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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궁의 은밀한 연서 (72)화 (72/123)

72화

야밤의 산책을 핑계로 그대를 같은 공간으로 끌어내면서도 그대를 염려했다. 호위를 명목 삼아 내 곁을 맴도는 그대에게 묻고 싶었지. 괜찮냐고. 정말 괜찮으냐고.

황후가 정말로 아들을 낳고, 지금까지는 그대를 지켜온 황제가 후계자의 앞길에서 모든 방해물을 치우기 위해 그대를 버리면 어떡해?

비록 별궁 속 화초이자 천덕꾸러기로 자랐지만, 류하도 태생부터 왕족이었다. 권력의 역학과 정치판의 치열함에 대해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

어린 황자나 왕자에게, 장성한 숙부는 독이야. 그래서 때로는 조카가 피해자가 되고, 어떨 때는 삼촌이 억울하게 죽지.

이번에는 둘 중 어느 쪽일까. 과연 모두가 행복할 수 있는 상황이 올까.

순진한 조카와 상냥한 삼촌이 함께 사이좋게 지내면 안 되는 걸까.

“저는 전쟁터에서도 무탈했습니다.”

온은 이제 앞을 보며 문득 말했다. 류하는 빠끔히 고개를 들었다.

모든 감정을 지워낸 듯, 달빛 아래에서 마치 대리석처럼 아름답고 담담하게 존재하는 사내가 보였다.

“그곳에서도 끝끝내 살아 돌아와 지금 이렇게 당신 앞에 있죠.”

그러나 그가 다시 시선을 내려 그녀와 지그시 눈을 맞출 때, 류하는 온이 대리석 같은 게 아님을 알았다.

그대는 한낱 돌덩이가 아니야. 그러기엔 너무 따스하고, 부드럽고, 애틋해.

“그러니 이번에도 무사할 겁니다. 당신을 위해서라도.”

숨소리보다도 나직한 저음. 너무 작아서 주변의 아랫사람들은 하나도 듣지 못한 말. 오직 한 분만을 위한 약속.

연모할 수 없지만 연모하는 여인을 위해, 온은 다짐했다.

무책임한 약속이었다. 아직도 황제와 황후를 적으로 생각하지 않는 그는 자신이 끝까지 무사할 거라고 함부로 약조할 자격이 없었다.

나는 결국, 온화한 게 아니라 유약한 것뿐일까. 전장에서 죽이고 또 죽이며 제법 단단해졌다고 생각했거늘, 나는 아직도 누군가에게 적의를 품는 게 너무 어려워.

비록 모두가 사이좋게 지내는 세상을 꿈꾸는 고리타분한 태자로 자랐지만, 온도 태생부터 황족이었다. 권력의 역학과 정치판의 치열함에 대해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

만약 첫째 형수님이 아들을 낳는다면 그쪽에서 자신을 더욱 적극적으로 제거하려 들 거라 이해했다.

아마 이번에는 형님도 버티지 못하리라고, 버티지 않으리라고, 그렇게 짐작했다.

<만약 그 선택을 내리지 않으면, 나중에 내가 더 후회할 것 같거든.>

형님은, 이미 나를 버렸어.

<그러면 마땅히 후회가 덜한 쪽을 택해야겠지요.>

아들을 지키고 나를 버리는 게 후회가 덜한 쪽이라고 내게 털어놓은 거나 마찬가지야.

원망하지 않았다. 원망해야 하나? 이미 5년 전 죽었어야 할 목숨이거늘.

당신은 내 모친을 인질 삼아 나를 전장으로 내몰았고, 원래 내 몫이었던 제국의 권좌를 빼앗았으며, 내가 사모하는 단 하나의 여인을 당신의 아내로 잡고 있지.

그런 당신을 미워하지 못하는 나는, 정말로 그냥 무른 건가 봐. 그토록 숱한 이의 피로 검을 적시고서도 속마음은 굳어지지 못했나 봐.

어릴 적 길고양이를 보며 귀엽다고 속삭이던 소년이 떠올라서, 도저히 저주할 수가 없어.

“이제 내려 드리겠습니다, 마마.”

어느새 일탈은 끝났고, 류하의 욱신대는 발목을 핑계 삼아 잠시나마 맞닿았던 비밀스러운 연인들은 다시 갈라서야 했다.

상전의 처소가 가까워지자 궁인들이 쪼르르 앞서가 방문을 미리 열었다. 온은 느린 걸음으로 문을 통과했고, 류하를 의자에 소중히 내려놓았다.

