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설령 그렇다 해도,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어.’
가윤은 마음을 추슬렀다. 이제 와서 발을 빼기에는 너무 늦었다. 어차피 지금 그녀의 위기감은 아직 가설에 불과할 뿐, 확신이 아니었다.
게다가 가설이든 확신이든, 그녀의 행동 방침은 똑같았다.
‘함정이 아닐 수도 있어. 섣부른 판단일지도 몰라. 그리고 설령 함정이라 한들, 나 때문에 계획을 그르치는 일은 없을 거야.’
왜냐하면, 나는 꼬리가 밟혔다는 확신이 드는 순간 곧바로 자결해 입을 봉할 거니까.
그렇게 되새기자 마음이 편해졌다. 나날이 더욱 짙어지는 죽음에 대한 공포와 별개로.
필요하다면 목숨까지 바치겠다는 신념에 변함은 없었다. 하지만 요즘은, 예전보다 죽기 싫었다.
“어떻게, 언제 전달해 드리면 되죠?”
온이 속삭였다. 이때 그의 눈빛에는 고통이 넘실댔다. 가윤은 그 고통을 보고 주저했다. 저건 연기일까, 진심일까. 마음은 자꾸 한쪽으로 기울었다.
결코 억지로 꾸며낸 고통이 아니었다. 온이 실제로 느끼는 죄책감과 갈등은 상대방을 흔들기에 충분했다.
진심에 기반을 둔 탓에 더욱 그럴싸한 덫이었다. 하여, 훨씬 치명적이었다.
‘부디 용서하지 마세요.’
온은 속으로만 사죄했다. 겉으로 그는 죽은 역적의 딸을 돕는 그녀의 옛 정혼자 연기를 훌륭히 해냈다.
“이곳에서 저와 다시 만나 주실 수 있습니까? 시기는 최대한 빨리, 당신이 정하는 때로 하겠습니다.”
가윤은 신중하게 답했다. 의복과 살가죽 아래 감춰진 심장이 쿵쿵 뛰었다.
정해진 장소, 정해진 때에 온이 다시 나아와 묶이고 추궁당하고 짓밟히는 모습을 상상했다.
지금 제 목을 옥죄는 묵묵한 격정이 희열인지 절망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럼 이레 뒤에 다시 뵙죠. 너무 늦습니까?”
온이 제안했다. 가윤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도움받는 입장에선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장소는 역당의 폐가, 날짜는 이레 뒤.
그때까지 어떻게든 황후 측에 정보를 흘려서 대장군을 의심받게 만들고, 체포되게 만들고, 황제에게 아예 버림받게 만들어야 한다.
설령 이번 한 번만 더 그가 기적적으로 빠져나간다 해도, 아직 기회는 있었다.
이미 여러 번 아슬아슬하게 죽음을 스쳐 간 그의 절박함을 믿고 그에게 손을 내밀자.
그와 손잡는 척하고 황후와 황후 태중의 아기를 해코지한 뒤, 그마저도 버려 버리자.
그러면 황제는 든든한 아군인 아내도, 황태제 후보였던 동생도, 후계가 될 뻔했던 자식도 전부 잃은 뒤, 우리의 먹잇감이 되리라.
이게 현재 반정 세력이 세운 계획의 골자였고, 이를 성사하기 위해서는 가윤이 미끼 몫을 해야 했다. 또한, 대장군이 순순히 응해 줘야 했다.
가윤은 주저 없이 자신의 역할을 해냈고 대장군도 의외로 고분고분 걸려들었다.
계획을 처음 제안하며 큰소리치긴 했지만, 그래도 속으로는 나름 반신반의하던 가윤은 이 순조로운 흐름에 내심 놀랐다.
순조로워 더욱 불안했다.
그러나 그저 막연한 불안감만으로 포기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낮에 찾아오겠습니다. 밤에 함부로 출궁하면 의심받을 수 있거든요.”
온이 부드럽게 말했다. 가윤은 마른침을 삼켰다. 그녀는 그를 보며 마지막 기로를 가늠했다.
이게 과연 옳은 일일까?
……옳든 그르든 상관없어.
“직접 나오시는 겁니까? 대장군님께서요?”
고민을 치워 버린 뒤, 가윤이 속삭였다. 온이 끄덕였다.
“다른 이에게 맡길 만한 일이 아닙니다.”
그건 그렇지. 말이 적게 새어 나갈수록 좋았다.
