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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궁의 은밀한 연서 (80)화 (80/123)

80화

어디서 기다리겠다는 내용은 없었다. 그러나 글머리에 배꽃이 언급됐으니, 짐작할 근거는 충분했다.

온은 굳은 낯으로 쪽지를 바라보았다. 선택의 갈림길이 그를 다그쳤다.

네 형은 이미 선택을 마쳤으니 너 또한 그래야 한다고, 알 수 없는 목소리가 귓가에 속삭였다.

온은 한참을 망설였고, 숙고했고, 괴로워했다. 이후, 일단 궁으로 복귀했다.

며칠 뒤, 그는 다시 출궁했다. 무거운 결심을 안고.

<태자 전하, 말린 배꽃을 우린 차입니다.>

<어디서 진상한 거지?>

<단씨 가문에서 바쳤습니다.>

<간택을 앞두고 따로 진상품을 올리다니, 별로 현명한 일은 아닌데.>

열일곱 살 황태자는 못마땅한 듯 눈살을 찌푸렸다. 당시 온은 당연히 훨씬 앳된 얼굴이었다.

<어차피 매년 이맘때쯤 꾸준히 올리던 것이니, 올해도 받는다 한들 이상할 게 없다고 폐하께서 분부하셨나이다.>

내관이 공손히 아뢰자 태자는 잠시 침묵했다. 그러다 결국 상황을 받아들이고 표정을 온순하게 풀었다.

<그래, 폐하께서 말씀하셨다면 내가 거부할 이유는 없지.>

사실, 어린 온은 단씨 가문에서 줄곤 황실에 진상한 배꽃 차를 예로부터 즐겨 마셨다.

그 집은 마당에 탐스러운 배나무가 여러 그루 있어서 가문의 자랑으로 여겼다.

온은 부친이 자신과 단씨 가문의 맏딸을 부부로 맺어 주기 원하시는 걸 뻔히 알고 있었다.

그래도 아직 공식 간택 절차가 남았으니, 폐하께서 너무 티를 내지 않으셨으면 했다. 올곧은 태자는 원칙을 준수했다.

간택을 코앞에 둔 그때 유력한 후보자 가문이 황실에 찻잎을 선물하는 모습을 보여 봤자 뇌물을 바치는 것처럼 보이기나 하고, 별로 안 좋을 텐데.

당시에 그런 걱정을 했던 것 같다. 그러면서도 온은 고분고분 차를 마셨고, 언제나처럼 향기롭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몇 주 뒤, 정말 고작 몇 주 뒤에, 아비가 죽었다. 형제의 손에.

단씨 가문 사람들에게 사형이 내려졌다. 가주의 큰딸은 도망쳤다가 나중에 죽은 채로 발견됐다고 한다.

온은 그들의 죽음을 제대로 슬퍼할 겨를도 없이 숨 가쁘게 전쟁터에 떠밀렸고, 겨우 살아 돌아온 뒤에야 그들의 최후를 죄책감으로 품었다.

그런데, 가윤 낭자라니. 얼마 전 그런 식으로 재회하고, 이제 와서 그런 쪽지라니.

‘굳이 처음에 배꽃 차를 언급한 걸 보면, 아마 여기일 거야.’

폐가 앞에 도착한 온은 빛바랜 대문을 음침하게 바라보았다. 집주인이 역적으로 낙인찍혀 몰락한 뒤로 망가진 모습 그대로 방치된 저택이었다.

‘……함정일지도 몰라.’

처음부터 내린 당연한 결론이었다.

어딘가에 아직 살아 있는 가윤 낭자가 마치 도움을 요청한 것처럼 꾸미고, 온이 책임감을 이기지 못해 도우러 가면 그때 군졸들이 튀어나와 그를 붙잡을 수도 있겠지.

온 대장군이 감히 역적의 딸과 내통하여 폐하를 해치려 했다고 그럴싸한 누명을 씌우며.

‘그래도, 안전장치는 이미 마련했어.’

물론, 함정일 수도 있다는 걸 뻔히 알면서 무작정 응할 생각은 없었다. 온은 고지식할 뿐, 아둔하지는 않았다. 당연히 대책 정도는 마련하고 오늘 이곳에 나아왔다.

‘그냥 안전장치 정도가 아니라, 이건…….’

배신이지. 온은 고통을 삼켰다.

