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훤아가 언급되자 예빈의 얼굴이 확 더워졌다. 그 와중에도 그녀는 여전히 상대방의 직설적인 비난이 얼떨떨했다. 류하는 쌩긋 웃었다.
“나, 좀 미친년 같죠? 더 미친년처럼 나오기 전에 부디 퇴장해 주세요.”
거의 평생 별궁에 갇혀 지냈더니, 이게 문제야.
내가 왕족이긴 하지만, 다른 왕족들과 고상하게 대화해 본 시간이 비교적 적거든?
내 어머니와 나는 적어도 서로에게 솔직했어.
그나마 류하도 기본적인 상식과 절제력이 있는 사람이라 최소한의 품위를 지킨 거지, 하마터면 그날 예빈은 찻물 세례를 받을 뻔했다. 예빈은 운이 좋았다.
물론, 그날 이후의 전개를 생각한다면 딱히 운이 좋다고 보기도 어려웠지만. 자업자득이라고나 할까.
“사과하러 와 줘서 정말 고마워요, 예빈.”
류하는 예쁘게 덧붙였고, 예빈은 정말 미친년 보듯 류하를 쳐다보다가 말없이 일어나 성큼성큼 퇴장했다.
인사도 하지 않고 물러나는 모습이 괘씸했지만, 류하는 너그럽게 용서하기로 했다. 예절이고 나발이고 전부 내던진 모습은 자기가 먼저였으니.
“……하.”
절반 이상이 남은 다과상을 둘러보며 류하는 한숨을 뱉었다.
“아까워라.”
손님이 온다 하여 예의상 내놓은 과자와 차인데, 아까 예빈이 건드리는 걸 보니 기분이 더럽더라.
“너무 세게 나갔나?”
류하는 뒤늦게 후회하며 소심하게 중얼거렸다. 그러다 도리질 한 번으로 모든 후회를 가뿐히 물리쳤다.
‘이제 와서 뭘 어쩌겠어.’
어차피 자신이 예빈을 고발하지 못하듯, 예빈도 오늘 자신의 무례를 떠벌리고 다니지 못하리라.
오늘 월빈의 언사가 얼마나 천박했는지 욕하고 다니려면, 그 맥락까지 다 밝혀야 하니까.
‘비겁해.’
류하는 예빈을 씁쓸하게 깔아뭉갰다. 정말이지 비겁하고, 한심했다.
‘자기 혼자 마음 편해지겠다고 나한테 그따위 사과나 하고.’
죽이려 하지 않았으면 다인가? 결과와 별개로, 예빈이 제게 악의를 품고 그 악의를 행동으로 옮겼다는 사실 자체는 변함없었다.
황궁에 두 달째 있으면서 그새 많이 적응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오늘따라 류하는 이방인이 된 느낌이었다. 피곤했고, 낯설었다.
고향에 두고 온 사람이 없어서 향수조차 느낄 수 없다는 게 서러웠다.
여기서 제게 가장 버팀목이 되는 사람은 동시에 자신의 가장 큰 고통이라서, 괴로웠다.
“온.”
근처에 아무도 없음을 믿고 가만히 속삭여 보았다. 그러다 황궁에는 벽에도 눈과 귀가 달렸다는 생각에, 조용해졌다.
이렇게 지치는 순간이면 그대를 불러 위로받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다.
진심은 갑갑한 침묵 아래 덮어 두었다.
제12장. 첫사랑에게
북방의 여름은 아름다웠다. 너무 덥지도 않고, 남쪽과 달리 끈적이지도 않고.
그러다 순식간에 쌀쌀한 가을이 왔다. 류하는 후원에서 단풍을 구경했다.
“우와.”
류하는 색색으로 물든 주변의 풍경을 둘러보며 혼잣말로 감탄했다. 휘국과 식생이 많이 다른 월국에는 가을철에 이렇게 단풍이 흔하지 않았다.
“어.”
느리게 산책하던 그녀는 나풀나풀 떨어지는 붉은 이파리를 보고 고개를 들었다. 단풍잎이 하나둘씩 그녀의 머리를 스치고 발치에 떨어졌다.
<휘국에는 떨어지는 단풍잎을 잡으면 첫사랑이 이루어진다는 믿음이 있습니다.>
류하의 머릿속에 연인의 잔잔한 음성이 두둥실 떠올랐다. 그때, 그 산속에서.
