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류하는 날마다 산책을 즐겼다.
실내에 가만히 앉아 있는 걸 질색하는 류하에게 산책은 가장 부담 없이 할 수 있는 운동이었고, 황궁의 후원은 몹시 넓고 아름다웠기에 볼거리가 많았다.
월국의 별궁에서는 스무 살쯤 되니 건물의 가장 작은 개구멍마저 친숙함을 넘어 지겨운 것이 돼 버렸지만, 황궁의 후궁전은 소국의 궁궐보다 훨씬 크고 화려했다.
언젠가는 여기도 내게 지루한 곳이 되려나. 그때는 또 어떤 미지의 세계를 개척해야 할까.
미래를 상상하던 류하는 우울해졌다. 애초에 상상의 여지가 별로 없다는 사실 자체가 그녀를 비참하게 만들었다.
‘어차피 나날이 똑같겠지, 뭐.’
미지의 세계는, 무슨. 황제의 후궁에게 미지의 세계가 뭐가 있겠어.
운 좋게 왕족으로 태어나 황제의 후궁으로 간택되어 일신의 편안함을 보장받은 나는, 평생 온실 속의 보기 좋은 꽃으로 가꿔지며 똑같은 매일을 살아가면 그만이지.
아직 이 세상에는 기본적인 의식주도 보장받지 못해 고통받는 사람들이 있음을 고려했을 때, 류하는 자신이 배부른 소리를 늘어놓으며 징징대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하나, 그런 결심과 별개로 그녀의 불행은 깊고 짙었다. 간절히 원하는 것들이 삶에 없었기에 그녀는 때때로 울적함을 감추지 못했다.
류하가 늘 원했던 것은, 자유. 어머니와 별궁에 갇혀 있을 때도, 월국에서 휘국으로 끌려가며 도망칠 궁리를 할 때도, 그녀는 자유를 원했다.
하고 싶은 것을 하며 먹고살 걱정을 하지 않고 연인을 마음껏 사랑할 자유를 원했다.
공생할 수 없는 소망들을 끌어안고 류하는 하루하루 시들어갔다. 그럼에도 불평하지 않으려 애썼다.
“으, 에취!”
청명한 가을 하늘 아래 류하는 돌연 재채기했다. 감기가 들려나? 햇살은 예뻤으나 바람은 쌀쌀했다.
윽, 이놈의 북방 날씨. 남쪽에서 온 공주는 부르르 떨었다.
“추우십니까?”
아니나 다를까, 그녀의 유난스러운 호위 무사가 즉시 물었다.
온은 류하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단숨에 다가와 그녀의 어깨에 여벌 외투를 둘렀다.
“음, 그렇게까지 추운 건 아닌데요.”
류하는 뒤늦게 해명했다. 그러면서도 절대 사양하지 않고 외투의 깃을 냉큼 여몄다.
온의 외투는 아니었고, 그저 류하의 궁녀들이 호위에게 맡긴 류하 본인의 외투였다.
류하는 다 알면서도 마치 온이 제 옷을 벗어 준 것처럼 들떠서 소매를 만지작댔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원래 다 이렇게 망상에 취약해지는 건가, 싶었다.
남들이 보기에는 아무것도 아니며 객관적으로 별 의미도 없는 작은 언행 하나하나가 부풀려지고 덧씌워지며 일상을 압도했다.
“추우면 이제 안으로 드시지요.”
“안 춥다니까요? 이제 괜찮아요.”
온이 류하의 건강을 걱정하여 상습적인 잔소리에 돌입하자 류하는 단호하게 끊어 냈다.
이 사내는 말이 너무 길어지기 전에 기선을 제압하는 게 상책이다. 어느덧 연인의 과잉보호를 억제하는 요령까지 터득한 류하는 내심 뿌듯해했다.
류하는 날마다 산책을 즐겼다. 산책이 가장 부담 없이 할 수 있는 운동이며 후궁전의 후원이 아름다운 까닭이기도 하나, 산책할 때마다 호위대장이 동행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렇게 하루하루 흘려보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앞날을 염려하는 건 괴롭고 무용했기에 오늘의 소박한 기쁨을 붙들고 겨우겨우 제정신을 유지하는 판이었다.
한쪽의 미래는 지나치게 확실했고, 한쪽의 미래는 과도하게 불확실했다.
