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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궁의 은밀한 연서 (76)화 (76/123)

76화

그의 처량한 떨림이 물로 인한 추위 때문만은 아님을 알고 그녀는 마음이 아렸다. 본인의 공포보다도 연인의 두려움이 그녀를 더 깊게 찔렀다.

“무사하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찰나의 포옹 끝에 온은 다시 류하를 밀어냈다. 그의 음성은 가냘팠고, 그의 눈빛은 처량했다.

류하는 자신을 위해 겁먹었던 그를 다독이며 그에게 웃어 주고 싶었다.

더 솔직해지자면, 아까 그가 다소 충동적으로 그러했듯 그를 뜨겁게 부둥켜안고 싶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극도의 위험을 함께 극복한 것에 대한 기쁨을 온전히 나누지도 못했다.

말발굽 소리가 다가왔고, 류하는 마지못해 돌아보았다. 그사이 온은 자신의 외투를 벗어 그녀의 어깨에 둘렀다.

“월빈! 대장군! 괜찮으십니까?”

하빈은 해쓱하게 질려 말에서 내려왔다.

아까 류하의 애마가 난데없는 전력 질주를 시작했을 때는 당황해서 쳐다만 보고 있었는데, 상황이 어느 정도 정리되자 정신이 퍼뜩 들면서 그녀는 황급히 다가왔다.

“세상에, 이게 대체 무슨…….”

하빈은 흠뻑 젖은 두 남녀에게 쪼르르 다가와 안절부절못하며 신음했다.

류하는 하빈을 묵묵히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눈빛은 어느새 골똘했다.

‘진짜야?’

류하는 궁금해했다. 비꼬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알고 싶었다.

지금 저 모습이, 죽을 뻔한 나로 인해 깜짝 놀라고 대장군을 염려하느라 우왕좌왕하는 저 모습이 진짜인지 알고 싶었다.

‘진짜 놀란 거야? 진짜 걱정했어? 진짜, 사전에 아무것도 몰랐어?’

마구간 관리들이 그사이 몰려들어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서 화를 달래느라 진땀을 빼고 있었다.

평소에는 참 온순한 아이인데, 왜. 대체 왜 갑자기, 오늘, 저토록 아파하며 날뛰었을까.

‘……우연이야?’

우연일 리가. 사람이든 짐승이든 원래 안 하던 짓을 뜬금없이 한다면 한 번쯤 이상하게 여길 법도 하다.

그리고 오늘 일어난 일은 정말, 정말 이상했다.

류하가 보기에 하빈의 저 창백한 꼴은 진심인 듯했다.

어쩌면 저조차 고도의 연기일지 모르지만, 굳이 그런 명연을 펼쳐가면서까지 저자가 나를 상대로 이런 번거로운 일을 벌였을까?

만약 내가 거슬린다면, 내 말을 괴롭히는 것 외에도 나를 위험에 빠트릴 방법은 많을 텐데.

‘그래, 설령 하빈은 아니라 쳐도…….’

하빈을 곰곰이 뜯어보며 묵묵히 궁리하던 류하는 문득 저를 감싸는 온기를 느끼고 흠칫 멈췄다.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온이 그녀를 보고 있었다. 간절하게, 뭔가를 억누르는 느낌으로.

“모시겠습니다, 마마.”

그는, 분노를 참고 있는 듯했다. 본인도 물에 푹 젖은 주제에 오직 상대방을 걱정하는 그의 지순한 눈빛 앞에서 류하는 맥이 탁 풀렸다.

류하도, 온도, 상황을 목격한 이곳의 다른 모든 사람도, 결코 류하가 자연스러운 요인 때문에 위험에 처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황궁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순진하지 못했다. 어제만 해도 말짱하다가 오늘 돌연 광분하는 말을 보고 각자 이미 머릿속에 거대한 음모론 하나쯤은 그리고 있었다.

누군가 연인의 애마에 장난질을 벌였다는 생각에 온은 피가 거꾸로 솟는 느낌이었다.

누구일까, 이번엔 또 누구야, 누가 대체 이분을 그렇게 괴롭혀?

안 그래도 팔려 오듯 시집온 가여운 분이라 앞으로라도 편안하셨으면 싶었는데.

몇 주 전에는 자객들이 덮치더니 이제는 이런 같잖은 계략이라니, 온은 진노로 입 안이 썼다.