“그럼, 기다리겠습니다.”
가윤은 약속했다. 당신의 죽음을, 최후를.
“꼭 다시 오겠습니다.”
온도 약속했다. 그가 가윤의 소매 끝을 조심스레 붙잡았다. 가윤이 흠칫했다. 온은 깊고 짙은 눈으로 그녀를 보며 탁하게 속삭였다.
“그대가 살아 있어서 다행입니다. 정말로요.”
가윤은 도저히 적절한 답변을 찾지 못했다. 온은 가윤의 소매를 놓아주었다. 그가 덧붙였다.
“정확한 시간을 정하죠.”
“아아, 네.”
“그날도 그대가 직접 와서 내게 물건을 받아 가는 겁니까?”
“물론입니다.”
가윤이 끄덕였다. 온이 확실하게 반역죄로 몰리기 위해선 죽었다고 알려진 역적의 딸과 내통하는 모습을 군졸들에게 보여야 했다. 찰나의 목격만으로도 충분하리라.
물론, 가윤의 입장에서는 위험천만한 계획이었다.
군졸들에게 모습을 보인 다음 곧바로 도망칠 수 있도록 당연히 도주로는 확보해 놨지만, 여전히 위태로운 도박이었다.
주안은 이를 알고 극구 반대했다. 그러나 가윤이 고집했고, 주안은 가윤을 상대로 이겨 본 적이 거의 없기에 이번에도 패배했다.
“그럼 그날을 기다리겠습니다. 부디 그때까지 무사해야 해요.”
온은 간절히 청했고, 가윤은 다시 주저했다.
저게 역으로 함정을 파기 위한 고도의 전략인지, 아니면 그의 진솔한 죄책감인지 확신하기 어려웠다. 그리고 만약, 후자라면.
‘……아니야. 흔들리지 마, 단가윤.’
이미 내 삶의 목표는 정해졌어. 가족의 원수인 휘륜을 죽일 거야. 이를 위해 그의 충신인 휘온도 죽일 거야.
나로 인해 아파하는 듯한 저 눈빛 때문에 흔들리면 안 돼.
“대장군님께서도 부디 무탈하십시오.”
가윤은 거짓으로 빌어 주었다. 거짓이어야만 했다. 이미 버리기로 결심한 사람이니, 찰나의 옛정에 휩쓸려 물러질 때가 아니었다.
두 사람은 정확한 시간을 정했고, 간결한 작별 인사 끝에 헤어졌다.
가윤은 폐가를 벗어나며 외투의 두건을 올려 얼굴을 가렸다. 북쪽의 가을바람이 빈틈으로 스며들어 살갗을 차게 식혔다.
“가윤.”
주안이었다. 가윤은 목소리부터 알아보고 반색하며 두건을 내렸다.
주안은 연인을 보고도 웃지 않았다. 다만 굳은 낯으로 팔을 뻗어 가윤을 품으로 끌어당겼다.
“주안 님.”
그의 절박한 포옹을 느끼며 그녀가 중얼거렸다. 폐가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골목길에서 주안은 가윤을 안은 채 잠시 조용했다.
“나는, 지금이라도 너랑 같이 도망치고 싶어.”
주안은 갈라진 음성으로 고백했다. 간신히 억눌린 뜨거운 감정이 파란 눈에 불꽃처럼 넘실댔다. 가윤은 그를 진지하게 올려다보았다.
“아직은 안 됩니다.”
가윤이 고개를 저었다. 주안의 눈에 담긴 불꽃이 더 거세졌다. 그는 쌕쌕대는 호흡을 깨물어 삼키다가, 가윤의 뺨을 싸쥐고 그녀의 입술도 삼켰다.
“으음…….”
그녀가 먼저 신음했다. 이곳이 아무도 다니지 않는 뒷길임을 믿고 주안의 허리를 꽉 안아 당기며 갈급하게 그의 체열을 마셨다.
“나는 네가 위험해지는 게 싫어. 불안해.”
주안은 거칠게 애원했다. 가윤은 대답을 보류하며 그의 뺨에 입을 맞췄다. 그의 볼에 촉촉한 자국이 남았다.
“불안해하지 마십시오. 다 잘 끝날 겁니다.”
그녀는 굳게 약속했다. 정작 자신은 상대방 때문에 얼마나 나날이 불안한지 솔직하게 털어놓지 않았다. 대신 연인의 턱을 가볍게 쥐고 제게로 끌어 눈을 맞췄다.