류하는 어깨 너머를 흘긋했다. 온은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연인과 눈이 마주치자, 그는 살짝 웃어 주었다.
허무맹랑한 꿈이라는 걸 알았다. 미신은 고작 미신에 불과하다는 사실도.
설령 그게 한낱 미신이 아니라 진정한 믿음이라서 정말 단풍잎을 잡는 게 첫사랑을 이루어 준다면, 자신은 절대 그걸 잡아서는 안 된다는 사실도, 류하는 알았다.
봄날부터 지금까지, 벌써 세 계절째 저 사내를 사랑했지만, 류하는 단 한 번도 저와 온이 맺어지는 상상을 해 본 적 없었다.
서로 맺어지기 위해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할까. 황궁을 벗어나야 하겠지.
대장군과 후궁이 나란히 도망치면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할까. 내 나라는 어떡해? 온의 어머니는?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상상해 본 적 없으며, 이루어져야 한다고 여겨 본 적도 없거늘.
류하는 어느새 손을 뻗어, 굉장히 열심히 단풍잎을 잡으려고 발버둥 치고 있었다.
‘으윽, 뭐야, 생각보다 어렵잖아?’
그 결과, 상당히 우스꽝스러운 장면이 연출되었다.
팔랑대는 나뭇잎은 의외로 날렵했고, 류하의 손끝이 스치기 직전에 바람을 타고 나풀나풀 날아가며 마치 그녀를 놀리는 듯했다.
‘하, 나뭇잎 주제에.’
류하는 이제 공연한 오기가 생겼다. 그녀는 눈을 부릅뜨고 허공에 손을 열심히 휘저었다.
성난 토끼처럼 촐싹거리는 류하를 뒤에 있던 아랫사람들이 측은하게 바라보았다.
“이거 왜 이렇게 안 잡, 아!”
보다 못한 온이 나섰다. 크고 강한 손이 류하의 머리 바로 위에서 나뭇잎을 낚아채자 류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았다.
그 모습이 더더욱 토끼 같다고 생각하며, 온은 정중히 단풍잎을 내밀었다.
“받으십시오.”
류하는 뾰로통하게 나뭇잎을 받았다. 내가 잡지 않으면 의미가 없는데. 그리고, 온이 대신 잡는 건 특히 불안했다.
“도움을 청한 적 없습니다만.”
류하가 새침하게 항의했다. 그러자 온은 궁인들이 보지 못하도록 그들을 등진 채 류하를 내려다보며 다시 웃었다.
“그래도 도움이 필요하셨잖습니까.”
너무 맞는 말이라서 류하는 차마 반박할 수 없었다. 하지만 마음은 여전히 꺼림칙했다.
“내가 스스로 하나 더 잡을 테니, 더는 나서지 마세요.”
아, 이게 대체 뭐라고 내가 이렇게 집착하는 거지? 류하는 문득 자괴감을 느꼈다.
그러나 온이 단풍잎을 잡은 이상, 더더욱 포기할 수 없는 이유가 생겼다. 이 또한 미신에 불과했지만.
‘첫사랑이 이루어진다잖아. 첫사랑…….’
류하의 첫사랑은 온이었다. 본인의 연정이니, 본인이 잘 알았다.
거의 평생 별궁에서 지내며 이전에 다른 사내를 본 적도 없었지만, 온이 단독 후보라는 이유만으로 자신이 그와 사랑에 빠졌다고 그녀는 생각하지 않았다.
설령 다른 수백의 사내가 있었다 한들, 그녀는 여전히 그를 택했으리라. 그는 사랑할 수밖에 없는 사내니까. 그를 사랑하지 않는 나를 상상할 수 없어.
하지만 온의 경우, 나는 아무것도 모르잖아.
‘나 전에 이 사람 마음에 누가 있었는지 누가 알아?’
그때 그 산속에서, 온은 그녀에게 분명히 말했다. 첫사랑 같은 건 없었다고.
그날 이후 온은 류하에게 연정을 고백했으니, 오직 그 말만을 믿자면 류하는 자신이 온의 첫사랑이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한 가닥 불안감이 남았다. 류하는 당시 자신이 온에게 반쯤 거짓말했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렸다.