자객 사건의 표적은 온 자신이었다 쳐도, 이번 수작은 필시 원래도 류하를 노렸을 터.

대체 누가 뭐 하러 이런 과도하게 극적인 방식으로 이분을 해치려 했는지 궁금했으나, 지금은 단서를 하나하나 곱씹으며 낱낱이 파헤칠 때가 아니었다.

일단은, 호위의 본분을 다할 때였다. 오늘도 본의 아니게 다사다난한 시간을 보낸 자신의 연인을 무사히 처소로 돌려놓는 것.

이번에도 며칠 전처럼 온은 류하를 품에 안아 들었다.

달밤의 산책 때는 좁혀진 간격을 핑계 삼아 달콤한 농담을 속삭이기도 했는데, 지금 그의 얼굴은 오직 딱딱했다.

류하는 온에게 안긴 자세가 민망했다. 그러나 괜히 내려 달라고 고집을 부렸다가 오히려 이목을 더 잡아끌까 봐, 그녀는 입을 봉하고 표정을 지운 채 인형의 모습을 취했다.

온은 류하를 안은 채 움직였고, 궁녀들과 호위들은 상전께 바삐 달려왔고, 양측은 중간 지점에서 만났다.

류하는 온의 가슴을 살짝 밀었다. 그제야 그는 그녀를 내려 주었다.

“마마! 월빈마마!”

“쉬이, 나는 괜찮으니 목소리 낮춰라. 마른 담요나 좀 가져다주렴.”

잔뜩 울상이 된 궁녀들이 자신을 에워싸자 류하는 현기증을 참으며 나직하게 지시했다.

아랫사람들이 후궁을 챙기는 동안, 온은 곧장 화은에게 걸어갔다.

“황후 전하, 부디 환궁을 명해 주십시오.”

공손히 청하는 태도였으나, 어쩐지 고압적인 말투였다.

몇몇은 대장군의 서늘한 위압을 알아채고 괘씸하다 여기며 눈살을 찌푸렸으나, 정작 황후 본인은 침착했다.

“당연히 그래야죠.”

서로 결코 친해질 수 없는 두 사람이었지만, 그때는 형수와 시동생의 생각이 일치했다.

많은 이들이 그토록 고대하던 야유회는 몹시 갑작스레 끝나야 했다.

놀란 후궁들과 회임한 황후는 궁녀들과 호위들과 함께 먼저 돌아갔고, 마구간 관리들과 군졸들은 현장에 남았다. 개중에 몇몇이 간신히 잠잠해진 화의 상태를 자세히 살폈다.

“이건…….”

마구간 관리 하나가 화의 안장을 들쳐 보더니 안색을 굳혔다. 말이 오늘따라 난폭했던 이유가 단숨에 드러났다. 말의 등가죽은 벌겋게 부풀어 두드러기에 가득 뒤덮여 있었다.

“원래 이 말이 피부병이 있었나?”

“그럴 리가요. 어제까지만 해도 분명 멀쩡했습니다.”

관리가 곁에 있던 부하를 돌아보며 날카롭게 캐묻자 부하는 억울하다는 듯 호소했다.

귀하신 분이 모는 애마에 흠이 있는 건 용납할 수 없는 일이기에, 화를 돌보는 관리들도 평소에 화의 건강을 꼼꼼하게 챙겼다.

관리의 말마따나, 어제 마지막으로 확인했을 때만 해도 화의 가죽은 평소처럼 매끄럽고 폭신했다.

“그러면 대체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그건 저도 잘…….”

불쌍한 부하 관리가 절절맬 동안 다른 이들이 말의 상태를 살폈다. 그들은 안장의 냄새를 맡고 가죽을 한참 관찰했다. 누군가 끝내 결론지었다.

“누군가 안장 밑에 연고를 발랐소. 소량으로 쓰이면 약이지만, 과도하게 바르면 독인 듯하오. 두드러기가 일 만도 하지.”

미지의 누군가 약초 또는 독초를 곱게 짓이겨 안장 아래 붙였다.

처음에는 그저 살짝 맞닿는 정도라 화가 알아채지 못했으나, 류하가 올라타면서 무게가 더해지자 독풀이 뭉개지면서 피부에 스몄다. 그제야 화도 통증을 느끼고 폭주를 시작한 것이다.

자초지종을 어느 정도 파악한 관리들의 낯빛이 점점 더 창백해졌다. 누가 감히 이런 짓을 저질렀을까?