“다 끝나고 나면 우리 같이 떠나요, 주안 님.”
예전에는 죽음이 두렵지 않았어. 다 잘 끝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품고도 마냥 의연했어.
소중한 가족과 유복한 생활을 잃고 혼자 남은 내게 더는 삶의 의미가 없었으니까.
비참하게 실패하여 형틀에서 스러진다 해도 미련은 없을 줄 알았어.
그런데, 이제는 두려워. 죽고 싶지 않아. 실패는 정말 싫어. 죽음에 대한 공포가 나날이 짙어져. 끝이 오지 않았으면 좋겠어.
당신이 나의 미련이 되었어. 당신 때문에 나는 겁쟁이가 되어, 혹시라도 반정이 실패하고 나는 때 이른 죽임을 당할까 불안해.
“그래, 같이 떠나자.”
주안은 절박하게 다짐했다. 이어서 다시 연인에게 입을 맞췄다. 이 또한 절박하게, 내일을 기대하지 않는 사람처럼.
주안에게 안겨 그와 숨을 섞으며 가윤은 속으로 절박하게 빌었다. 부디, 북쪽 땅의 신이시여, 굽어살피소서.
내게서 이미 가족을 앗아가셨으니, 이자는 거두지 마세요. 내 곁에 끝까지 남겨 두세요. 우리가 시간의 어긋남에 따라 필연적으로 헤어져야 하는 날까지.
살생을 저지르고 망자를 모욕한 죄는 그의 몫까지 내가 전부 가져갈 터이나, 부디 그 죗값을 이별의 형태로 내리지 마소서.
신앙심 없이 신의 존재만 인정하는 가윤의 간절한 기도였다. 과연 그게 하늘에까지 닿았을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가윤과 갈라선 온은 며칠 전과 똑같은 길을 걸어 궐문으로 향했다. 그의 머릿속은 두 사람의 얼굴이 엇갈려 떠오르는 바람에 혼란스러웠다.
<오랜만입니다, 아우님. 해야 할 말이 뭐죠?>
며칠 전, 가윤이 보낸 걸로 추정된 쪽지를 받은 바로 당일에 온은 륜에게 알현을 청했다.
륜은 여전히 단둘이 있을 때는 동생에게 말을 높였다. 온은 그게 참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폐하, 단씨 집안을 기억하십니까?>
온은 륜을 보며 단도직입으로 물었다. 륜의 얼굴이 삽시간에 굳었다. 의외로 너무 격한 반응이라 온은 도리어 주춤했다.
항상 냉혹하거나 다정하거나 능글맞기만 한 륜의 눈에 그때는 다소 생경한 색채가 담겼다.
공포. 두려움 같아 보였다. 또는 노골적인 죄책감. 륜은 온이 단씨 집안을 언급하자마자 그런 눈빛으로 바뀌었다. 온은 내심 당황했다.
<당연히 기억하지요.>
륜은 뚝뚝하게 대답했다. 온은 말을 잇기 전에 주춤했다.
내가 실수했나? 과연 내가 내린 선택이 옳은 선택인가? 옳고 그름을 가릴 수가 없다면, 적어도 총명한 선택이기는 한지 알고 싶었다.
<그 집안이 왜요? 왜 갑자기 그런 걸 묻죠?>
륜은 억눌린 저음으로 되물었고, 온은 오래 망설일 수 없었다. 황제가 제게 질문했는데 길게 침묵하는 것 역시 불충이었다.
<그 집안의 장녀가 살아 있습니다.>
배신이었다. 이미 자기와 엮여 온 가족과 삶을 송두리째 빼앗긴 여인에 대한 배신.
<지난여름에 그자의 생존을 확인했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길거리에서 어떤 아이가 제게 이런 쪽지를 남기고 갔습니다.>
지난여름 미지의 자객들이 자신과 류하를 위협했을 때, 온은 자신이 도깨비를 만났다는 사실은 아뢰면서도 가윤에 관한 내용은 의도적으로 생략했다.
한때 자신의 신부가 될 뻔했던 자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 배려, 속죄였다.
만약 가윤이 끝까지 조용히 지내며 온과 다시는 스치지 않았다면, 온도 절대 굳이 나서서 황제에게 그녀의 생존 사실을 고자질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가윤은 기어코 그에게 접근했고, 그는 심장이 조각나는 듯한 아픔 속에서 고민하다가 결국 한쪽을 배신하기로 결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