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그렇게 류하는 제 본연의 모습으로 자신의 직속 궁인들과 호위들의 마음을 이미 사로잡은 뒤였다.
하지만, 이곳에 모인 다른 후궁들의 아랫것들은 달랐다.
‘그새 말 타는 법을 배웠다며?’
‘그래 봤자 우리 마마님만 할까.’
‘온 대장군도 참 딱하지, 원. 명색이 폐하의 동생인데, 이방인 계집애 뒤치다꺼리나 하고. 심지어 기마도 가르쳐 주시고.’
그들은 거의 전부 싸늘한 호기심을 품고 류하를 관찰했다. 어디 당신이 말 타는 것 좀 한번 보자, 이런 식이었다.
아직 훨씬 순진한 어린 수습 궁인들만이 꾸밈없는 감탄을 품고 류하를 바라보았다. 우와, 예쁘다. 월국에는 원래 저렇게 미인이 많나?
“그대와 같이 달리게 돼서 영광이에요, 월빈. 한 번쯤은 꼭 이러고 싶었거든요.”
하빈은 말에게 다가가며 나긋하게 속삭였고, 류하는 예의상 웃어 주었다. 궁인들이 두 사람의 손에 각자 말고삐를 쥐여 주었다.
아끼는 짐승을 마주하자 류하는 마음이 조금 진정되는 느낌이었다. 그녀는 능숙하게 말에 오른 뒤 화의 머리를 소중하게 쓰다듬었다.
화가 콧김을 뿜었다. 나지막한 투레질이 평소보다 조금 날카롭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류하는 그냥 기분 탓이겠거니, 했다.
‘지금 내가 너무 긴장해서 그렇게 들리는 거야.’
“두 분 다 준비를 마치시면 말씀해 주십시오.”
호루라기를 든 궁인이 공손히 아뢰었다. 하빈이 먼저 돌아보았다.
“나는 이제 준비됐다.”
“나도 마찬가지야.”
류하도 질세라 대뜸 말했다. 실제로 심신의 준비는 이미 마쳤다.
여기서 더 어물거린다고 해서 갑자기 승마 실력이 늘 것도 아니고, 이제는 정말 최선을 다할 일만 남았다.
온 대장군, 적어도 그대의 이름에 누가 되지는 않을게요. 류하는 굳센 다짐과 함께 호루라기 소리에 맞춰 박차를 가했다.
“오, 제법 뛰는데?”
궁인 하나가 불경하게도 중얼대는 소리가 들렸다. 온은 고개를 휙 돌려 그 사람을 매섭게 쏘아보고 싶었지만, 그럴 시간조차 아까워서 참았다. 그는 류하를 보느라 바빴다.
‘부디 무사히 완주하십시오, 류하 님.’
그는 점차 멀어지는 연인의 뒷모습을 쳐다보며 불안감을 되삼켰다.
지금 그에게 자신의 스승으로서의 명예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류하가 압도적인 꼴찌를 해도 좋으니, 부디 사고 없이 무탈하게 돌아오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말들이 힘차게 달렸다. 처음에는 모든 게 순조로웠다.
아직도 기마의 아찔한 느낌이 조금 무섭기는 했지만, 류하는 기본적으로 이 속도와 역동성이 주는 해방감을 즐겼다.
곧, 하빈이 슬금슬금 앞서기 시작했다. 류하는 흔들리지 않았다.
말을 모는 자세만 봐도 저보다 숙련된 게 명백한 사람이 자신을 이긴다 해서 딱히 자존심이 상할 것도 없었다.
“이랴! 하!”
그래도 역시 너무 큰 차이로 지기는 싫다는 생각에 류하는 적극 가속을 시도했다.
한데 재촉하면 재촉할수록 말은 빨라지기는커녕 오히려 시끄럽게 투레질하며 조금씩 더뎌졌다.
‘뭐야, 왜 이래?’
류하는 당황했다. 혹시 화가 어디를 다쳤나? 잠시 멈추고 상태를 확인해 봐야 하나? 시합하다 말고 갑자기 그래도 돼?
‘아니야, 일단은…….’
본인의 과욕이었을까. 아니면, 그저 너무 미숙했던 탓일까.
다른 이들이 염려하거나 비웃었듯 류하는 아직 기마가 익숙하지 않았고, 그런즉 말이라는 짐승에 대해서도 비교적 무지했다.
“이랴!”
멀쩡하던 말이 갑자기 이상 증세를 보인다면, 자존심이고 시합이고 뭐고 당장 멈춰서 상태를 먼저 살폈어야 했다. 그게 가장 안전했다.
