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류하는 연인의 눈부심을 피해 시선을 옮겼다. 그녀는 대신 주변의 탐스러운 붉은빛을 둘러보았다.
그저 비유에 불과하긴 했지만, 실제로 후원의 단풍은 아름다웠다. 그녀는 자연의 색깔에 몰입하려 애썼다.
류하는 문득, 계절이 깊어질수록 단풍색이 더욱 곱다는 방금 온의 발언을 떠올렸다.
그렇다면, 단풍은 지기 직전에 가장 아름다운가?
피처럼 오롯이 붉어져 낙하를 앞둔 순간에야 가장 예쁜 거야? 정말로?
“이제 그만 들어가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오늘 구경할 몫은 충분히 구경했다. 연인에게 선물도 받았으니, 더는 바랄 게 없었다.
류하는 온의 잔소리가 재개되기 전에 안으로 들어가기로 마음먹었다. 가을바람이 퍽 쌀쌀하긴 했다.
류하는 최대한 늦게까지 외투를 벗지 않았다. 궁녀들이 탈의를 돕기 위해 다가오기 직전, 그녀는 소매를 쓰다듬는 척하며 잽싸게 주머니 안을 훑었다. 팔찌는 그녀의 주먹에 쏙 담겼다.
‘약속은 지킬 수 있을 것 같네.’
궁녀들이 모두 물러간 뒤, 간신히 혼자 남은 류하는 손을 펴고 팔찌를 제대로 살폈다.
‘실망하지 않았어.’
단풍보다도 곱고 진한 홍색. 아까 몰래 만져 보며 깨달았듯이 몹시 결이 고운 비단이었고, 앙증맞고도 우아한 구슬 장식은 윤택한 금빛이었다.
‘실망스럽지 않아.’
노리개를 골라 줄 때만 해도 쩔쩔매던 사내가 언제 이렇게 잘 커서 이런 선물을 구했을까.
류하는 자유롭게 싱긋 웃었다. 더는 입술을 깨물어 희소를 억누를 필요가 없었다.
“보고 싶다.”
그녀는 자그맣게 중얼댔다. 그대 앞에서 마음껏 이 팔찌를 끼고 촐싹대며 자랑하고 싶다. 실제로 보고 실망하지 않았다고, 정말 감격스럽다고 눈웃음을 살살 치며 알려 주고 싶다.
하지만, 그럴 수 없겠지. 남들 앞에서 이 팔찌를 낄 때면, 그저 원래 갖고 있던 패물 중 하나라고 둘러대야 할 거야.
‘……한 번쯤은 끼고 나가야겠지?’
류하는 고민했다. 잠시 망설이던 그녀는 장롱을 열고 패물함을 꺼냈다. 후궁의 값진 물건 중에 유독 새것으로 보이는 노리개 하나가 드러났다.
‘새것처럼 보일 만하지.’
바다처럼 파란 노리개였다. 소낙비가 내려 연인들이 입 맞췄던 날, 온의 도움을 받아 류하가 고른 장신구.
‘사고 나서 거의 안 꼈으니까.’
어쩐지 끼기 싫었다. 남들은 모르는 저만의 물건으로 간직하고 싶었다.
남들 눈에는 그저 평범한 노리개, 가벼운 품평의 대상이 되는 후궁의 많고 많은 장신구 중 하나겠지만, 내게는 그런 게 아니니까.
‘그런데…… 혹시 온이 서운했으려나?’
류하는 골똘히 미간을 모았다.
자기 딴에는 애틋한 추억이 얽힌 소중한 물건이라 애지중지한답시고 숨겨 둔 건데, 온은 오해했으면 어떡하지? 궁금해했으려나?
내가 자신이 골라 준 물건을 차고 나오지 않아서 처음에는 의아해하다가, 조금 섭섭했을까?
‘으음, 물론 본인은 아무 생각 없을 수도 있지만…….’
정작 온 본인은 단지 순수한 애정을 담아 팔찌를 사 준 걸 수도 있지만, 류하는 혹시 몰라 신경을 곤두세웠다.
‘이거 설마, 자기가 삐쳤다는 무언의 항변인가?’
류하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왜 내가 골라 준 노리개는 안 끼고 다니느냐며 우회적으로 징징대는 거면 어떡하지?
노리개가 그렇게 맘에 안 들면 제발 이 팔찌라도 하고 다니세요, 라고 에둘러 간청한 건가?
