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류하는 최대한 침착한 자태로 찻잔에 차를 따르며 서늘하게 내리깔린 목소리로 덧붙였다.
“너무 뜻밖의 영광이라 조금 얼떨떨할 정도입니다. 그대가 내 처소를 단독으로 찾은 건 오늘이 처음이잖아요? 예빈.”
류하는 주전자를 내려놓았다. 예빈은 그제야 어렵게 눈을 들었다.
“최근에 건강이 나쁘지 않았습니까. 환자의 처소에 너무 많은 인원을 데려오는 건 실례인 듯하여, 혼자 왔습니다.”
“보다시피 내 건강은 이제 멀쩡합니다. 그리고 몸이 아픈 사람의 처소에 드나드는 게 상당히 실례이긴 하죠. 혼자서든, 여럿이든.”
“……쾌유를 축하드려요.”
“고맙습니다.”
류하는 한결같이 냉담했고, 예빈은 처음으로 절절맸다. 관계는 예전과 미묘하게 달라졌다.
여태 예빈은 자신이 류하를 싫어한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았고, 이에 대해 늘 뻔뻔할 만큼 당당했다. 네가 알아봤자 대체 뭘 어쩌겠느냐, 이런 태도였다.
실제로 류하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뭔가를 할 생각도 애초에 없었다.
예빈은 제국의 명문가 딸이었고, 류하는 소국에서 끌려온 공주였다. 명석한 왕녀는 제 분수를 알았다.
게다가 어차피 예빈의 반감은 고작 차가운 조롱 몇 마디, 불쾌한 눈웃음 몇 번쯤으로 끝났기에 기꺼이 견딜 수 있었다.
평생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아온 류하에게 그런 괴롭힘은 차라리 깜찍했다. 예빈도 굳이 선을 넘지는 않았다.
한쪽이 참고 한쪽이 정도를 알았기에, 둘 사이의 아슬아슬한 기류는 내리 상식선을 유지해 왔다. 며칠 전까지는.
며칠 전에 그들은 소풍을 나갔고, 승마 시합 중에 한쪽은 죽을 뻔했다.
“이 과자 좀 드셔 보세요, 예빈. 최근에 궁녀들이 추천해서 들인 과자인데, 맛이 꽤 좋더군요.”
“아아, 네. 고마워요, 월빈.”
류하는 마음에도 없으면서 심드렁하게 권했고, 예빈은 가시방석에 앉은 느낌으로 답했다.
예빈이 과자 하나를 의욕 없이 씹는 동안 류하는 계속 차만 마셨다.
류하는 예빈이 본론을 꺼내기를 기다렸고, 예빈은 본론을 투척하는 데 필요한 용기를 그러모으느라 바빴다.
<예빈. 그대가 그랬어요?>
친구의 안타까운 속삭임이 뇌리에 맴돌았다. 그때 예빈은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말없이 시선만 피했다.
그 회피와 침묵만으로도 하빈에게는 충분한 답이 되었다.
<어쩌자고 그랬어요. 도대체 왜…….>
<……죽일 생각은 아니었습니다. 나도 일이 그렇게 될 줄은 몰랐어요.>
<당연히 모르고 했겠죠.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는 걸 그대도 알잖아요.>
하빈의 탄식이 예빈의 정곡을 찔렀다.
그래, 그저 조금만 골려 주고 싶었다는 동기가 대체 뭐가 중요하랴.
중요한 건 결과였고, 월빈이 실제로 죽을 뻔했다는 사실이었다. 예빈은 다른 후궁을 살해할 뻔했다.
궁인을 속여 연고에 약을 섞고, 피부가 간지러워 속도를 내지 못하는 월빈의 말을 보고 싶었다. 월빈은 당황할 테고, 끝내 바보 꼴을 당하겠지.
맹세코 죽일 생각은 없었다. 그저 조금 창피해하고, 조금 겁먹기를 바랐다.
보잘것없는 나라에서 온 주제에 얼굴은 쓸데없이 예쁘고 성격은 쓸데없이 밝아서 해비마마를 웃게 만드는 그 건방진 계집을 그냥 살짝, 아주 살짝, 응징하고 싶었다.
<가서 그자한테 자백하고 사과할 생각입니다.>
예빈은 뚝뚝하게 실토했다. 그러자 하빈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예빈, 지금 제정신이에요?>
하빈은 직설적으로 따졌다. 이어서 한탄하듯 덧붙였다.
