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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궁의 은밀한 연서 (79)화 (79/123)

79화

“이제 슬슬 들어갈까요?”

“네? 아아, 네.”

“휘국은 벌써 밖에 오래 있으면 좀 춥네요.”

“아. 여벌 겉옷을 들고 왔어야 했는데, 송구합니다.”

“아니에요, 그대가 뭐가 송구해요. 이제 들어가도록 해요.”

류하가 먼저 뒤돌았고, 온은 별수 없이 뒤따랐다. 그는 여전히 류하의 다소 울적해진 분위기가 마음에 걸렸다.

대체 어떤 이유에서 그러시는지 이유라도 들을 수 있으면 좋으련만, 그는 평범한 연인들처럼 상대방을 가볍게 잡아 세우며 왜 혼자 힘들어하느냐고 부드럽게 물을 수도 없었다.

후궁과 호위, 형수와 시동생 사이에는 지켜야 할 선이 있었다. 온은 선의 가장자리에서 서성이며 비애를 되삼켰다.

‘……단풍잎은 뭐 하러 잡았을까.’

저와 절대 좁혀지지 않는 거리를 유지하는 저 뒷모습을 바라보며, 온은 씁쓸하게 후회했다.

‘어차피 이루어지지도 못할 것을.’

떨어지는 단풍잎을 잡으면, 첫사랑이 이루어진다지.

그리고 그의 첫사랑은 지금 그의 앞에, 그의 형수라는 이름으로 존재했다.

내가 정말 당신과 영영 함께하고 싶다면 이 궁에서 내가 지키는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야 하는데, 나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미련이 많은 나는 도저히 선뜻 그럴 수가 없다.

내가 황궁에서 쌓아 온 나의 과거. 궁의 곳곳에 묻어 있는 오랜 추억들. 여기서 현재 내가 유지하고 있는 삶과, 앞으로 이어 갈 생활의 모든 나날.

그런 것들을 내가 전부 등지고, 내 충직한 부하들과 안타까운 어머니도 모두 버리고 당신 하나만 바라보며 돌아설 수 있을까.

‘어차피, 이루어지지도 않는 게 나을 것을…….’

아니, 그전에. 제게 애초에 미래가 있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황후의 배는 착실히 불러가고 있었다. 만약 그녀가 아들을 낳는다면, 황태제 후보의 존재 가치를 지워 버리는 황태자가 될 것이다.

그는 아마 비참한 끝을 예감하면서도 모친이 눈에 밟혀서, 다른 방법이 생각나지 않아서, 류하를 떠나기 싫어서 묵묵히 궁에 머물렀다.

황후가 해산하기 전에 자신이 먼저 군대를 모아 선제공격을 감행할까 생각도 해 봤지만, 그러다 걸리기라도 하면 어차피 죽을 것이며, 그때는 자기 혼자 죽는 게 아닐 것이다.

내가 얌전히 최후를 기다린다면 적어도 내 어머니와 부하들은 무사하지 않을까, 그런 소박한 희망을 품으며 살았다.

온은 무심코 손끝을 문질렀다. 아까 그곳에 닿았던 단풍잎의 까끌까끌한 감촉이 아련한 꿈처럼 머물렀다.

류하가 단풍잎을 잡으려고 깡충대던 모습이 눈앞에 아른댔다. 그 기억이 치명적일 만큼 사랑스러워서 온은 입술을 물어 미소를 참았다.

그 미소는 곧 사라졌다. 자신이 아직 류하를 잘 모르던 시절, 그녀가 했던 작은 고백이 뇌리를 스치는 바람에.

<마마께서는 첫사랑이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감히 여쭈어도 될까요?>

<뭐, 있기는 있습니다만. 딱히 지금 그대와 얘기하고 싶지는 않군요.>

첫사랑이, 있었다고 했다. 그분이 나를 알기도 전에. 그분이 내게 연모한다고 털어놓기 전에.

온의 명치끝이 묵직하게 조였다. 단풍잎을 잡으려고 낑낑대던 류하의 모습이 아까와 전혀 다른 기억으로 그에게 다가왔다. 비통한 의문이 그를 후볐다.

누굴까? 그 미지의 첫사랑이. 그리고 류하 님은 그 첫사랑을 그리며 나뭇잎을 잡으려고 그리도 애쓰신 걸까.

‘……내가 상관할 일은 아니지.’

나는, 더한 욕심을 품어선 안 된다. 이미 저분을 마음에 담은 것만으로도 나는 저분 포함, 너무 많은 이들에게 죄짓는 중이야.