하지만 류하는 너무 안일했다. 그러지 말걸.
“히히힝!”
참다못한 화가 성난 소리를 뱉으며 사납게 몸부림쳤다.
안 그래도 온몸이 간지럽고 쓰라린데 이 눈치 없는 주인은 제게 채찍질만 해대니, 머리꼭지가 돌아 버릴 만도 했다.
화는 분노와 통증을 극적으로 표출했다. 짐승은 인간의 의지를 무시하고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류하는 화들짝 놀라 채찍마저 놓치고 화의 목을 와락 끌어안았다.
“어어어, 화야, 잠깐만!”
류하는 다급하게 비명을 질렀지만, 화가 인간의 언어를 알아들을 리는 만무할뿐더러, 어차피 알아듣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이제는 지켜보던 다른 사람들도 경악하며 비명을 질렀다. 류하는 그들에게 도움을 요청할 생각을, 아니, 실은 그런 생각을 할 겨를조차 없었다.
지금 떨어지면 죽는다는 단순한 진리를 깨달은 끝에, 류하는 눈을 질끈 감고 말에게 매달렸다.
‘안 돼, 안 돼, 안 돼……!’
본능적인 공포가 울컥울컥 솟구칠 때마다 류하는 이를 악물고 삼켰다.
이 와중에도 신통력을 써서 정체를 들킬 수 없다는 생각이 절박하게 떠올랐다.
‘들키면 안 돼, 절대 안 돼…….’
잡귀의 딸. 요괴의 핏줄. 예로부터 얼마나 많은 멸시의 말을 들었으며, 별궁에서 얼마나 많은 유폐의 나날을 견뎌야 했던가.
핍박으로 인한 상처는 생각보다 깊어서, 목숨을 위협받는 중에도 그녀를 망설이게 했다.
“월빈마마!”
한편, 궁녀들 사이에서 비명이 커졌다. 제하는 거의 기함할 지경이었다. 훤아도 비슷한 심정이었고, 수연은 창백했다.
예빈도 창백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녀의 안색은 종이와 같았다. 마치 못된 무대를 꾸몄으나, 일이 이렇게까지 커질 줄은 전혀 상상하지 못한 사람처럼.
“가서 월빈의 안전을 확보해라!”
화은이 벌떡 일어나 고압적으로 지시했다. 그녀도 당황한 건 마찬가지였다. 자신이 제안하고 주최한 야유회에서 난데없이 사람이 죽게 생겼으니, 다급해질 만도 했다.
화은이 명령한 대상은 마구간의 관리들이었으나, 그들보다 훨씬 빠르게 움직인 자가 있었다.
온은 오래 굳어 있지 않았다. 처음에는 류하의 위기를 보고 아찔해서 경직했던 그는 딱 한 박자 만에 정신을 차리고 순식간에 땅을 박찼다.
명령도 없었고, 계산도 없었다. 오직 본능만 있을 뿐. 류하를 구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온은 오랜 장수답게 날렵하게 말에 올랐고, 고삐를 당겨 빠르게 접근했다.
그는 새하얗게 얼어붙은 하빈을 지나쳐 단숨에 류하를 따라잡았다. 그가 외쳤다.
“월빈마마!”
익숙한 음성을 듣고 류하는 고개를 들었다. 그것조차 용감한 일이었다. 조금이라도 삐끗하면 당장 떨어질 것처럼 말의 속도는 위태로웠다.
“마마, 제가 지금 그쪽으로 가겠습니다!”
“뭐라고요?”
온이 외치자 류하는 기가 막혔다. 아니, 이 미친 사람아, 여길 왜 와. 지금 내 상황 안 보여? 그대도 같이 떨어지면 어쩌려고?
“하지 마세요!”
류하는 날카롭게 경고했으나, 겁먹어 가냘프게 갈라진 목소리는 별로 강제성이 없었다.
온은 언젠가처럼 또다시 호위 대상의 의견을 가뿐히 무시하고 제 판단대로 행했다. 이번에도 그 판단이 모두에게 이롭기를 바랄 뿐이었다.
온은 몸을 세워 말의 등을 밟더니 허공을 딛듯 날쌔게 뛰어올랐다. 류하는 그 아슬아슬한 곡예에 감탄할 틈도, 경악할 여유도 없었다.
온은 류하의 바로 뒤에 안정적으로 착지했다. 대체 뭘 어떻게 해야 저렇게 민첩해질 수 있는지 류하는 스치듯 궁금해했다.
