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대장군한테는 미안하지만, 나는 이번에 황후께서 꼭 아들을 낳았으면 좋겠어.’
하빈은 결국, 처음의 결론으로 돌아왔다. 그녀가 과자를 하나 더 와그작, 씹었다.
‘이번에도 딸이면 좀, 위험해.’
지난 5년간 륜은 정치를 안정시켰고, 정복과 숙청을 통한 피의 통치와 적당히 자비롭고 현명한 성군의 모범을 보여 자신의 입지를 탄탄케 했다.
그토록 유능한 군주였으나, 여전히 륜은 적이 많았다. 비천한 외가는 오래전부터 약점이었고, 아비의 목을 직접 벤 과거는 더더욱 약점이었다.
게다가 륜이 옛 황태자의 지지 세력을 말끔히 도려내면서 그에게 원한을 품은 이들도 수두룩하게 생겼다.
또한 과감한 팽창을 통해 식민지를 짓밟고 유가족을 만들었으니, 국경 안팎으로 황제를 향해 칼을 가는 사람이 적잖을 것이다.
심지어 아직 후계도 없고, 황후의 친정은 귀족 중에서 한미한 가문이었다. 륜은 생각보다 위태로웠다.
‘당신이 망하면 당신 혼자 망하는 게 아니랍니다, 폐하.’
하빈은 음침하게 과자를 삼켰다. 단맛도 너무 많이 먹으니, 목이 막혔다.
‘보통 폐주의 후궁이 편히 살지는 못 하지요.’
만약 황제가 무너지면, 황후도 반드시 죽는다. 계집이라는 이유로 과소평가됐을 뿐이지, 황후가 황제의 얼마나 중요한 참모인지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았다.
후궁들은? 글쎄. 아직 새내기인 월류하는 파악이 덜 되었지만, 나머지 여섯의 궁극적 목표는 전부 명료하고 같았다. 즉, 가늘고 길게 살아남기.
그 말인즉슨, 후궁 중 아무도 여태 정치에 개입한 적이 없다는 뜻이었다.
‘만약 반정이 일어나도, 설마 우리까지 죽이기야 하겠어? 우리가 한 게 없는데. 그냥 사내들이 원하는 대로 멍청한 꽃처럼 하하 호호 예쁘게만 있었지. 다행히 아들을 가진 것도 아니고.’
해비마마가 딸을 낳으셔서 얼마나 다행인지. 현재 휘국 황실에서 서자의 존재는 몹시 껄끄러운 화제였다.
후궁이 아들을 낳았는데 나중에 황후가 덜컥 황자를 낳아 버리면, 예전의 패륜이 반복될지 누가 알까.
‘하지만 우리의 가족은, 장담 못 해.’
여인들은 권력을 금지당했지만, 그 여인들의 아비와 오라비와 남동생은 다르다.
후궁들의 친정 모두 내로라하는 권세가 가문이었다. 그들 모두 륜에게 힘이 되어 주고 있었다.
‘단씨 가문 꼴이 나는 건 사양이야.’
하빈은 절박하게 생각했다. 설령 자기 혼자 운이 좋아 목숨을 건진다 한들, 소중하고 친숙한 이들이 전부 죽는다 하면 대체 무슨 소용이랴.
“황궁 사람들이야 늘 예민하죠. 새삼스러울 게 뭐 있나요.”
요즘 다들 예민하니 적당히 하라는 하빈의 말에 예빈은 퉁명하게 대꾸했다.
그러다 그녀는 또 잠깐 조용해지더니, 문득 말했다.
“그나저나, 황후 전하께서 예정대로 말타기를 진행하신다고 하셔서 조금 놀랐어요.”
예전에, 황후는 내명부의 수장답게 후궁들을 모아 다과회를 열면서 나중에는 다 함께 말이라도 몰자고 지나가듯 말한 적 있었다.
볕 좋은 여름날에 함께 승마를 즐기는 것쯤이야 휘국 사람들의 흔한 유희이니 그리 이상하게 여길 것도 없었다.
다만, 이제 회임하여 격한 움직임을 조심해야 할 황후가 최근에 다시 얘기를 꺼냈다는 게 놀라웠다.
“뭐, 전하께서 직접 말을 모시는 건 아니니까요. 이번에는 그냥 구경만 하신다면서요?”