<자백과 사과라니, 왜 그자에게 물증을 쥐여 주려고 그래요? 지금 그자한테 심증은 이미 충분할걸요. 그대가 자백하는 순간 옳다구나, 하고 폐하나 황후 전하께 달려가면 어쩌려고요?>
<물증이요? 이게 물증입니까? 내 자백이?>
예빈은 새침하게 되물었고, 하빈은 주춤했다. 예빈은 하빈을 우울하게 보며 조곤조곤 달랬다.
<하빈, 그자는 나를 절대 고발하지 못해요. 그대는 내 자백이 물증이라고 말하지만, 구두로만 전하고 글로 남기지도 않은 자백이 무슨 물증이 되겠어요.>
예빈의 확신은 꼭 무근하지만은 않았다.
류하가 예빈을 고발하고자 했다면 심증만으로도 진즉에 충분히 고발할 수 있었다. 심증만으로 유죄를 입증하지는 못해도, 조사를 시작하는 건 가능하니까.
<그리고 오히려 그자한테 깔끔하게 사과하는 게 나한테 더 안전할 것 같아요. 가서 불쌍하게 뉘우치는 척하면, 그자도 알아서 누그러지는 척하겠죠.>
인간은 생각보다 모질지 못해서, 제 앞에서 울먹울먹 사과하는 사람의 면전에 대고, 응, 절대 안 돼, 나는 여전히 너 고발할 거야, 라고 씹어뱉는 건 꽤 어려웠다.
하물며 예빈은 제국 권세가의 여식이고, 류하는 힘없는 이방인 공주였다.
류하가 심증만으로 예빈을 고발하지 않고 조용히 넘어가기로 택한 건 그런 권력의 역학을 이해해서였다.
이제 와서 예빈이 사과한다 한들 류하가 잽싸게 마음을 바꾸어 황제에게 일러바칠까? 권력의 구도는 그대로인데?
오히려 류하가 사과를 듣고 나서도 고발을 택한다면 여론이 역으로 그녀를 공격할 수도 있었다.
어머, 쟤 좀 봐. 건방진 외국 계집애. 우리 예빈마마가 실수였다고, 미안하다고 진심 어린 사과까지 했는데도 여전히 앙심을 품고 마마님을 공격하잖아? 참, 속도 좁아.
월빈은 똑똑한 자이니 그 정도 흐름은 예상할 거다. 그러니 예빈은, 자신이 그자에게 가련하게 사과하는 게 오히려 그자의 입을 봉하는 길이라 여겼다.
그리하여 예빈은 오늘 월빈을 만나기 청했다. 그럴듯한 사과로 월빈의 손을 묶기 위해. 또한, 본인의 마음이 편해졌으면 하는 이기적인 욕심을 품고.
“있잖아요, 월빈. 사실 오늘 내가 찾아온 이유는.”
과자를 마저 삼킨 뒤, 예빈은 조심히 운을 뗐다. 류하는 식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대에게 사과하고 싶어서 그래요.”
여기까지 말하고 예빈은 잠시 기다렸다. 류하는 짧게 침묵하다가, 서늘하게 반문했다.
“뭐에 대한 사과인가요?”
다 알면서 묻는 것 좀 봐. 예빈은 뻔뻔한 반감을 삼키며 침통하게 말을 이었다.
“소풍 전날에, 내가 말들을 보살피는 관리에게 특정 약초를 연고에 섞으라고 지시했어요. 내가 평소에 타는 말의 피부가 워낙 약해서, 시합 전날에 이를 보완하고 싶은 마음에 내 말한테만 바르라고 지시한 건데……. 어쩌다 내가 아닌 그대의 말에 그 약이 발렸는지 모르겠어요. 정말 미안해요, 월빈.”
“그러니까, 원래 그 약초는 피부병을 고치는 약이다? 그리고 내 말이 아니라 그대의 말에 바를 예정이었다고요?”
류하는 딱딱하게 되물었다. 그 기막힌 변명에 싸늘한 경멸이 차올라 언제라도 입매가 조소로 비틀릴 것 같았지만, 일단은 굳은 얼굴을 유지하고 싶어서 꾹 참았다.
“네, 그래요. 설마 그 부주의한 관리가 말을 헷갈렸을 줄은 몰랐어요. 원래 피부병이 있는 말에게 그 약초는 그야말로 약이지만, 아닌 말에게는 오히려 독초가 되는 부작용이 있거든요.”
예빈은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거짓을 늘어놓았고, 류하는 그 철면피에 내심 감탄했다. 그래, 궁에서 오래 살아남으려면 저 정도는 해야지.