온은 마음을 억누르고 사고를 차단했다. 그렇게 이미 죽은 사람처럼 흘러가는 수밖에는 없었다. 무디고 메마르게, 그저 간신히 호흡하며.

“안에서는 따뜻이 하고 계십시오, 마마.”

어느새 류하의 처소 앞에 도착했다. 온은 공주에게 정중히 고했다. 류하는 아까보다 조금 덜 음울하게 웃었다. 그러나 역시, 음울하긴 마찬가지였다.

“명심할게요.”

그대가 걱정할 일이 없도록, 내 건강을 챙겨야지. 류하는 끝까지 연인에게 웃어 주며, 문을 닫았다.

그렇게 공간이 단절되고 시야가 차단될 때마다, 각자 몹시 쓸쓸했다.

온은 오랜만에 외출했다. 그는 개인적인 용무를 위해 휴가를 썼다.

‘이런 거 보는 눈은 없지만, 뭐, 어마마마는 내가 뭘 가져오든 좋아하시니.’

방물장수가 늘어놓은 여인들의 장신구를 살피며 온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 곧 황태후의 탄신일이었고, 효자 대장군은 마땅히 선물을 물색했다.

‘내 안목이 뛰어나서라기보단, 내가 그분 아들이라 그런 거겠지만…….’

여인들의 패물에 대해 아는 게 없는 온이지만, 그가 무엇을 사 오든 그의 어머니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좋아할 게 명백했다.

온은 그게 자신의 훌륭한 미적 감각 덕분이 아니라 그저 어머니의 위대한 내리사랑 때문이라는 사실을 겸허히 인정했다.

‘궁녀라도 아무나 데려올 걸 그랬나?’

그는 뒤늦게 아쉬워했다. 지금 여인이 곁에 있었다면 조언을 구할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니, 꼭 그런 것만도 아니었다. 수수한 차림새가 권장되는 궁인에게 장신구에 관해 물어봤자 상대방도 문외한일 확률이 높았다.

‘그래, 내가 알아서 골라야지.’

오히려 황족으로 태어나 평생 화려하고 우아한 것만 보고 자란 온이 태후의 심미안을 충족시키는 데 더 적합할지도 모른다. 그는 곧 다시 진지한 탐색에 몰두했다.

<그러니까, 그대가 날 대신 도와줘야 하겠습니다.>

그때, 류하가 떠올랐다.

<내가 장신구 고르는 것 좀 도와주세요. 그대가, 저 아이 대신.>

온의 눈빛이 슬퍼졌다가, 기뻐졌다. 그는 선명한 기억을 곱씹으며 눈앞의 패물들을 훑었다.

<일단 아까 내가 보던 것부터 보죠. 여기, 이 노리개. 둘 중 어느 쪽이 더 예뻐요?>

<아가씨, 지금 저한테 노리개를 골라 달라고 말씀하신 겁니까?>

<왜요, 못 고르겠어요?>

그립다. 당신이 그리워. 내게 고르는 걸 도와 달라며 다짜고짜 노리개를 들이밀던 그 막무가내한 태도가, 당시의 진지한 눈빛이, 그날의 소낙비가, 모두.

소낙비 아래에서 뒤엉키던 숨결과 체온과 손길이.

‘그만.’

그는 움찔하며 멈췄다. 그는 다시 선물 고르기에 집중하려 애썼다.

‘이제 그만하자.’

오래 생각할수록 중독될 뿐이었다. 그는 끔찍한 상처를 떨쳐 내듯 잠시 부르르 떨며 그리움을 도려내려 애썼다.

호위를 이유로 그녀를 바라보지 않아도 되는 지금만이라도 류하를 생각하지 않고자 했다.

<그럼 이건 어때요? 둘 중에 그대의 정인한테 선물해 주고 싶다, 이런 생각이 드는 쪽을 선택해 주세요.>

그러나 미련한 마음은 계속해서 외곬으로 흘러, 기어이 나머지 추억까지 수면으로 끄집어냈다.

<가정을 해 보라는 거죠, 가정을. 상상력을 발휘하세요. 만약 그대한테 정인이 있다면 둘 중에 어느 걸 선물로 주고 싶어요?>

정인? 정인이라니. 나는 정인을 가질 수 없어.

사랑에 빠질 수 없고, 혼례를 치를 수 없고, 가정을 꾸릴 수 없어.