하빈이 어깨를 으쓱했다. 자신은 임신한 적 없으니 잘 모르겠지만, 듣자 하니 임부들도 거동을 조심한답시고 너무 실내에만 틀어박혀 있어도 건강에 좋을 게 없다더라.
생각해 보면, 해비도 딸을 회임했던 시절에 나들이도 나가고 산책도 즐기고 할 건 다 했던 것 같다. 임부도 하고 싶은 건 하고 살아야지, 뭐.
“겸사겸사 바람 좀 쐬시겠다는 거겠죠. 나는 불만 없어요. 안 그래도 최근에 좀이 쑤셨는데.”
하빈도 대부분의 다른 휘국 사람과 마찬가지로 어릴 적부터 기마를 배웠다.
친정에서 비교적 자유롭게 살아갈 때는 감사할 줄을 몰랐는데, 황궁에 갇혀 행동마다 조신함을 강요받으면서 과거의 쾌활한 취미가 얼마나 소중한지 알았다.
다행히도 황후와 다른 후궁들 역시 말 모는 걸 좋아해서 이런 나들이가 종종 있었다. 하빈은 오랜만에 약속된 일탈을 기대하며 입맛을 다셨다.
“월빈도 거기서 말을 몰겠죠?”
예빈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더니 짓궂게 웃었다.
“이런, 궁금하네요. 남쪽 여인의 기마 솜씨는 과연 어떨지.”
몹시 형편없을 거라 기대하고 꺼낸 말이었다. 그리 근거 없는 추론도 아니었다.
월국을 비롯한 대륙 남방의 국가들을 북부보다 훨씬 보수적이어서 여인들에게 승마도 무술도 심지어 가무도 잘 가르치지 않는다고 들었다.
배움이 짧은 그 야만족 계집이 그날 다른 이들이 보는 앞에서 얼마나 수치를 당할지 상상하자 예빈의 예쁜 얼굴에는 못된 미소가 맴돌았다.
“꽤 잘 타는 편일걸요? 온 대장군이 황명을 받고 월빈한테 기마를 가르쳐 준다고 들었어요.”
하빈은 친구의 들뜬 기분에 태연하게 찬물을 끼얹었다. 예빈은 잠시 뾰로통해졌다가, 곧 묘한 눈빛으로 돌아왔다.
“그래요?”
예빈은 잠시 뭔가를 궁리하느라 바빴다. 하빈은 다시 과자에 집중하느라 바빠서 굳이 친구의 속내를 캐묻지 않았다.
어차피 하빈이 물었더라도, 예빈은 답해 주지 않았으리라. 그녀는 꽤 엄청난 장난을 구상하는 중이었으니.
이후 시간이 흘렀고, 나들이 날짜가 도래했다.
류하의 향수는 생각보다 적었다.
만약 살아 계신 어머니를 월국에 두고 왔다면 나날이 심장이 찔리는 듯한 고통으로 고향을 그렸을 텐데, 어차피 내가 애타게 사랑하던 그분은 더는 이승의 어디에도 없다.
오히려 류하는 생각보다 휘국의 많은 부분이 제 취향에 딱 들어맞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예컨대, 류하는 휘국의 여름을 선호했다. 남쪽의 월국은 겨울이 온난한 대신 여름이 덥고 습한 기후였다.
휘국의 동계는 때로 살인적일 만큼 추웠으나, 하계는 맑고 아름다웠다.
봄철의 끝자락에 황궁에 도착한 류하는 북방의 매서운 추위를 아직 몰랐다. 그녀는 오직 갓 도래한 여름날을 알았고, 그 산뜻함과 따스함에 감탄했다.
“기분이 좋아 보이십니다, 마마.”
승마와 소풍을 앞두고 상전의 머리칼을 정돈해 주며 제하가 무심코 지적했다. 류하는 밝게 답했다.
“응, 날씨가 좋으니까.”
색유리처럼 파란 하늘 아래에서 애마를 몰고 돌아다닐 생각에 류하는 벌써 들떴다. 하편, 제하는 옆에서 경쟁심을 불태웠다.
“부디 오늘 좋은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마마. 본때를 보여 주십시오.”
좋은 시간이 되는 것과 본때를 보여 주는 것과 서로 무슨 상관인지는 모르겠으나, 류하는 궁녀의 이글대는 시선을 보고 순순히 장단을 맞췄다.
“알겠어, 제하야. 걱정하지 마.”
제하도 기본적인 눈치는 있었다. 소국에서 왔다는 자격지심이 그녀를 더욱 예민하게 만들었다.