<당신은요?>
<네?>
<마마께서는 첫사랑이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감히 여쭈어도 될까요?>
<뭐, 있기는 있습니다만. 딱히 지금 그대와 얘기하고 싶지는 않군요.>
당시 류하와 온은 서로를 잘 몰랐다. 무의식중에 이미 속절없이 끌리는 와중에도 현실적으로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어 많은 것을 포장하고 과장하거나 숨겼다.
류하는 자신이 스무 살 평생 연정 한 번 품어 본 적 없는 초라한 천덕꾸러기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지 않아서, 과거에 즐겨 읽던 소설의 주인공을 첫사랑으로 둔갑시켰다.
어쩌면, 온도 제게 거짓을 말했는지도 모른다. 별로 친하지도 않은 예비 형수님께 자신의 과거를 구구절절 털어놓고 싶지 않아서, 첫사랑 같은 건 없었다고 대충 둘러댄 걸지도.
여기까지 상상하자 류하는 살짝 겁이 났다. 그대의 첫사랑은 누굴까. 정말로 내가 맞을까.
아까 나를 대신해 단풍잎을 잡을 때, 그대의 마음속에는 과연 누가 있었나?
갑자기, 그때 온을 보고 목이 졸린 듯 신음하던 가윤이라는 여인이 떠올랐다.
‘……류하야, 침착해. 그냥 미신이잖아.’
류하는 가까스로 마음을 다잡았다. 고작 나뭇잎 하나 잡는 일로 이렇게 심각해지다니, 참 우스웠다.
어차피 이것도 전부 이기적인 욕심이었다.
연모하는 이에게 그 어떤 미래도 줄 수 없으면서, 그가 다른 사람과 첫사랑을 이룰 가능성조차 경계하고 거부하는 건.
류하가 온에게 빌어 줄 수 있는 최고의 행복은, 자신을 향한 그의 마음이 식는 것.
그대가 나를 볼 때마다 괴롭지 않도록, 외롭지 않도록. 절대 품을 수 없는 이를 갈구하는 고통에서 하루빨리 해방되도록.
‘내가 첫 번째든 백 번째든 대체 무슨 상관이야.’
내가 첫 번째라면 부디 두 번째가 생기고, 백 번째라면 부디 백한 번째가 생기기를 기도해야 한다. 그가 형수를 연모하는 패륜적인 비극에서 벗어날 수 있기를 소망해야 한다.
그가 어떻게든 끝까지 무사해서 황실의 정쟁과 상관없는 참한 처자를 만나 가늘고 길게 알콩달콩 살아가기를, 간절히 빌어 줘야 한다.
황제의 수중에 모친을 인질로 잡힌 그가 천륜을 버리고 나와 단둘이 도망치는 미래를 꿈꿔서는 안 된다.
류하와 달리, 온은 이곳에 지킬 게 많았다. 황궁은 그의 고향이었고 추억의 집합소였으며 그의 가족과 부하들이 거하는 곳이었다.
류하는 온과 제하, 수연과 훤아를 제외하면 궁에 별다른 인연이 없었다.
심지어 수연과 훤아와는 고작 몇 달짜리 우정인지라 그리 절절하지도 않았다.
같은 후궁끼리 그저 친하게 지내는 것일 뿐, 그들을 위해 삶을 포기할 수 있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휘온, 오직 그만을 위해 류하는 모든 걸 저버릴 각오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상대방이 자신과 꼭 같은 마음일 거라고 넘겨짚지는 않았다. 같은 마음이길 강요하고 싶지도 않았다.
각자의 사랑은 각자의 몫이고, 아무리 연인이라 할지라도 결국에는 타인이니.
그러니까, 이깟 단풍잎 따위.
“아니다. 그냥 그대가 잡아 준 잎으로 만족하기로 하죠.”
아까는 반드시 스스로 잡겠다며 나서지 말라고 경고하더니, 류하는 문득 조금 달라진 목소리로 부드럽게 말했다.
“고맙습니다, 대장군.”
류하는 온을 보며 처연하게 미소했다. 온은 연인의 뒤바뀐 분위기를 헤아리지 못해 어리둥절했다.
류하는 그 귀여운 모습을 보고 한껏 짙게 웃었다. 아, 정말이지. 사랑스러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