류하는 머릿속을 정리할 시간을 벌고자 찻잔을 들고 잠시 음료를 마셨다. 그러면서 속으로는 예빈을 가늠했다.
‘제법이잖아? 철면피 후궁님.’
만약 후궁 중 하나가 장난질의 범인이라면 당연히 예빈일 확률이 가장 높다고 류하는 처음부터 생각했었다.
수연과 훤아는 자기와 친하고, 나머지 둘은 제게 호의를 보였으며, 하빈은 류하를 발칙한 외국인 어린애쯤으로만 보고 가볍게 무시할 뿐 딱히 적개심을 보인 적은 없으니까.
류하가 황궁에서 경험한 유일한 진짜 악의는 예빈에게 속했다. 예빈은 류하를 지독하게 미워했다. 훤아를 둘러싼 질투에 이방인을 향한 경멸까지 더해져서 잔혹한 감정을 빚었다.
‘날 죽이려고 한 게 아닌 것쯤은 알아.’
류하는 이 또한 처음부터 짐작했다. 그렇게 시끄럽고 불확실한 방법으로 나를 죽이려고 했을 리가 없지.
게다가, 류하는 예빈의 자신을 향한 마음에 적의는 있을지언정 살의는 없다고 믿었다.
‘곱게 자란 명문가 아가씨가 애초에 살인 같은 걸 저지를 배짱이나 있겠어?’
류하 본인도 공주로서 곱게 자라 봤기에 잘 알았다.
온실에서 애지중지 화초처럼 길러진 사람은 시체만 봐도 구역질이 난다. 그건 양심의 문제가 아니라, 순전히 비위가 약해서였다.
‘그냥 한 번쯤 날 된통 엿 먹이고 싶었겠지. 그러다 일이 너무 커지니까 내가 고자질할까 봐 불안해서 동태도 살필 겸 찾아온 거냐?’
류하의 추론은 정확했다. 그녀는 잔을 내려놓으며 눈살을 찌푸렸다.
방금까지는 상대방의 작태가 너무 가소롭고 웃겨서 실소가 솟구쳤는데, 이제는 불쾌감이 치밀며 웃음이 싹 가셨다.
‘가증스러워.’
류하는 진지하게 평가했다. 눈빛이 살벌하게 가라앉았다.
‘나랑 온은 너 때문에 정말 죽을 뻔했다고.’
그런데 이제 와서 자기 마음 편해지자고 뒤늦은 사과만 늘어놓으시겠다?
어차피 내가 자기를 고발할 수 없음을 알고, 그런 안전한 믿음 뒤에 숨어서, 얄밉게도.
“예빈.”
류하는 최대한 침착하게 불렀다. 마음 같아서는 이자의 머리채를 붙잡고 실컷 흔들다가 얼굴에 찻물이라도 끼얹어 주고 싶었다.
난폭한 진심을 간신히 억누르며, 그녀는 차갑게 덧붙였다.
“그대의 말도 안 되는 사과는 잘 들어 둘게요.”
원래는 자기 말에 바르려고 했어? 말을 헷갈려? 피부병을 고치는 약초? 예빈의 설명은 앞뒤가 맞는 부분이 하나도 없었다.
예빈은 이를 알고도 뻔뻔하게 들이밀었고, 류하는 그런 그녀의 담대한 후안무치와 이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자신의 무력한 위치에 진저리가 났다.
“고작 미천한 나 때문에 내내 죄책감에 시달렸을 그대를 생각하니 내 마음이 아파 죽겠네요. 이러다 정말 죽으면 그대가 좋아하려나? 아, 실수. 내가 너무 정곡을 찔러 버렸죠.”
“지금 뭐라는…….”
류하가 종알종알 떠들자 예빈이 황당하게 쳐다보았다.
빙빙 돌려 말하는 황족과 귀족의 화법이 익숙한 예빈은 류하의 노골적인 빈정거림을 따라잡지 못해 허우적댔다.
“내가 지금 뭐라고 지껄이는 거냐고요? 제발 꺼져 달라고 부탁하는 중이잖아요.”
류하는 날카롭게 해설했다.
아, 이놈의 성질머리. 이러면 정말 머리채를 잡고 흔드는 거랑 별 차이가 없잖아?
류하의 이성은 후회했지만, 그녀의 진심은 언어를 만들었다.
“꺼지세요, 예빈, 제발. 사과는 잘 들었고, 황후 전하나 황제 폐하께 고할 생각도 없고, 그대가 그토록 따르는 해비마마께도 입은 벙긋조차 하지 않을 테니까, 안심하고 꺼지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