휘국의 콧대 높은 인간들이 류하를 깔보는 걸 알고 그녀는 신경을 한층 곤두세웠다.
월국에서 온 우리는 말을 몰 줄 모른다고 뒤에서 비웃고 다닌다지? 오냐, 어디 한번 오늘도 실컷 떠들어 봐.
제하는 마치 본인이 오늘 기마의 주자인 양 주먹을 불끈 쥐었다.
“역시 오늘도 마마는 아름다우십니다.”
제하는 전투적으로 선포했다.
외모가 사람의 전부는 아니지만, 기왕이면 화려한 모습이 수수한 모습보다 기선 제압에 유리했다.
그리고 월류하 공주님은 굳이 공들여 꾸미지 않아도 그 자체로 화려한 사람이었다.
“그래, 나도 알아.”
류하는 장난스럽게 대꾸했고, 눈매를 접으며 시원하게 웃었다. 그 모습마저 눈부셔서 제하는 마음껏 뿌듯해했다.
류하는 제하와 다른 궁녀들을 데리고 처소 밖으로 나왔다. 그곳에서는 어김없이 온이 기다리고 있었다.
“모시겠습니다, 월빈마마.”
대장군은 공손히 인사했고, 후궁은 살짝 웃어 준 뒤 금세 시선을 거두었다. 너무 오래 바라보면, 너무 짙게 웃어 주면 사람들이 의심할까 봐. 늘 두려움을 동반하는 사랑이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 가마가 준비되어 있었다. 오늘 황궁의 여인들은 유람을 위해 황궁 밖에 있는 숲으로 향했다.
도성을 가로지르면 광활하게 펼쳐지는 그곳은 때마다 황제와 귀족들의 사냥터로 쓰이기도 했다. 오늘은 황후와 후궁들이 승마를 즐길 무대가 되었다.
류하는 가마에 올라탔고, 대장군과 나머지 호위들은 말에 올랐다. 궁인들은 걸어서 뒤따랐다.
가마는 느리게 움직였다. 류하는 열린 창문을 통해 스미는 산들바람을 만끽했다.
‘이러니까 옛날 생각나네.’
류하는 턱을 괴고 가만히 곱씹다가, 피식 웃었다. 나는 가마에 갇혀 이동하고 그대는 감시하는 자로서 나와 나란히 이동하던 그때를 추억처럼 돌이키다니.
계산해 보면, 그리 옛날도 아니었다. 이제 한 달, 아니지, 두 달쯤 지났나.
고작 한두 달 전에 그대를 처음 만나 쌍방으로 엄청난 첫인상을 각인하고, 함께 죽을 고비도 넘기고, 내 섣부른 고백 때문에 잠시 흔들렸다가, 어쩌다 보니 여기까지 왔어.
고작 한두 달밖에 되지 않았다니. 평생을 이렇게 견뎌 온 듯한 기분에 류하는 문득 지쳤다.
“마마, 불편하신 점이라도 있으십니까?”
어느새 창문 바로 옆까지 다가온 온이 부드럽게 물었다.
그저 모시는 이의 안부를 살피는 여상한 음성이었으나, 고개를 들고 시선을 맞춘 류하는 그의 눈에서 애정을 보았다.
“아니요. 전부 괜찮습니다.”
류하는 고개를 저었다. 그래, 이 정도면 차고 넘치게 감사하지. 불과 한두 달 전에만 해도 그대는 나를 목석처럼 대했고, 나는 황제와 억지로 동침하는 운명을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이제 그대는 단지 깍듯한 척하며 진심 어린 온정으로 내 상태를 살피고, 나는 여태 누구와도 강제로 동침한 적 없으니, 나는 참 많은 것을 받았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많은 것을 쉼 없이 원하는 인간의 탐욕이란 참 신기했다.
“다행입니다. 혹시 필요하신 게 있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온은 다시 간격을 벌렸다. 류하는 그게 못내 아쉬워서 침착하게 거짓말했다.
“네, 그럴게요.”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해 달라고? 내가 그럴 수 있을 리 없어.
지금 당장 내가 필요하고 원하는 건 그대를 자유롭게 끌어안고 입술을 포개는 거라 고백한다면, 그대는 이뤄 주지 못할 거잖아.
끝을 모르는 인간의 탐욕이여. 류하는 정면으로 시선을 돌려 온을 외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