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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궁의 은밀한 연서 (74)화 (74/123)

74화

온은 제게서 멀어지는 연인의 눈길이 아쉬워 조금 더 묵묵히 맴돌다가, 끝내 고삐를 틀어 조용히 선을 그었다.

류하와 후궁들은 들판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먼저 와서 기다리는 황후의 그녀의 궁인들이 있었다. 몸 상태를 고려하여 혼자 천천히 움직이느라 먼저 출발했다고 한다.

“월빈, 어서 와요.”

류하가 가마에서 내려 반갑게 다가가자 훤아가 상냥하게 인사했다. 류하는 기꺼이 마주 웃었고, 그사이 수연은 예빈 쪽을 흘긋했다.

‘얌전하네?’

수연은 조금 놀랐다. 해비가 월빈을 살갑게 부르는 걸 듣고 또 은근슬쩍 도끼눈을 뜨고 있을 줄 알았더니, 예빈은 태연하게 하빈과 대화 중이었다.

‘뭐, 여기까지 와서 날 세우기가 귀찮았나 보지.’

수연이 보기에, 예빈의 훤아를 향한 애착은 다소 도를 넘었다.

그냥 자매나 친구처럼 의지하는 정도가 아니라, 거의 짝사랑에 매달리는 가련한 아이 같달까.

‘저 사람이 누굴 좋아하든 말든 내가 알 바는 아닌데, 남한테 피해 끼치는 건 다른 문제야.’

수연은 남몰래 눈살을 찌푸렸다. 그대의 해비마마를 향한 집착이 동경이든 연정이든 그냥 애정 결핍의 결과든 상관없어.

하지만 제발, 그대의 감정은 그대 혼자 간직해 줘. 날카로운 형태로 마구 분출해서 애꿎은 타인까지 찌르지 말고.

‘하여간, 진짜 귀찮았었지.’

수연은 거의 아련한 눈빛으로 과거를 되새겼다.

해비마마가 내게 잘해 주는 게 고까워서 내게도 몹시 성가시게 굴었었지? 그때만 떠올리면 진절머리가 났다.

‘이제는 월빈 차례인가.’

부디 예빈이 이번에는 훨씬 빨리 지쳐 나가떨어지기를 수연은 기도했다.

수연은 여전히 월빈이 많이 가여웠다. 외국에서 끌려온 저 공주님은 비교적 편안한 황궁 생활을 했으면 했다.

수연이 기도하고 다른 후궁들은 삼삼오오 모여 떠들고 궁인들과 호위들이 대열을 갖추는 사이, 황궁의 마구간지기들이 말들을 데리고 나아왔다.

“간만의 야유회인데, 내기라도 하는 게 어떻습니까? 뭐라도 하나 걸고 시합하죠.”

후궁 하나가 쾌활하게 제안했다. 평소에도 밝고 둥글둥글한 태도로 다른 여인들과 평탄한 관계를 유지하며 처음부터 류하에게도 호의를 보였던 이였다.

“이건 어떨까요? 둘씩 대결해서 지는 사람이 이기는 사람에게 자신의 소중한 물건을 하나씩 주는 거예요.”

아니,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해? 류하는 진지하게 되묻고 싶었으나, 내기를 즐기는 휘국의 풍습을 알고 현명하게 침묵했다.

하여튼, 월국 사람들과 비교해 호승심이 넘쳐나는 민족이었다.

“좋습니다.”

“좋아요.”

화은은 논의에 보태지 않고 그저 마련된 의자에 가만히 앉아 후궁들을 너그럽게 지켜보았다. 귀엽게 노네, 이렇게 말하는 듯한 인자한 눈빛이었다.

그러나 류하는 저 인자함마저 거북했다. 저 우아한 가면을 한 꺼풀 벗겨 내면 저 아래 얼마나 깊은 차가움이 도사리고 있을까, 해서.

그 차가움은 종국에 잔인한 칼이 되어 내가 사랑하는 사내를 찌르고 말까. 지금 당신의 태중에 있는 아이는 정말 내 연인을 위협할 황자야? 부디, 내게 대답해 줘.

결국 류하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기에, 화은도 아무런 대답을 주지 않았다.

류하는 화은을 외면하며 도로 다른 후궁들의 대화에 집중하는 척했다.

“그러면 우리, 먼저 제비를 뽑도록 하죠. 누가 누구와 시합할지 결정하도록 해요.”