류하는 후궁인 제게 주어진 몫을 너무 잘 알았다. 동시에, 온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아아, 사랑하는 이여. 나는 한 달 뒤에도, 두 달 뒤에도, 일 년 뒤에도, 십 년 뒤에도, 똑같은 곳에서 똑같은 모습으로 후원을 거닐겠죠. 뒷방 후궁 신세로, 우아하게, 얌전하게.
그대는 어떻게 될지 모르겠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황후 전하가 딸을 낳을지, 아들을 낳을지, 딸을 낳으면 어떻게 될지, 아들을 낳으면 어떻게 될지, 감히 확신할 수 없어.
언젠가 그대는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질까? 황후 전하께서 태자 아기씨를 낳게 되면, 그렇게 될까?
아니면, 언젠가 그대는 황제가 될까?
그렇다면 옛 황제의 첩실이 되어 버린 나는, 어떻게 되려나.
“슬슬 날씨가 추워지는데, 이렇게 맨날 밖에 계시다가 몸이 상하실까 두렵습니다. 마마의 고향은 훨씬 따뜻하지 않습니까.”
류하가 근심할 동안, 잔소리꾼 온은 또 꿋꿋이 종알댔다. 류하는 피식 웃었다.
아, 이 살얼음판 같은 황실에서 나를 이토록 하찮게 웃게 하는 이는 그대가 유일해.
맞다, 제하도 그러하니 그대가 유일하지는 않구나. 하지만, 이 온기는 오직 그대만이 전할 수 있어.
“내 고향이 따뜻한 걸 기억해요?”
류하는 눈웃음을 그리며 물었다.
그녀가 알기로 온은 고작 몇 주를 월국에서 보냈는데, 어찌 다 기억할까. 제 여덟 번째 형수가 될 공주를 데리러 대장군은 지난봄에 남쪽으로 내려갔다.
“당연히 기억하지요. 잊은 적 없습니다.”
온은 진지하게 답했다. 그곳에서 당신을 처음 만났으니까요. 그 짧고도 긴 여정에 관한 모든 것을 저는 하나도 빠짐없이 기억하고 있습니다.
온은 속으로만 덧붙였다. 근처에 궁인들과 다른 호위들도 있었기에 그는 평소처럼 말을 삼갔다. 답답했다. 그러나 이게 최선임을 알았다.
“영광이에요.”
어차피 소리 내어 설명하지 않아도 류하는 넉넉히 알아들었다. 그녀의 눈매가 더욱 매혹적으로 휘었다. 온은 아찔해졌다.
류하는 제 미소가 너무 노골적으로 변하기 전에 서둘러 눈을 돌려 시선을 감췄다.
타인의 눈치를 보는 건 피곤했다. 그러나 이런 순간이라도 허락받아서 감사했다.
벽에 눈과 귀가 달린 비밀 없는 황궁에서 사랑을 이어 가는 건 답답하고 피곤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것마저 포기하고 숨 막혀 죽어 가는 것보다는 이렇게라도 발버둥 치는 게 훨씬 나았다.
“마마, 외투 주머니를 확인하십시오.”
온은 어느 때보다도 목소리를 낮추고 문득 속삭였다. 언어는 혼잣말처럼 작았고 시선은 엉뚱한 곳을 향했다.
류하는 역시 그를 외면하는 척하며 방금 온이 둘러 준 외투 주머니에 슬그머니 손을 담갔다.
‘어?’
처음에는 의아함, 다음에는 호기심, 나중에는 설렘이 그녀의 폐부를 휘감았다.
야무진 손끝으로 한참을 만져 본 결과 보드라운 비단의 감촉과 다른 매끈한 표면이 느껴졌다.
‘뭐지? 노리개……. 팔찌? 이건 구슬이고.’
류하는 눈 대신 손으로 연인이 준 선물을 감상하며 그 모습을 머릿속에 그렸다.
‘뭐야, 갑자기.’
류하는 입술을 물었다. 새어 나가려는 웃음을 깨물어 삼키기 위함이었다. 깜짝 선물이라니, 귀엽잖아. 괜히 간지러웠다.
‘이거 주려고 그렇게 대기하고 있었어?’
내가 재채기를 하자마자 부리나케 외투를 둘러 주더니만, 단순히 잔소리꾼의 본능이 아니었나 봐. 선물을 전해 주고 싶었구나. 참 사랑스럽게도.
류하는 내리 입술을 꼭 물었다. 웃고 싶지 않아서, 그리고 울고 싶지도 않아서.
