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가윤을 팔아넘기고 싶지 않았다. 무난하게 태자비가 되어 나중에는 황후가 되고 여생을 풍족하고 편안하게 살았어야 할 그녀의 처참한 몰락이 안타까웠다.
자신이 무사히 황제가 되었더라면 일어나지 않았을 몰락이기에, 온은 어느 정도 책임감을 느꼈다. 되도록 가윤을 보호하고 싶었다. 그녀가 그녀의 가족과 달리 천수를 누릴 수 있도록.
그런데, 가윤이 먼저 접근했다. 화은의 회임 사실이 공표된 이후, 안 그래도 입지가 위태로워 나날이 숨죽이고 사는 그에게.
모르고 했을까? 아니. 온이 기억하는 단씨 집안의 맏딸은 자신이 저지른 일의 정치적 함의를 깨닫지 못하기엔 너무 영특했고, 무엇보다 그만큼 순진할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가윤은 어째서 제게 연락했을까. 만약 들킨다면 본인뿐 아니라 온까지 죄인으로 몰려 궁에 한바탕 피바람이 불 것을 뻔히 알면서도.
첫 번째 가설은, 모종의 이유로 가윤이 그만큼 절박하다는 뜻이었고. 두 번째 가설은, 피바람이 오히려 그녀가 원하는 바라는 뜻이었다.
이건 혹시, 함정이 아닐까. 내가 역적의 딸과 내통하는 모습을 연출해 나를 궁지에 빠트리려는 누군가의 계획이지 않을까.
그렇다면 누구지? 호시탐탐 나의 실권을 노리는 황후? 아니야, 가윤 낭자가 그분과 손잡았을 리가 없지.
만약 화은이 가윤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면 동맹은커녕 진즉 죽여 버렸을 것이다. 아니면 최소한 륜에게 알렸거나.
<뭐라고요?>
그러나 륜은 정녕 놀라는 투였다. 웬만하면 그에게 절대 비밀을 만들지 않는 화은조차 그 사실을 여태 몰랐다는 뜻이었다.
<제가 받은 문제의 쪽지입니다. 살펴보십시오.>
온은 침착하게 쪽지를 내밀었다. 그러면서 속으로 그는 가윤에게 거듭 사죄했다.
아아, 용서하지 마십시오. 나는 그대의 가족을 지키는 데 실패했으며, 지금 그대의 목숨 또한 사지로 내모는 중입니다.
그러게, 왜 내게 접근했나요. 왜 죽은 듯이 지나치지 않았나요. 왜 다시 내 기구한 삶과 기어코 엮이고 말았나요. 왜, 대체 왜.
<……배꽃.>
쪽지를 읽은 륜이 중얼거렸다. 그도 선황 시절 단씨 집안이 황실에 배꽃 차를 진상했던 것을 기억했다.
<아우님께 도움을 청하는 내용이군요.>
륜이 지적했다. 온은 잠잠했다. 륜의 눈빛에 어느새 놀라움이 가시고 싸늘한 경계가 자리 잡았다.
<이걸 내게 가져온 이유가 뭐죠?>
명백하게 시험하는 질문이었다. 온은 신중하게 숨을 골랐다.
지난여름, 형이 공개적으로 황태자 책봉 의지를 밝힌 이후로 형제의 원래도 묘하던 관계는 더욱 껄끄러웠다. 온은 살얼음판을 걷는 느낌으로 해명했다.
<단가윤이 정말 순수하게 제 도움이 필요해서 제게 이런 쪽지를 전한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분명 어떤 계략이 있을 겁니다. 저를 그 계략을 파헤치기 위한 미끼로 써 주십시오.>
륜은 단번에 이해했다.
누군가 가윤을 앞세워 온에게 접근하는 거라면, 륜은 역으로 온을 내세워 그들과 순순히 접촉하는 척하며 그들의 의도를 캐내면 된다.
<이 쪽지의 부름에 응하겠다는 겁니까?>
<폐하께서 원하신다면요.>
륜이 날카롭게 질문하자 온이 진중하게 대답했다. 황제는 동생을 탐색하듯 쳐다보았다. 온은 눈을 피하지 않고 묵묵히 맞바라보았다.
<단가윤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지난여름에 알아냈다고 했죠.>
륜이 불쑥 물었다. 온은 올 게 왔구나, 하고 공손하게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폐하.>
<그때는 불충을 무릅쓰고 내게 사실을 숨겼으면서, 이제 와서 털어놓는 저의가 뭐죠?>
륜의 질문은 온의 정곡을 송곳처럼 파고들었다. 온은 움찔하지도 않고 대답했다.
