸 건 나와 화은이야.

화은은 훨씬 오래 걸렸다. 아홉 달간 힘겹게 품고 온몸이 끊어지는 듯한 산고를 견디고 나서야 겨우 만난 맏이가 아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의연히 받아들이기까지.

“역시, 그대는 웃을 때 참 예뻐요.”

륜은 뜬금없이 고백했다. 남편의 낯간지러운 애정 공세에 화은은 살짝 난처하다는 눈빛을 지었다. 그러나 그 눈빛마저 온화했다.

“뭐, 평소에도 늘 예쁘긴 하지만.”

륜은 단정하게 덧붙였고, 화은은 이제 쌩긋 웃었다. 우아한 눈매가 선녀처럼 휘었다.

“그런데 아까 선에게 웃어 주는 걸 보니, 더욱 예쁘더군요.”

아까 선이 용기 내어 엄마에게 다가갔을 때, 지켜보던 륜은 조마조마했다.

화은이 과연 저 아이를 받아 줄까. 두 번째 회임으로 전신이 지치고 찌뿌둥한 가운데 딸의 존재를 버거워하며 차가운 신경질로 거부하는 건 아닐까.

만약 그런다면, 나도 선도 몹시 상처받을 텐데.

그러나 화은은 아이에게 웃어 주었다. 륜은 지극히 안도했다. 자기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두 사람이 서로 위화감 없이 어울리는 모습이 그의 마음을 벅차게 했다.

“예쁘다는 칭찬을 너무 많이 하지는 말아 주세요, 폐하.”

“왜요?”

“제가 너무 익숙해질까 두렵습니다. 매번 새롭게 감동하고 싶은데, 나중에 감동이 일상이 되면 처음의 기쁨이 빛바랠 것 같습니다.”

화은이 조곤조곤 아양을 떨자 륜은 사랑스러워 미치겠다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이어서, 고개를 기울여 황후에게 입을 맞췄다.

아비의 목을 베고 전쟁을 일으킨 황제와 그 황제의 얼음 같은 정비가 이토록 달고 순한 시간을 보내고 있음을 알았다면, 아마 그들의 신하와 백성의 대부분이 놀라 기함하리라.

사실, 이런 분위기는 본인들에게도 생경했다. 여태 부부로 지내면서 이렇게 말랑말랑했던 적이 언제였더라. 곰곰이 되짚어 보면, 그런 적은 아마도 없는 듯했다.

륜의 즉위 전에 둘은 정치적 동료였다. 침착하고 치열하게 반정 계획을 짰고, 실패에 대비해 죽음을 각오했으며, 언제 어디서 일이 수틀릴지 몰라 나란히 긴장하며 지냈다.

륜이 즉위한 후에는 후궁들이 끼어들었다.

륜은 정치적 계산에 따라 첩실을 줄줄이 들이기로 마음먹은 주제에 정비에게 살갑게 굴 만큼 속없는 놈이 아니었다.

평소에는 철면피를 잘만 까는 그였지만, 유독 화은에게는 그게 어려웠다.

이제야 그들은 뒤늦은 신혼을 맛보았다. 결혼한 지 몇 년 만에, 첫애는 벌써 여섯 살이고 아내의 배 속에는 이미 둘째가 존재하는 지금.

필시 륜이 동생을 버렸기 때문이리라.

이번에 화은이 아들을 낳는다면 반드시 태자로 삼겠다고, 아들을 얻고자 더는 후궁들과 동침하지 않겠다고, 이복동생을 싸고돌며 아내를 불안하게 하지 않겠다고, 륜이 약속한 덕이었다.

“하아.”

화은이 먼저 숨결을 뱉었다. 고혹적인 입술이 촉촉하게 붉어져 더욱 치명적이었다.

붉디붉은 윤기를 보고 륜은 치미는 갈증을 억눌렀다. 불꽃을 삼킨 듯 몸속이 뜨거웠다.

“폐하.”

화은이 중얼댔다. 이번에는 그녀가 먼저 손을 뻗어 륜의 목을 안았다.

태중의 아이가 눌리지 않도록 살포시 남편을 감싸며, 그녀는 그의 호흡을 제 온기로 채웠다.

“폐하, 최근에 제가 흥미로운 이야기를 하나 들었습니다.”

입맞춤의 끝자락에서 화은이 속삭였다. 륜은 아내를 품에 안고 다정하게 어루만졌다. 그러다 곧, 동작을 그쳤다.

“죽은 단씨 가주의 맏딸이 살아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자와 온 대장군이 만났다는군요.”

륜은 아내를 안은 자세 그대로 눈을 내리감았다. 그래, 그럼 그렇지. 우리가 이런 말랑말랑한 망각을 오래 이어 갈 수 있을 리 없지.

“그리고 조만간 곧 다시 만난다는데, 어떻게 하실 겁니까?”