‘윽, 그 사람이 그럴 사람은 아닌데.’
그 점잖고 진지한 분께서 설마 그런 유치한 의도를 품었을까. 내 애인이 그럴 리가 없지, 하하하.
‘아니야, 잠깐만.’
한데, 생각해 보니 그 사람이 꼭 그렇게 점잖고 진지하지만은 않잖아? 류하는 애초에 온이 이 노리개를 골라 줬던 날을 떠올리고 얼굴을 급격히 붉혔다.
‘으윽, 다시 생각해 보니, 좀……. 그럴 만한 사람 같기도 하고…….’
한참 입 맞추다 새침한 척 놀리니까 비 맞은 대형견처럼 낑낑거리고, 그러다 또 잘못 자극하면 늑대처럼 변해 달려들던 사내.
처음에는 그냥 목석인 줄 알았더니, 그토록 다채로운 모습을 간직한 사내였다.
어찌 마냥 점잖고 정중하기만 하다고 사람을 일반화할 수 있을까. 그건 너무 단편적인 생각이었다.
‘뭐지, 정말 그런 건가? 나보고 이 팔찌라도 끼고 다니라는 뜻이야? 노리개는 내팽개쳐 둔 대신?’
맹세코 내팽개쳐 둔 적은 없는데. 고이 모셔 두고 자주 봤다고.
류하는 팔찌와 노리개를 한 손에 하나씩 쥐고 난감한 듯 번갈아 보다가, 한숨을 폭 쉬며 중얼거렸다.
“그래, 까짓것 한 번씩 하고 나가지, 뭐.”
장신구 몇 개 차고 나가는 게 뭔 대수랴. 어차피 늘 번거로울 정도로 치장해야 하는 게 후궁의 삶인데. 조금 끙끙댄 끝에 류하는 명쾌한 결론을 내렸다.
사실 온은 꽤 오해받았지만, 만약 그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굳이 연인의 오해를 정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왜 류하가 노리개를 평소에 차지 않는지 궁금하기는 했고, 팔찌를 낀 모습도 보고 싶기는 했지만, 결단코 강요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당신이 자발적으로 장신구를 착용하고 내 앞에서 뽐내 준다면 나야 나쁠 게 없지. 아름답다고 칭찬해 줄 거야. 그 칭찬에는 단 한 톨의 과장도 없으리라.
‘세상에, 사람이 그렇게 옹졸해서야 쓰나.’
멋대로 정인의 의도를 곡해한 류하는 장신구를 정리하며 혀를 찼다.
자기가 골라 준 노리개를 안 찼다는 이유만으로 삐쳐서는 나한테 팔찌를 선물한 거야? 허, 참나.
‘옹졸하고……. 귀엽고……. 사려 깊고…….’
순간 풉, 하고 웃음이 나왔다. 류하는 아까처럼 입술을 깨물어 참았다. 그러나 눈매가 반달처럼 휘고 볼이 산딸기 색으로 물드는 것은 막을 수가 없었다.
“보고 싶어.”
또다시 흘러나온 진심. 처량한 혼잣말. 사랑스러운 연인을 향한 그리움, 또한 상황에 대한 깊은 설움.
고작 그런 이유로 서운해하며 팔찌를 골랐을 온을 상상하니 베개를 팡팡 때리고 싶을 정도로 귀여웠다.
물론 이건 순전히 류하의 망상이긴 했지만, 아무도 바로잡아 줄 자가 없었기에 류하는 멋대로 좋아했다.
좋으면서도, 슬펐다. 이러한 감상을 자유롭게 전할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당장 달려 나가 삐친 애인을 달래고 팔찌도 노리개도 정녕 예쁘다고 달콤하게 속삭일 수 없는 현실이 싫었다.
미래를 기약하지 못해 현재의 조각난 하루하루를 감사히 여겨야 하는 상황이 구슬펐다.
그래도 어쨌든, 좋았다.
그래서 류하는 오늘도 울 것 같은 마음으로, 웃음을 삼켰다.
1황녀 휘선은 올해 여섯 살이었다. 6년 전 태어났다는 뜻이었다.
이는 화은이 마지막으로 회임했던 게 6년 전이라는 뜻이었고, 그사이 화은의 기억은 흐려지고 뒤섞이며 미화되기에 충분했다.
‘이번에는 제발 아들이어야 해.’