화은을 제하면 숫자가 홀수라 조금 애매해졌다. 결국 연회에서 공연할 때처럼 둘, 둘, 셋으로 나누는 쪽으로 후궁들은 의견을 모았다.

아무도 대놓고 말하지만 않았지만, 여섯 명의 휘국 출신 후궁 모두 내심 자신이 월빈과 맞붙게 되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월국에서는 여인들이 기마를 배우지 않는다며. 황궁에 오고 나서 온 대장군께 수업을 받았다고는 하는데, 속성으로 익힌 재주가 뭐 얼마나 대단하겠어?

다정한 훤아와 공정한 수연마저 그런 생각을 품었다. 꼭 악의는 없더라도, 경험이 부족한 상대와 붙는다면 객관적으로 제게 유리할 테니 나름 요행을 바라는 마음이 있었다.

“어머, 그대도 홍색이네요, 월빈.”

빨간색, 파란색, 하얀색 제비로 조를 가르던 중에 하빈이 생긋 웃었다. 류하는 겉으로 완벽하게 마주 웃었다. 속으로는 마구 욕하는 중이었다.

“그러게요. 그대와 시합하게 되어 영광이에요, 하빈.”

류하는 은연중에 자신의 상대가 훤아나 수연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그들이 자신과 친하다 해서 자신을 봐줄 거라는 기대는 눈곱만큼도 없었지만, 적어도 자신이 그들을 상대로 진다면 그들이 패배한 자신을 비웃지는 않을 거라는 확신은 있었다.

반면, 하빈의 반응은 장담할 수 없었다. 예빈은 류하를 대놓고 미워했고, 하빈은 그런 예빈과 친했다.

게다가 하빈의 가문은 식민지 침략전으로 부강해진 권세 높은 무인 가문이었다.

그녀의 집안사람들은 대체로 이민족을 깔보는 경향이 있었고, 이는 하빈이 월국의 공주를 대하는 태도에 고스란히 묻어났다.

뭐, 이제 와서 안 하겠다고 할 수도 없고. 어차피 누구와 대결하든 질 것을 예상한 바였기에, 류하는 그냥 마음을 비우기로 했다.

‘그래, 어차피 질 거, 누구한테 지든 무슨 상관이냐.’

류하의 체념은 빨랐다. 자만도, 거짓 겸손도 모르는 그녀는 자신의 승마 실력을 매우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내가 이 사람들 상대로 어떻게 이겨.’

비록 류하가 기마를 열심히 배웠고 뒤늦게 타고난 재능을 나타내긴 했지만, 보수적인 월국에서 나고 자란 그녀는 스무 살이 되어서야 처음 말에 올랐다.

다른 후궁들의 분석은 정확했다. 휘온과 같은 유능한 스승 아래에서 아무리 성실하게 수학했다 한들, 그녀는 절대적으로 너무 늦게 시작했다. 학습의 기간은 비교조차 될 수 없었다.

제하는 그녀에게 본때를 보여 주라 했지만, 류하는 처음부터 너무 쪽팔리지 않을 정도로만 최선을 다해 뛸 계획이었다.

어차피 질 텐데 뭘 그리 열심이냐며 설렁설렁 달리는 창피한 꼴을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우선, 류하 본인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고.

무엇보다 저기 내 스승님이 지켜보고 있기에, 그런 한심한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그대가 보고 있으니, 지더라도 멋지게 져야지.

적어도 그대가 날 제대로 가르치지 않았다고 사람들이 떠드는 일은 없게 할 거야.

류하는 온을 슬쩍 훔쳐봤다. 아무도 의심하지 못하도록, 매우 짧게.

그 스치는 순간으로 그에게 전하고 싶었다. 나, 그대를 위해 정말 열심히 하겠노라고.

온은 웃어 주지 않았지만, 분명 눈이 마주쳤다. 그때 그의 눈빛은 다정했다.

“그럼 예빈마마와 성빈마마가 먼저 시합하겠습니다.”

제비뽑기의 결과에 따라 궁인이 아뢰었다.

류하는 저쪽의 조합이 자기 쪽보다 훨씬 난감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냥 지면 그만이지만, 저쪽은 이미 불꽃을 튀기는 것 같은데.

“둘이 괜찮겠지요?”

류하와 같은 생각인지, 다른 후궁 하나가 중얼거렸다. 그러자 하빈이 침착하게 대꾸했다.

“설마 죽이기야 하겠어요.”