“고맙습니다, 대장군.”

류하는 궁인들의 귀를 의식하여 공손하게 말했다. 이어서, 마지못해 명령했다.

“이제 물러가세요.”

류하는 상상해 보았다. 그대가 나를 딱딱한 의자가 아닌 푹신한 침대에 내려놓고, 내 뺨을 감싸고, 그때 폐가에서 그랬듯 입 맞추는 모습을.

나는 대체 발목이 언제 아팠냐는 듯 그대의 목을 끌어안고 격렬하게 마주 입 맞추겠지. 옷이 한 겹씩 헐거워질 거야. 숨결이 한 가닥씩 뒤엉킬 동안.

황제와 초야도 거른 탓에 여태 한 번도 실전을 경험해 본 적 없는 류하는 과거에 자신이 몰래 탐독하던 통속 소설을 이리저리 짜 맞추며 야한 상상에 젖었다.

그러나 그 상상도 결국 망상이었고, 류하는 슬퍼졌다.

우리 둘은 아직도 서로 사랑하면서, 둘 중 아무라도 먼저 마음이 식기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

누군가를 원하는 건 괴로워. 그 원하는 이를 결코 떳떳하게 품에 안을 수 없을 때는 말이야.

우리의 연정은 불륜이고, 역심이야. 그래서 늘 외로워.

“명 받들겠습니다, 마마.”

온은 덤덤하게 고개를 꾸벅였다. 그를 바라보는 류하는 접질린 발목보다도 꿰뚫린 심장이 더 아팠다.

그래, 바라만 볼 수밖에 없는 사랑은 이토록 괴롭고 외롭고 아프지만.

대상이 사라져 바라볼 수조차 없는 것보다는 수백 배, 수천 배 더 나아.

“평안한 밤 되십시오.”

지금 내게 저토록 깍듯하게, 무심하게 가면을 쓰고 인사하는 사내가, 언젠가 황궁 암투의 피바람에 휩쓸려 내 곁에서 영영 뜯겨 나갈까 봐 두려워.

품에 두지 않아도 좋아. 옆이 아니어도 돼. 부디 내 뒤에라도 있어 줘. 평생 뒷모습만 눈에 담는 사랑을 하더라도.

당신이 무사히 나와 같은 하늘 아래에서 숨 쉬고 있다는 사실만 안다면, 나는 어떠한 역경이 들이닥쳐도 굳셀 수 있을 것 같아.

“그대도 평안한 밤 되세요.”

류하는 나직이 인사했다. 온은 괜히 더 한 번 고갯짓으로 인사한 뒤 돌아섰다. 묵례를 두 번이나 하고 나자, 머뭇댈 핑계조차 없어졌다.

궁녀들이 류하의 발목을 치료하기 위해 다가왔다. 류하는 묵묵히 환부를 내맡겼다. 그러면서 이 아이들이 아닌 다른 사람이 자신의 부르튼 살갗을 만져 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 분명 괴롭고 외롭고 아파.

그러나 그대를 영영 잃는 것보다는 나아.

류하는 오늘 밤도 문 앞에서 굳건한 그림자로 자신을 지킬 사내를 생각하며, 그의 안위를 위해 기도했다.

화창한 여름날, 후궁들은 무료한 시간을 보냈다. 하빈은 예빈의 처소에 있었다.

“어젯밤에 월빈이 산책 도중에 넘어져서 발목을 삐었대요. 참나, 웃기지 않아요? 이 나이 먹고도 발을 헛디뎠다나, 뭐라나.”

“세상에, 예빈, 제발. 오늘은 월빈 욕 좀 그만하세요.”

예빈의 처소에 놀러 온 하빈은 궁인들이 대접한 과자를 오물대며 상쾌하게 당부했다. 그러자 예빈이 쌀쌀맞게 협박했다.

“당장 그 과자 뱉어 내요.”

“미안합니다.”

다과를 내온 쪽에서 음식을 갖고 위협하자 손님 쪽은 빠르게 꼬리를 내렸다.

예빈이 뚱하게 침묵하는 사이 하빈은 과자를 꼴깍 삼켰고, 차로 입가심한 뒤 제안했다.

“발목을 삐었으면 병문안이라도 가야 하지 않을까요?”

“싫어요. 절대 싫어.”

“왜요, 놀리는 재미가 있을 것 같은데. 그 깜찍한 공주님이 창피해하는 꼴을 보고 싶다고요.”

“하빈, 변태예요?”

“아무리 변태여도 그대만 할까.”