온의 팔이 류하를 감싸며 그녀 대신 말고삐를 쥐었다. 류하는 제 등의 맞닿은 연인의 견고한 가슴을 느끼며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이 두려운 순간에 그대가 함께 있어서 매우 기쁘지만, 그대도 같이 위험해지는 건 끔찍하게 싫어.
“월빈마마, 곧 같이 뛰어내릴 겁니다.”
“뭐요?”
“뛰어내릴 거라고요.”
“방금 못 들어서 되물은 게 아니거든요?”
“저기 물 보이시죠? 빠지면 차라리 안전합니다.”
“어어, 대장군, 잠깐…….”
온은 어느덧 과감하게 고삐를 조종하여 말의 몸부림 같은 질주를 한쪽으로 몰아가고 있었다.
말이 향하는 곳은 들판에 있는 예쁜 호숫가였다. 류하는 이제 거의 해탈했다.
그래, 맨땅에 떨어져 몸이 박살 나는 것보다는 물속에 처박히는 게 낫겠지. 하하하.
전장에서 숱한 죽음의 위기를 극복한 대장군은 낙마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머리가 아득한 와중에도 냉정하게 지형을 계산했다.
이곳은 소풍 장소나 사냥터로도 쓰이는 들판. 내 기준으로 좌측에는 숲, 우측에는 호수. 차라리 호수로 가자.
온이 기억하기로, 물의 가장자리는 익사할 만큼 깊지 않았다. 그렇다고 몸이 잠기지 않을 정도로 얕지는 않았다.
그러니 저곳에 빠진다면 적어도 숨이 막혀 죽거나 바닥에 머리를 부딪쳐 즉사하지는 않을 것이다.
‘말에서 내려야 해.’
평소에 온순한 화는 지금은 왜인지 미쳐 날뛰고 있었다. 이 아이가 얌전히 멈춰 줄 생각은 없는 듯하니, 우리가 뛰어내려야 한다.
‘이 속도로 낙마하면 최소 중상이야.’
죽음을 피하면 기적이리라. 그러니 지면은 목적지에서 배제되었고, 온은 호수에 집중했다.
“지금입니다.”
온은 류하의 귓가에 결연하게 속삭였다. 류하는 대답할 틈을 놓쳤다. 애초에 온도 답을 기대한 건 아니었다.
그는 단숨에 고삐를 놓았고, 말이 물가를 아슬아슬하게 스치는 순간 류하를 안은 채 허공으로 몸을 날렸다.
몸이 붕, 뜨는 아찔한 느낌과 코끝에 훅, 끼치는 땀 내음에 이어 풍덩, 하고 세상이 새까매졌다.
차갑다. 한여름인데 차가워. 겨울이었다면 익사가 문제가 아니라, 저체온증으로 사망했겠지.
“푸하! 헉!”
너무 깊지도 얕지도 않은 무해한 수심이었다.
심연처럼 깊은 호수의 안쪽과 달리, 뭍과 맞닿은 변두리는 가라앉는 순간 발끝이 바닥을 긁을 정도는 되었다.
“푸하, 으, 웩…….”
입 안으로 밀려든 써늘한 흙탕물이 불쾌했다. 그러나 그런 반감은 지엽적인 문제에 불과했다. 류하의 주된 감정은 순전한 안도였다.
살았다. 살았어. 온몸을 휘감은 차갑고 축축한 감촉조차 불쾌하기에 앞서 그녀가 살아남았다는 증거였다.
뭍에 더 가깝게 떨어진 류하는 우선 땅에 필사적으로 기어올랐다. 물을 몇 모금 뱉어 낸 그녀는 다급히 뒤돌아 온을 향해 손을 뻗었다.
“대장군, 올라오세요!”
류하를 감싼 채 장렬하게 물에 잠겼던 온은 조금 늦게 중심을 되찾고 첨벙대는 중이었다.
그는 류하의 손을 맞잡았고, 류하는 열심히 끌어당겼다.
온은 한 손으로 류하의 손을 감싸고 나머지 손으로 땅을 짚은 채 영차 몸을 밀었다.
물에 빠진 생쥐 꼴로도 그는 충분히 민첩했고, 곧 둘 다 무사히 뭍에 널브러졌다.
“후아, 하…….”
“마마, 괜찮으십니까?”
“네, 괜찮아요, 괜찮습니다. 그대는…….”
류하는 살짝 횡설수설하며 온을 걱정스레 돌아보았다. 그러다 곧, 숨이 막혔다. 아까 말 위에서 두렵게 매달리던 때와는 다른 의미로.
“정말, 정말 다행입니다.”
온이 그녀를 와락 끌어안은 탓이었다. 연인의 품속에서 류하는 말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