나는 분명 고지식한 사람인데, 때로는 어찌 이런 교활한 짓을 할까.

군자가 되어야 한다고 배웠거늘, 때때로 나는 사람들에게 폭군보다 못한 상처를 준다.

그는 심호흡으로 마음을 다잡은 뒤 조금 더 걸어갔다. 더는 아무도 접근하지 않는 폐가라 한들, 당당하게 대문을 통해 들어가는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어차피 온이 짐작한 만남의 장소는 대문보다 쪽문에 더 가까웠다. 예전에 이 집에 몇 번 드나들며 기본적인 지리를 익힐 기회가 있었다.

이 집에서 그대를 만났지. 가윤 낭자, 조금 수줍어하면서도 기죽지 않고 기품 있게 내게 인사하던 그대를.

그대의 그 고아한 자태를 보고 다른 사람들도 말했어. 아, 분명 그대는 제국의 태자비가 되기에 부족함이 없는 인재라고. 언젠가 분명, 위대한 황후가 될 거라고.

황제와 황후. 그게 우리에게 주어진 미래였어.

‘이쯤인가?’

온은 다시 멈춰서 담장의 위치와 높이를 가늠했다.

판단을 마치고 나자 실천은 빨랐다. 그는 땅을 딛고 단숨에 뛰어 그리 낮지 않은 담을 가뿐히 넘었다.

월담한 그는 오래 걸을 필요가 없었다. 역시. 저곳에 배나무가 보였다.

가을철이라 꽃이 전부 진 것일까. 아니면, 나무도 이제 주인 잃은 집을 닮아 삭막하게 생명을 잃어간 것일까. 생기 잃은 나무껍질은 멀리서 보기에도 퍼석해 보였다.

온은 배나무를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그때, 흐릿한 목소리를 들었다.

“대장군님.”

온은 우뚝 멈췄다. 그는 눈을 질끈 감을 여유도 없이 천천히, 천천히 돌아보았다.

먼발치에서 조심스레 걸어오는 늘씬한 여인의 윤곽이 보였다.

“호칭을 고쳤군요.”

첫인사였다. 온의 목소리는 탁하게 쥐어 짜여 나왔다.

“시간이 흘렀으니까요.”

가윤이 담백하게 속삭였다. 그녀는 온에게 천천히 걸어와 그의 앞에 섰다.

팔을 뻗으면 닿을 거리였다. 동시에, 아무도 먼저 다가가지 않는다면 절대 좁혀지지 않을 거리이기도 했다.

가윤은 온을 보았고, 온은 가윤을 보았다. 이윽고 가윤이 몸을 낮췄다.

“대장군님, 부디 도와주십시오. 염치 불고하고 부탁드립니다.”

가윤은 자신의 맹세를 지키는 중이었다. 이를 위해 그녀는 무릎을 꿇었다.

그녀는 가족의 원수를 갚기 위해 휘결을 따르기로 했고, 그녀 스스로 휘결에게 다짐했다. 대장군을 위한 덫을 놓아 그를 파멸시키고, 이를 통해 황후까지 쓰러트리겠다고.

“어떤 도움이 필요한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그대를 도울 여력이나 되겠습니까?”

온은 씁쓸하게 되물었고, 이어서 한숨지었다. 그가 조금 부드럽게 타일렀다.

“일어나세요. 이런 식으로 빌 필요 없습니다. 그리고 아무래도 불안하니까, 우선 안으로 들어가죠.”

가윤이 몸을 일으켰다. 상대방이 태자라는 이유로 다소곳이 시선을 내리깔던 옛날과 달리 지금 그녀는 고개를 들어 온과 곧게 눈을 맞췄다. 온은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가윤이 손짓하며 돌아섰다. 온은 묵묵히 뒤따랐다. 여전히 팔을 뻗으면 닿을 거리, 제게 무방비한 뒷모습을 보인 채 걸어가는 가윤을 보며 그는 수천 가지 의문을 곱씹었다.

‘역시, 함정인 건가?’

믿는 구석이 있기에 이토록 담대한 걸까. 아니면 온이 자신을 해치지 않을 거라고 모종의 근거로 굳게 확신하는 걸까. 그렇다면, 그 근거는 대체 무엇일까.

지금 그는 황제의 신하였고, 그녀는 그 황제로 인해 가족을 잃고 현재 죽었다고 알려진 몸이었다. 서로 전혀 신뢰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그에게 등을 보였다.