<그때는 어리석은 마음에 그자를 향한 연민이 들었습니다. 그자가 자객들과 한패라고 판단했다면 기꺼이 말씀드렸겠지만, 그자와 도깨비는 저와 월빈마마를 지킨 쪽이었습니다. 위험인물이라는 근거가 부족해서 아뢰지 않았습니다. 송구합니다.>
글쎄, 송구하다는 말로는 부족한 상황인 것 같은데. 륜의 눈매가 위험하게 좁아졌다.
온은 시선에서 한기를 뚝뚝 흘리는 형을 보며 주눅 들지 않고 부연했다.
<만약 계속해서 아무 일도 없었다면 폐하께 끝까지 함구했을 겁니다. 이제는 그자가 어떤 불순한 이유를 갖고 제게 접근했는지 모르는 상황이니, 위험인물이 아니라는 판단은 부적절하다고 생각하여 이렇게 고합니다.>
직후, 온은 고개를 조아렸다. 그가 바닥을 보며 정갈하게 청했다.
<무슨 벌이든 달게 받겠습니다. 폐하를 기만한 것에 대해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하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제게 아직 쓸모가 남았다면 이를 증명하게 해 주십시오. 정말로 쪽지의 발신자가 단가윤이 맞다면, 도대체 어떤 속셈이며 누가 그자와 뜻을 함께하는지 알아보고 싶습니다.>
이번 일을 핑계 삼아 형님께서 내 목을 칠까? 아니면 수도에서 영영 쫓아낼까.
이유와 상황이 뭐였든 간에 온이 고의로 황제를 속이고 계속 속일 예정이었다는 사실은 변함없었다. 게다가 그는 자신의 죄를 방금 자백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만약 황후가 회임하지 않았다면, 또는 황제께서 황후의 아들을 태자로 삼겠다고 선포하지 않았다면. 내가 과연 이렇게 조급하고 절박하게 나왔을까.
<……처음에는 단가윤의 생존을 숨겨 줄 정도로 마음에 연민이 있었으면서. 이제는 그자를 이용할 생각으로 내게 왔어요?>
륜은 알 수 없는 눈빛으로 물었다. 그래서 온도 그저 덤덤히 대답했다.
<제 죄를 뉘우쳤을 뿐입니다.>
당신이 황후 전하의 편을 들어주며 나를 내치기로 정하셨으니, 이렇게라도 나올 수밖에요.
<폐하. 이번 일을 무사히 성사하여 제가 폐하를 향한 충정을 입증하고 나면, 그 대가로 작은 상을 청해도 되겠습니까?>
온은 먼저 당돌하게 여쭈었다. 륜은 흥미와 경계를 동시에 느끼며 되물었다.
<어떤 청인데요?>
온은 곧장 설명했다. 륜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한동안, 형제 사이에는 침묵뿐이었다.
그게 며칠 전이었다. 온이 가윤의 쪽지를 받고 마음을 굳힌 날. 가윤을 오롯이 저버린 날. 본인의 소망을 위해 그녀의 안전을 철저히 짓밟기로 한 날.
온은 가윤을 떠보기 위해 그녀를 만났다. 그녀가 정말 순수한 의도 따위로 제게 접근했을 리는 없다고 굳게 믿었다.
누군가 그녀와 함께 움직이고 있다. 아니면 그녀를 그저 장기짝처럼 쓰고 있거나.
어쨌든, 약재가 필요하다는 그녀의 말은 핑계고 그저 그녀가 그와 접촉할 기회를 찾고 있었다고 그는 짐작했다.
‘왜?’
온의 주요 의문이었다. 가윤을 만나고 폐가를 벗어나 환궁하는 길에 그는 고민했다.
‘가윤 낭자는 자신이 수도에 있어 봤자 위험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 누군가 자기 얼굴을 알아보면 큰일 나잖아. 그 위험을 무릅쓰고 굳이 여름에도, 지금도 내게 모습을 드러냈어. 왜?’
가족을 잃고 도주한 가윤 낭자. 내 형님께 원한이 가득할 가윤 낭자. 왜, 수도로 돌아와 내게 친한 척하는 걸까. 목적이 뭐지?
‘그 도깨비는 또 뭐고.’