류하는 하빈을 미심쩍게 쳐다보았다. 누가 누굴 죽여? 예빈이 성빈을? 성빈이 예빈을? 아니면 둘 다 서로를?

황제의 총애를 두고 다투는 일은 없어서 이 나라 내명부는 궁중 암투도 없이 참 평화롭구나, 이딴 식으로 생각했었는데, 이제 보니 여기도 전쟁터였다.

서로 무척이나 싫어하는 두 후궁이 각자 고상한 자태로 말에 올랐다.

예빈은 성빈을 사납게 노려보았고, 성빈은 예빈을 차갑게 무시했다. 누가 봐도 각각 승리욕이 타오르는 상태였다.

지켜보던 류하는 살짝 머리가 아팠다. 평화주의자 훤아는 울상이었고, 하빈은 걱정하는 눈빛이었으며, 누군가는 몹시 흥미진진하다는 표정으로 눈을 초롱초롱 빛냈다.

화은은 덤덤했고, 온은 초조했으며, 궁인들과 군졸들은 각자 다채로운 눈빛으로 구경했다.

그사이 두 여인은 각자 말고삐를 고쳐 잡았다. 시합의 시작을 알리는 호루라기가 울렸다.

수연과 예빈은 정확히 동시에 출발했다. 뿌연 흙먼지가 힘차게 일어났다가 바람에 날려 흩어졌다. 하나로 묶은 두 여인의 머리칼이 까만 비단처럼 공중에 나부꼈다.

황족의 품위 및 시합의 형평성을 지키기 위해 지켜보는 다른 후궁들과 황후는 환호를 내지르지 않았고, 윗사람들이 조용했기에 아랫사람들도 점잖게 지켜봐야만 했다.

류하는 눈으로 점점 멀어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쫓았다.

‘와, 정말 빠르네.’

그녀는 표정이 대놓고 음침해지는 걸 막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점점 자신감이 하락했다.

‘제발, 너무 뒤처지지만은 말자.’

부디 자신이 스승의 수치가 되지 않기를 기도하며 류하는 하빈을 훔쳐보았다.

류하와 무심코 눈이 마주치자 하빈은 싱긋 웃었다. 그 미소가 마치 내가 너를 조져 버리겠다, 는 다짐처럼 보여서 류하는 내심 질색했다.

수연과 예빈은 각자 전력으로 질주를 마친 뒤 출발선으로 돌아왔다. 예빈이 아주, 아주 간발의 차이로 이겼다.

예빈은 의기양양해서 수연을 쳐다보았고, 수연은 무심한 척 시선을 피했다. 둘 다 이마에 땀방울이 반짝였다.

“그대의 소중한 물건은 뭘까요, 성빈? 벌써 기대되네요.”

예빈이 도도하게 찔러댔다. 수연은 침착하게 대답했다.

“최근에 친척에게서 받은 귀한 비단이 있습니다. 그대에게 한 필 선물하죠.”

그 정도면 충분한 상품이었다. 예빈은 즐겁게 말에서 내렸고, 수연도 지상으로 돌아왔다.

“수고했어요, 성빈.”

훤아가 다정하게 달랬다. 수연은 고개만 꾸벅였다. 예빈은 그새 우울해져서 훤아를 흘긋했다.

한편, 수연에게는 정말 미안한 말이었지만, 류하는 훤아처럼 착하게 친우를 위로할 겨를이 없었다. 그녀는 바로 다음으로 다가온 본인과 하빈의 차례에 온통 신경이 쏠려 있었다.

“두 번째로, 하빈마마와 월빈마마의 시합이 있겠습니다.”

드디어. 하빈과 월국의 공주가 나란히 앞으로 향하자 모두의 이목이 그쪽으로 쏠렸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둘 중 후자가 주인공이었다. 그게 꼭 좋은 뜻만은 아니었다.

월빈의 직속 궁인들은 이제 외지에서 온 상전을 모시는 게 익숙했고, 나름 류하에게 정도 붙였다.

처음에는 겉으로 품위를 유지할 뿐, 속으로는 은근히 저 이방인 계집을 깔봤었다. 그러나 실제로 한동안 모셔 본 결과, 류하는 합리적이고 친절한 주인이었다.

제게 건방지게 굴거나 일에 소홀한 아랫사람을 보면 매섭게 혼냈으나, 없는 잘못을 만들어 내거나 괜한 시비를 걸지도 않았다.

고국에서 거의 방치된 채 자랐다더니, 왕족답지 않게 친근하고 소탈한 매력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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