서로 허물없는 두 후궁은 꾸준히 옥신각신했다. 해비와 비슷한 시기에 입궐한 예빈은 궁에서 산 지 5년째였고, 하빈은 4년쯤 되었다.

“한 번쯤 화끈하게 골려 주고 싶은데. 갈수록 거슬려요.”

예빈은 류하를 떠올리며 스산하게 중얼댔다. 그 앳되고 예쁘장한 외국 공주를 떠올리자 괜히 배알이 뒤틀렸다.

못된 텃세에, 이방인을 향한 편견에, 해비를 둘러싼 약간의 질투가 뒤엉켜 월빈을 향한 예빈의 깊은 반감을 완성했다.

“적당히 해요, 예빈. 괜히 일 크게 만들지 말고요. 안 그래도 요즘 다들 예민한데.”

하빈은 현명하게 권고했다. 예빈은 잠시 골똘하게 침묵했다.

예민하다는 건, 며칠 전 황제의 폭탄선언을 염두에 둔 말이었다.

황후가 회임했고, 만약 아들이 태어나면 바로 태자로 책봉될 것이다. 결코 가볍지 않은 발언이었다.

개인적으로, 하빈은 황후께서 하루빨리 아들을 낳으시길 바랐다.

폐하께 어서 후계자가 생겨야 그분이 꼬박꼬박 나를 비롯한 후궁들의 처소에 들르시는 걸 멈출 테니까.

‘차라리 남은 평생 독수공방하는 게 낫지.’

하빈은 남몰래 질색했다. 다른 후궁들과 마찬가지로 그녀도 사랑 없는 정략혼을 위해 황제에게 팔려 오듯 시집왔다.

약 4년이 지난 지금 많이 적응하긴 했으나, 여전히 주기적으로 이뤄지는 동물적인 교합의 행위는 전혀 달갑지 않았다.

‘황자가 생기면 더는 후계를 위해 후궁들과 억지로 합방하지 않으실 거야. 오히려 극도로 꺼리실걸. 그분이 겪은 일들이 있으니.’

관습적으로, 황실의 도덕은 다산을 장려했다. 황손이 많으면 많을수록 만약을 대비할 대체품 후보가 넉넉하니까.

황자들은 그렇게 물건 취급을 받았고, 황녀들은 그냥 병풍이었다.

‘정말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말도 안 되는 제도야, 이건.’

하빈은 속으로 혀를 찼다.

딸은 제위를 이을 수 없으니 그저 예쁜 장식품이나 인형쯤으로 여겨지고, 아들들은 서로 경쟁하며 견제하길 강요받는다.

만약 황녀에게도 군주의 자격이 주어졌다면 황제는 이미 한참 전에 후궁들을 찾는 걸 그쳤을 거다. 화은이 오래전 딸을 낳았으니, 그 아이를 후계로 책봉했겠지.

어쨌든, 하빈이 생각하기에 휘륜은 절대 왕성하게 여인을 취해 아들을 여러 명 낳는 일 따위는 벌이지 않을 것이다.

현 황제는 외아들이 아니라서 핍박받았다. 자기가 장자인데, 동생이 적자라서.

선황의 아들이 한 명뿐이었다면 논란의 여지도 없이 륜이 태자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온이 뒤늦게 태어났고, 족보는 화려하게 꼬였다.

대장군을 제외한 이복남동생 전원을 죽이고 보위에 오른 황제가 과연 아들을 여럿 가져 과거의 참극을 반복하려 할까.

아니. 아마 아닐 거라고 하빈은 판단했다. 그런즉, 이번에 부디 황자가 태어나기를 그녀는 간절히 빌었다.

‘그런데 황자가 태어나면, 대장군은?’

하빈은 과거의 황태자를 떠올렸다. 이복형을 닮은 준수한 얼굴.

원래는 나이를 더 먹고 나서 거대한 제국의 가장 고귀한 자리를 물려받았어야 할 당사자였다.

‘……폐하가 대장군을 죽이려나?’

아니면 황후가 대장군을 죽일 때 그냥 눈감아 주시려나? 차마 직접 손을 더럽히기는 싫고, 그래도 제거는 해야 하니, 아내의 손을 빌리는 형식으로.

만약 정말로 그런다면, 참 가증스럽구나. 그리고 가련하도다.

친부의 목은 손수 내리쳤으면서 이복동생에 관해서는 무른 척, 착한 척 내숭이나 떨다니.

어쩌면 그건 패륜 황제의 한 가닥 남은 양심을 위한 마지막 발악일지도 모른다고 하빈은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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