죽었다고 알려진 옛 약혼녀 후보가 제게 다가온 것도 당혹스러워 미치겠는데, 왜 그 사람 곁에는 하필 또 전설의 이종족이 활보하냐고.
‘그리고 그때 왜 나랑 월빈마마를 구했지?’
정확히 말하자면 그 도깨비가 자객의 머리를 내리쳐 온을 구했지만, 도깨비와 가윤이 일행으로 보였다는 사실을 고려했을 때 그날 가윤도 그의 안전을 바랐다고 추측하기에 충분했다.
온의 추리는 점점 더 미궁에 빠졌다. 가윤 낭자는 이제 나를 미워하는 거 아니었나? 나는 이제 형님의 충신이니까.
그런데 왜 그날 나를 구했어? 설마, 충동적으로? 그게 말이 돼? 그 도깨비는 뭔데? 그리고 왜 이제는 위험을 무릅쓰고 나를 만나려고 해?
명료한 게 하나도 없었다. 가윤이 정말로 순수하게 약재가 필요한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 순진한 생각을 비웃다가도 결국 대안이 없어 헤맸고, 온은 답답한 마음에 이를 악물었다.
‘가장 확실한 방법은, 역시…….’
가윤을 체포하고 심문하여 속내를 캐내는 것.
온은 이를 위해 가윤과 다음 약속을 잡았다. 이레 뒤에 그녀를 다시 만나는 건, 그녀를 붙잡기 위함이었다.
‘……부디 용서하지 마세요.’
미안해. 그대가 순수한 마음으로 내게 매달렸든 역심을 품고 내게 접근했든, 나는 그대를 배신했어.
미안해. 정말 미안해. 하지만 나는 끝까지 형님의 충신이어야 해. 그 대가로 그분께 받아 내야 할 게 있거든.
온은 참담한 기분으로 길을 걸었다. 그러다 며칠 전, 제 어머니의 선물을 골라 준 방물장수를 발견했다.
“어이, 총각. 또 왔소?”
노인은 친근하게 인사했다. 온은 예의 바르게 미소 지었다. 그는 그대로 묵례와 더불어 지나치려다가, 무언가를 떠올리고 멈칫했다.
온은 짧은 고민 끝에 방향을 틀어 방물장수에게 다가갔다. 그가 공손히 가리켰다.
“이걸 아직도 파시는군요.”
그가 지목한 물건은 붉은 비단실로 엮어 금색 구슬로 장식한 팔찌로, 며칠 전 그가 어머니의 선물을 고를 때 눈여겨봤던 장신구였다.
“워낙 인기가 많은 물건이라 여러 개 만들어 놨소. 딱 봐도 예쁘잖아요. 기품도 있고.”
방물장수의 설명에 온은 잠자코 동의했다.
팔찌는 아기자기하되 너무 유치하지는 않고, 화려함보다는 은은한 매력을 뽐내면서도 결코 수수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팔찌를 보며 그는 또다시 류하를 떠올렸다. 내가 골라 준 푸른색 노리개를 잘 달고 다니지 않는 당신. 만약 이 팔찌를 사 드리면, 당신은 좋아할까.
아니야. 내가 뭐라고 당신께 팔찌를 사 드리겠어. 당당히 좋아한다고 고백도 못 하는 처지에.
하지만, 그래도, 나는.
“하나에 얼마죠?”
온은 순순히 돈주머니를 꺼냈다. 방물장수가 옅게 웃었다.
“역시, 총각도 보는 눈이 있구먼.”
이후, 방물장수는 총각한텐 특별히 싸게 해 주겠다며 매우 저렴한 가격을 불렀다.
고지식하고 정직한 온은 극구 사양하며 끊임없이 정가를 물었고, 방물장수는 끝내 패배를 인정하며 팔찌의 실제 가격을 밝혔다.
“총각도 참, 희한한 사람이요. 싸게 주겠다면 그냥 싸게 가져갈 것이지.”
방물장수는 툴툴대면서도 성실하게 돈을 챙겼고, 온은 상인을 보며 옅게 웃었다.
“마음만 잘 받아 두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어르신.”
온은 천에 싸여 잘 포장된 팔찌를 품에 고이 집어넣었다. 그는 방물장수에게 예의 바르게 인사한 뒤, 뒤돌아 원래 갈 길을 나섰다.
다른 많은 걸 떠나서, 사랑하는 사람에게 돌아가는 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