황후 전하가 회임한 이상, 태중의 아기가 딸이든 아들이든 나는 이제 안 돼. 나는 후손을 남기면 안 돼. 지금보다도 더 경계 받을 거야.

그리고 만약 내가 정말로 잘못된다면, 내 아내와 아이까지 함께 고통당하는 건 싫어.

“어이, 잘생긴 총각. 대체 뭘 사려고 그리 심각하게 고르시오?”

방물장수의 털털한 목소리가 그의 상념을 깨트렸다. 저도 모르게 하얗게 질린 얼굴로 주먹까지 말아 쥐고 있던 온은 겨우 현실로 돌아왔다.

“곧 제 어머니의 생신입니다. 선물을 사 드리려고요.”

“어휴, 거참 효자구먼. 내 아들놈은 어디서 뭘 하고 다니는지, 평소에 서신 한 통 없소.”

“하하. 아드님도 분명 어머님을 항상 생각하고 계실 겁니다.”

“쯧, 생각하고 있을 필요도 없소. 그냥 자기 한 몸 잘 건사하기만 하면 되지.”

방물장수가 툴툴거렸고, 다소 투박하면서도 따스한 언사에 온은 싱긋 웃었다. 본인의 어머니가 떠올라서 명치끝이 쓰렸다.

“혹시 제가 선물 고르는 것 좀 도와주시겠습니까? 아무래도 저는 이쪽으로 영 보는 눈이 없나 봐요.”

“당연히 도와줄 수 있지요, 그게 내 일인데. 일단, 여기 있는 것들부터 보시오.”

방물장수는 기꺼이 나섰고, 온은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모친과 어울릴 만한 가락지와 노리개를 샀다.

정당한 값을 지불한 뒤, 그는 잘 포장된 선물을 품에 소중히 넣고 돌아섰다.

“총각, 이건 결국 안 사는 거요?”

방물장수가 막판에 불렀다. 온은 멈칫하며 흘긋했다. 방물장수가 가리킨 팔찌는 붉은 비단실로 엮어 금색 장식을 단 고운 물건이었다.

“네, 괜찮습니다.”

류하가 그걸 끼면 참 예쁠 거라고 얼핏 생각했다. 내가 당신께 선물을 건네면 당신은 기뻐하며 받는 상상을 했다. 그래서 아까 한참을 쳐다보다가, 결국 고르지 않았다.

내가 정인에게 선물하고 싶다는 가정하에 골랐던 푸른색 노리개를 당신은 아직도 갖고 있을까. 내가 당신을 호위할 때마다, 그 노리개를 단 모습은 본 적 없는데.

온은 하릴없는 궁금증을 접으며 걸음을 뗐다.

궁문까지 절반쯤 왔을 때였다. 그는 예리한 기시감을 느꼈고, 몸을 휙 틀며 손을 뻗었다.

온의 손에는 조막만 한 소년이 잡혔다. 또? 이쯤 되자 제게 소매치기를 끌어들이는 힘이라도 있는 건지 궁금했다.

“온 대장군님.”

온이 좀도둑으로 추정되는 소년을 추궁하려는 찰나, 그 소년이 입술을 열어 선명하게 속삭였다. 온은 그대로 굳었다.

“여기, 대장군님께 드리는 선물입니다.”

온은 현재 제가 황족임을 드러내는 그 어떤 외향적 표시도 없이 혼자 조용히 외출을 나왔다.

그래서 아까 그 방물장수도 그를 단순히 총각이라 칭했거늘, 이 아이는 어떻게 상대방을 단숨에 알아봤을까.

온은 호기심을 해소할 틈을 놓쳤다. 소년은 자신을 붙잡은 온의 손에 무언가를 급히 쑤셔 넣었고, 놀란 그의 손힘이 풀어진 틈을 타 잽싸게 도망쳤다.

온은 본능적으로 주먹을 그러쥐어 손안의 얇은 물체를 철저히 감췄다. 주변에 지켜보는 시선이 있을까 두려웠다.

그는 아무 일도 없었던 척 태연하게 걸음을 옮겼고, 예정대로 환궁하는 대신 가장 가까운 골목길에 숨어들었다.

근처에 아무도 없음을 확인한 뒤에야 그는 수중을 확인했다. 여러 번 접힌 종이쪽지였다.

[배꽃을 우린 차를 기억하시나요?]

지면에 적힌 정갈한 필체를 알아보고 온은 헛숨을 삼켰다.

[간절히 도움이 필요합니다. 목숨을 내놓을 각오로 뵙기를 청하니, 보름간 기다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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