“들어오십시오.”

그녀가 문을 열었다. 온은 잔뜩 긴장한 상태로 입장했다. 과거에 창고로 쓰였던 공간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여전히 경계하며 둘러보았다.

“이곳엔 우리 둘뿐입니다. 당신을 속인 것이 아니니, 부디 안심하십시오.”

가윤은 나직이 당부했다. 온은 그늘진 구석을 살피는 걸 그치고 다시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를 파고드는 그녀의 눈빛은 간절했고, 무척이나 조심스러웠다.

“당신이 당장 저를 여기서 체포해도 저는 저항하지 않겠습니다. 글을 통해 말씀드렸듯, 목숨을 내놓을 각오로 도움을 청하고자 합니다.”

“그러니까, 대체 어떤 도움이 필요한데요?”

“약재가 필요합니다. 제게 생명의 은인이 있는데, 지금 그분이 심히 편찮으십니다. 숨어 사는 제가 쉽게 구할 수 없는 약재라 당신께 연락하게 되었습니다. 생각나는 분이 당신밖에 없었습니다.”

“내가 그대의 기억에 그토록 선명한 인상을 남겼었나요? 그대와 그대의 가족을 지키지 못한 비겁한 원수로?”

온은 짐짓 씁쓸하게 물었다. 가온은 멈칫하더니, 그제야 시선을 내리며 한동안 침묵했다.

“……당신을 아예 원망하지 않았다고는 도저히 말씀드리지 못하겠습니다. 그리 말하는 건 당신을 기만하는 짓이고, 저는 지금 당신을 속이고 싶지 않으니까요.”

가윤은 다시 눈을 들더니 가냘프게 속삭였다. 온은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저 간절한, 무척이나 조심스러운 눈빛. 믿을 수 있을까. 믿어야 하는 걸까.

“이제 와서 잘잘못을 따지고 싶지 않습니다. 이랬으면 어땠을까, 저랬으면 어땠을까, 헛된 가정을 곱씹으며 스스로 괴롭게 하고 싶지도 않아요. 그저 지금 당장 제게 중요한 분을 살릴 예정입니다. 저는 그분을 위해 목숨도 걸었습니다. 그러니 대장군님, 부디 도와주세요.”

가윤의 태도는 처연하고도 정중했다. 과거 명문가 여식의 기품을 하나도 잃지 않은 모습이었다.

동시에, 지난 5년간 너무 많은 풍파를 견딘 듯 어딘지 모르게 애처로웠다.

한때 자신의 배필이 될 뻔했던 여인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온은 고통을 느꼈다. 자신이 이미 저지른, 절대 돌이킬 수 없는 배신에 대하여.

그러나 아무리 아프다 한들, 결단코 후회는 없었다.

“내가 그 약재를 구해 주면 되겠습니까? 아니면 그 약재를 구할 때 쓰일 돈이나 신분증이 필요한 건가요?”

온은 최대한 침착하게 물었다. 이왕 배신을 선택한 거, 제대로 해 보자는 마음으로.

“현금이면 충분합니다. 아니면 화폐와 맞바꿀 만한 가치를 지닌 무언가면 됩니다.”

가윤은 겉으로는 공손히, 차분하게 답했으나 속으로는 묘하게 들떴다. 이와 동시에, 본능적인 의심과 불안이 솟구쳤다.

‘정말이야? 이렇게 쉽게?’

현재 가윤의 목표는 온에게 같은 편인 척 접근하고, 그가 방심했을 때 함정에 빠트리기 위해 그를 옭아맬 증거물을 확보하는 거였다.

당연히 목숨을 걸고 하는 일이었기에 마음을 단단히 먹고 나아왔다. 한데, 이게 무슨 일이람.

‘정말로 그냥 너무 착해서 그러는 건가? 아니면 고작 나 같은 게 달리 꿍꿍이가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아서 방심한 건가? 아니면…….’

가윤은 온을 유심히 훔쳐보았다. 여느 때처럼 준수한 얼굴, 그리고 잔뜩 긴장한 눈빛. 그녀는 그 이면의 진실을 파헤치려 애썼다.

‘아니면, 설마.’

또 다른 가설에 가윤의 심장은 차갑게 식었다.

‘이 사람, 역으로 함정을 파는 건가.’

온이 영리하듯 가윤도 영리했다. 각자의 사고는 서로의 방식과 닮은꼴로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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