자신의 점점 불러오는 배를 매만지며 화은은 간절히 생각했다. 지금은 정치적인 이득이고 뭐고, 훨씬 원초적인 이유가 더 있었다.
‘하도 오래전에 했더니 완전히 잊고 있었네. 힘들어…….’
거듭되는 입덧에, 몸은 무겁고, 슬슬 느껴지는 태동도 죽을 맛이었다.
‘세 번째는 못 해. 안 해.’
하지만 만약 이번에도 딸이라면 자신은 기꺼이 할 것이다. 주군이자 지아비의 적장자를 생산하여 내 품에 우리의 아들을 안기 위해.
그건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었고, 화은 본인의 욕심이었다.
남편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화은은 제가 아닌 다른 여인의 태에서 나온 핏줄이 남편의 후계랍시고 설치고 다니는 꼴을 감내할 만큼 너그러운 성품이 아니었다.
아가야, 부디 아들로 태어나렴. 네가 만날 세상은 비합리적이고 불공평한지라, 사내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떠받들며 계집으로 태어나면 많은 것을 이유 없이 금하는 곳이니.
“아바마마, 보십시오. 이 물감은 색깔이 꼭 떠오르는 해님 같지 않습니까? 샛노란 색깔이 마치 해님 같습니다.”
“그래, 그렇구나. 네 말대로 해님 같아.”
화은이 처소에서 배를 다독이며 휴식할 동안 황제와 황녀는 곁에서 놀고 있었다.
여섯 살 선은 통통한 손으로 붓을 놀리며 재잘거렸고, 륜은 더없이 인자한 눈빛으로 딸을 내려다보며 실없이 장단을 맞췄다.
“아바마마, 유모가 말하길 밤에는 해님 대신 달님이 뜬다고 합니다. 그런데 저는 달님을 본 적이 없어요. 보려고 여러 번 애썼는데, 밤에는 너무 졸려서 늘 잠이 옵니다.”
“달님은 나중에 커서 보면 된단다. 원래 달님은 다 자란 어른들만 만나러 나오는 분이야. 너 같은 어린아이는 밤에 푹 자야 하거든.”
“치이, 저 어린아이 아니어요.”
꼬마 황녀가 볼을 빵빵하게 부풀리며 항의하자 륜은 맑게 폭소했다. 지켜보던 화은마저도 입꼬리를 싱긋 올렸다.
“아직 내 눈에는 어린아이인걸. 나중에 네가 네 어머니만큼 크면 어른이라고 불러 주마.”
“그래요? 어마마마, 어마마마. 저는 얼마나 더 기다려야 마마만큼 크는 겁니까?”
아빠가 자상하게 타이르자 꼬마 선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엄마에게 쪼르르 다가갔다.
엄마가 동생을 품고 있다는 걸 알기에 함부로 만지지는 않고 그저 곁에서 기웃거렸다.
“아주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겠지. 인내심이 있어야 어른이 될 수 있단다.”
“기다리는 건 잘할 수 있습니다. 정말 기다리기만 하면 어른이 될 수 있나요?”
“음, 대부분 그래.”
화은은 빙그레 웃으며 딸을 쓰다듬었다. 아이의 통통한 볼이 붉게 달아올랐다.
제게 한결같이 다정한 아버지와 달리 어머니는 보통 무심했고 어쩐지 어려웠다. 그래서 황후가 이토록 저를 기껍게 대해 줄 때면, 황녀는 기뻤다.
“전부가 아니라 대부분이라는 건, 어떤 사람은 기다려도 어른이 될 수 없다는 뜻인가요?”
“역시, 우리 딸은 똑똑하구나. 맞아, 그런 뜻이야. 어떤 사람은 아무리 기다려도 어른이 되지 않거든.”
단순히 나이가 들고 몸이 커진다고 해서 어른이 되는 건 아니지.
어떤 사람들은 시간이 흘러도 미숙하고 유치하여 다른 이들에게 피해를 주고 나이를 헛먹었다는 욕을 듣는다.
이 세상에는 그런 사람이 수두룩했다.
“하지만 너는 반드시 어른이 될 수 있어. 나보다도 더 훌륭한 어른이 될 거야.”
“아니어요, 어마마마. 마마가 저보다 훨씬 훌륭하십니다.”
꼬마는 작은 입을 열어 황송해하며 삐악거렸고, 화은은 싱긋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