아무리 월빈이 힘없는 뒷방 후궁이라도 해도, 어쨌든 황제의 여인이었다. 개인적으로 월빈을 아끼고 말고를 떠나서, 일이 시끄러워지는 걸 그 누구도 원치 않았다. 그런데, 왜.

일단, 고작 말단 관리인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알아낸 바를 고분고분 상부에 보고한 뒤 자신들은 무대에서 은근슬쩍 물러났다.

어쩌면, 그냥 그대로 묻힐 수도 있는 일이었다. 결과적으로 아무도 다치거나 죽은 건 아니니, 약아빠진 황실 사람들이 비겁하게 눈감기를 택했다면 그저 단순한 사고로 매듭지어졌으리라.

하지만 누군가는 오히려 약아빠졌기에, 이날의 아찔한 사고를 훗날의 큰일로 부풀렸다.

마구간의 말이 날뛰어 후궁이 죽을 뻔했다는 보고가 황제에게도 전해졌다.

황실을 능멸한 죄는 짐승에게도 해당하기에, 원칙대로라면 화도 죽임을 당해야 했다.

다만, 류하 본인이 통사정하는 바람에 말은 목숨을 건졌다.

누군가 사건을 더 꼼꼼히 조사해야 한다고 소심하게 아뢰었지만, 말들의 미용을 담당하는 말단 관리 하나가 내쳐지는 걸로 상황은 일단락되었다.

관리는 맹세코 연고에 독초가 섞여 있는 줄 몰랐으며, 자신은 여느 때처럼 털가죽에 윤기를 내기 위해 정해진 약재를 발랐을 뿐이라고 읍소했다.

그 하소연이 무색하도록, 관리는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졌다.

류하는 한바탕 감기를 앓았다. 차가운 호수에 한 번 들어갔다 나온 결과였다.

함께 물에 빠졌던 온은 멀쩡했다. 확실히 군인이라 튼튼하긴 한가 보다.

류하는 혼자 건강한 그를 얄미워하는 대신, 그가 혼자라도 무탈하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류하는 그날 자신을 충동적으로 껴안았던 온을 떠올리면 아직도 아찔했다.

몹시 짧은 순간이었고, 워낙 정신없는 순간이라 멀리 있던 사람들은 못 봤을 확률이 높지만, 그래도, 그러면 안 되니까.

‘위험해…….’

요즘 너무 아슬아슬했다. 기름통 옆에서 불장난을 치는 느낌이었다.

온을 볼 때마다 손끝까지 저릿저릿하게 퍼지는 감각이 연정으로 인한 떨림인지, 아니면 불안에 기인한 전율인지, 가끔은 그것조차 헷갈렸다.

호위를 핑계로 그를 곁에 두는 게 두려워졌다. 차라리 폐하께 아뢰어 호위대장을 교체해 달라고 부탁해야 할까. 그런데, 그러면서 대체 무슨 이유를 대?

온은 벌써 약 두 달째 류하를 호위해 왔고, 그동안 류하는 이에 대해 불평 한마디 없었다.

그러다 갑자기 황제를 찾아가 다짜고짜 교체를 요청하면, 황제는 과연 뭐라 생각할까.

의아해할까? 의아해할 수도.

의심할까? 그러면 안 되는데.

멈춰야 하는데 멈추는 방법을 몰랐고, 밀어내야 하는데 밀어내는 것조차 위태로웠다.

온이 호위 무사로 제 곁을 맴도는 한 그와 물리적으로 거리를 두는 건 불가능했다. 그러니 심리적으로 거리를 벌려야 할 텐데, 현재 그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차라리 바닷물을 죄다 퍼내라고 해. 하늘로 올라가 태양의 조각을 가져오라고 해 봐.

오히려 그런 것들이 쉬울 것 같아. 마음대로 되지 않는 마음을 억지로 뜯어내는 것보다는.

류하는 절망했다. 사랑이 이렇게 고통스러운 일인 줄 미처 몰랐다. 설령 누군가 미리 알려 줬더라도, 시작하지 않았으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그 와중에 류하의 처소에 달갑지 않은 손님이 찾아왔다. 상대방이 먼저 방문을 청했고, 류하는 거부할 만한 처지가 아니었기에 별수 없이 승낙했다.

“무슨 일로 찾아오셨습니까?”

승낙하긴 승낙했으나, 자신의 삐딱한 성격까지 온전히 참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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