황제가 별도의 정보망을 지니고 있듯 황후도 개별적으로 정보통을 길렀다.

휘결과 가윤 측은 실수로 정보를 흘리는 척하며 황후 측에 진실을 알렸다. 황후는 이게 혹시 함정이 아닐까 의심하면서도 일단 정보를 움켜잡았다.

“이건 반역입니다, 폐하.”

황후는 차분하게 들뜬 목소리로 간곡하게 깨우쳤다.

제발, 당신은 뭇사람의 눈앞에서 동생이 아닌 나와 우리의 자식을 택했잖아. 이제 그 선택을 실천할 때야. 당신이 정녕 대장군을 버렸음을 보여 줘.

원래는 화은도 이렇게까지 조급해할 생각은 없었다. 오히려 그녀는 황제의 선택을 듣고 마음이 제법 여유로워진 상태였다.

마음이 너그럽게 풀어지자 남편에게 그토록 달콤하게 웃을 수 있었고, 원래는 서먹하던 딸에게도 그토록 상냥할 수 있었다.

게다가 벌써 이렇게 성급히 온을 쳤다가, 자신이 또 딸을 낳기라도 한다면?

황실에 황태제가 필요 없다고 완전히 판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신중한 화은은 섣불리 움직이기를 꺼렸다.

한데, 그 와중에 온이 역적의 딸과 접촉했다는 정보가 입수됐다. 화은은 경각심을 느꼈다. 진지한 공포로 심장이 싸늘하게 식었다.

어쩌면 이건 조작된 정보일 수도 있다. 화은이 모르는 자초지종이 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만에 하나 정말로 온이 불충한 의도를 품고 단씨 가주의 딸을 찾아낸 거라면. 그러면 어떡해?

내가 여유로워진 만큼 절박해진 대장군이 정녕 반역을 꾀하기라도 했다면, 싹을 미리 도려내야 마땅했다.

“내가 알아서 할게요.”

륜은 뚝뚝하게 대답했다. 일전의 다정함은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화은이 눈가를 굳혔다.

“황후, 설마 그대의 수하들이 알아낸 사실을 내 수하들은 모른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죠?”

륜은 입술로만 싱긋 웃었다. 화은은 거짓 미소조차 짓지 않았다.

“대장군이 언제 어디서 뭘 하고 돌아다니는지는 이미 내 손바닥 안에 고스란히 있습니다. 단가윤을 만났다는 것도 나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내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 그대는 신경 쓰지 마세요.”

여기서 좀 더 자세히 설명했다면, 화은이 마음을 바꿨을까?

온은 손톱만큼의 역심도 품고 있지 않으며, 오히려 단가윤을 만나자마자 내게 달려와 고하고 스스로 상대편을 잡기 위한 미끼가 되겠다고 자청했다는 사실을 륜이 자세히 알렸더라면.

“……알겠습니다, 폐하.”

그러나 륜은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았고, 화은은 불안을 냉정하게 가라앉히며 스스로 나아갈 길을 정했다.

내명부에 숨겨 둔 패를 활용할 차례였다.

제13장. 포획

이건 한 계절 전의 일이었다. 아직 단풍이 물들기 전, 화창한 여름날이 이어질 때.

“월빈의 처소에 다녀왔다며.”

황후는 예빈과 단둘이 있었다. 당연히 황후 쪽에서 먼저 불렀다.

예빈은 감히 황후에게 오라 가라 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고, 자신이 먼저 만남을 청할 배짱도 없는 자였다.

“둘이 그렇게까지 친한 줄 몰랐어. 내가 알기로는 그대가 그자를 미워하고 그자는 그런 그대 때문에 꽤 피곤하게 사는 중이었는데. 아닌가?”

“……그렇게 보였다면 송구합니다. 내명부에 불화를 조장한 죗값은 뭐든지 달게 받겠습니다.”

예빈은 떨고 있었다. 그러나 떨지 않으려 노력했다.

얼마 전에 류하의 애마가 날뛰는 바람에 류하가 낙마할 뻔한 ‘사고’가 있었고, 예빈이 사과하겠답시고 뻔뻔하게 류하의 처소에 들른 게 며칠 전이었다.

“어머, 죗값이라니. 그대에게 죄를 묻고 싶은 게 아니야. 어차피 내가 묻지 않아도 그대 스스로 너무 잘 알고 있을 듯한데.”

느닷없이 예빈을 처소로 부른 화은은 후궁을 앞에 앉혀 두고 나긋하게 찔러댔다. 예빈은 마른침을 삼켰다.

“전하, 저는 전하보다 아둔하여 전하께서 하시는 말씀을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제가 잘못한 게 있다면 부디 말씀해 주십시오. 고치겠습니다.”

그 와중에도 또박또박 악착같이 발뺌하는 걸 보니 얘도 집에서 잘 키웠구나, 하고 화은은 속으로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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