갑자기 웬 깜찍한 짓이냐고 너스레를 떨며 그에게 감사를 전하고 싶은데, 그럴 수 없어서.
온이 이토록 은밀한 방식으로 류하에게 팔찌를 전해 준 건 그답지 않게 낯간지러운 애정 행각인 동시에, 어쩔 수 없는 편법이었다.
시동생이 형수에게, 호위가 후궁에게 이런 종류의 선물을 주는 건 이상했다.
가족이라는 이름에 묶여 누구보다 가깝지만, 실은 누구보다 서먹해야 할 사이.
온도 이를 알고 남몰래 선물을 전해 주느라 미리 외투 주머니에 팔찌를 숨겨 두는 등, 온갖 기행을 감수했다.
류하는 선물을 기쁘게 받았다. 동시에 서글퍼졌다. 그대가 내게 당당히 장신구를 건네줬으면 좋겠다.
남들을 의식할 필요 없이 내 손목에 팔찌를 감아 주고, 잘 어울린다며 웃어 줬으면 좋겠어.
“예쁘네요. 단풍이.”
한동안 주머니 속을 조몰락대며 잠잠하던 류하가 불쑥 말했다. 온이 눈을 들었다. 류하는 그를 똑바로 보며 빙긋 웃었다.
“후원의 단풍이 참 예뻐요.”
에둘러 전한 감사에 온은 묽은 미소를 그렸다.
조금이라도 긴장을 풀었다간 바보처럼 류하를 보며 헤벌쭉 웃는 모습을 들킬까 봐, 그는 마지막까지 안면 근육을 섬세하게 조절하여 격정의 범람을 막았다.
“나중에 계절이 깊어지면 더 예뻐질 겁니다.”
나중에 손으로 말고 눈으로 확인하면 더 예쁠 거라고, 온은 팔찌를 염두에 두고 암호처럼 화답했다.
몇 번 만져 보기만 하고 예쁜 선물을 받았다며 좋아하는 류하가 사랑스러우면서도 애달팠다.
남들의 시선 따위 가뿐히 무시하며 그녀에게 떳떳이 선물을 전해 주고 싶은 마음은 그도 마찬가지였다.
나중에, 당신이 궁인들의 눈을 벗어나 혼자 남게 되면 주머니에서 팔찌를 꺼내 더 자세히 봐줘. 당신이 현재 만져 보고 상상한 것보다 훨씬 고왔으면 좋겠어.
“아마 그러겠죠. 그대가 그리 말한다면 그럴 거예요.”
류하는 활짝 웃으며 화답했다. 아, 위험해. 온은 잠시 눈을 감고 싶었다.
당신이 무방비 상태의 나를 보며 그런 식으로 웃으면 나는 때와 장소를 잊고 당신을 끌어안고 싶어진다는 사실을 당신이 알았으면 좋겠어.
당신은 존재 자체만으로 내게 유혹이기에, 부디 미소 하나라도 조금씩 더 아껴 써 줬으면 좋겠어.
“너무 기대하지는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기대가 과하면 실망도 큰 법이니까요.”
온은 뒤늦게 머쓱하게 덧붙였다. 팔찌를 단풍에 빗대어 예쁘다고 실컷 칭찬했는데 막상 나중에 확인해 보니 류하의 눈에 그 정도는 아니라면, 자신이 몹시 시무룩해질 것 같았다.
“실망하지 않아요.”
류하는 부드럽게 달랬다. 온은 용기 내어 그녀와 눈을 맞췄다. 그녀는 여전히 방싯대는 낯이었다. 선물을 받으셔서 어지간히 좋으신가 보다.
온은 뿌듯해하고 싶었다. 그러나 온전히 기뻐하기에는 류하의 웃음에 걸린 그늘의 흔적이 마음에 걸렸다.
당신은 분명, 선녀처럼 해사하게 나를 보며 웃고 있다. 얼핏 보면 그저 선물을 받고 들뜬 이의 미소처럼 보이지. 그러나, 조금 더 파고드니 물밑의 절박함이 보여.
억지로라도 그리 웃지 않으면 당장 눈물이 터질 것 같은 사람처럼, 당신은 버티고 있어.
온은 서글퍼졌다. 당신도 나처럼 아쉬움이 가득하구나.
“실망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온은 진중하게 타일렀다. 비애를 참으며 애쓰는 연인을 위해 그도 마주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