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후궁의 은밀한 연서 (71)화 (71/123)

71화

5년 전부터 나는 복수를 위해 덤으로 주어진 삶을 살았다. 이제 와서 그 뜻을 의심받고 삶의 목표를 부정당하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겠어.

어차피 언젠가는 가족의 곁으로 돌아갈 예정이었다. 재회의 시기를 조금 앞당기는 것뿐이야.

부모님과 동생들과 친절했던 아랫사람들을 두고 혼자 살아남은 죄, 그리고 그들의 원수를 갚기 위해 스스로 양심과 도덕을 저버린 죄.

황제의 통치를 흔들기 위해 시체들을 되살려 망자를 모독하는 짓까지 저지르지 않았더냐?

저들을 죽인 제국에 복수할 기회를 주는 거라고 거창하게 변명하긴 했지만, 사실 나도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

나는 단지 나의 삿된 원한을 위해 원통하게 죽은 이들의 무덤을 파헤쳤음을.

여러모로 나는 인륜을 저버렸구나.

그런 나를 벌하기 원한다면, 그냥 지금 죽여.

“저항하지 않겠습니다. 나리가 아닌 황제의 끄나풀이 저를 죽인 걸로 꾸미세요. 그러면 저는 죽어서도 쓸모가 생기겠죠. 저를 따르는 단씨 일족의 분노를 황제에게 겨눌 수 있을 테니.”

가윤은 휘결을 노려보며 나지막이 재촉했다. 어서 죽여, 나를 죽여 봐. 네가 감당할 수 있다면 나를 죽여 봐.

거만하게 도발하는 눈빛으로, 어쩌면 정말로 죽고 싶다는 마음으로, 가윤은 기다렸다.

“……그대가 죽으면, 단씨 일족의 분노가 문제가 아니오. 그 도깨비 놈의 살의가 문제지.”

휘결은 마침내 대꾸했다. 그는 천천히 몸을 굽혀 직접 단검을 주웠다. 가윤이 멈칫했다.

휘결은 다시 일어나 가윤에게 단검 손잡이를 내밀었다. 가윤은 망설이다가, 검을 잡았다.

“그대의 목숨을 걸고 나를 시험할 필요는 없소. 그런 건방진 태도는 내게 도움이 되지 않아. 그대는 오직 행동으로만, 눈에 보이는 결과로만 그대의 충정을 입증하면 돼요.”

휘결은 차분하게 타일렀고, 가윤은 단검을 품에 집어넣으며 그를 묵묵히 바라보았다. 휘결은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대장군을 꾀어내시오. 그대가 제안한 대로.”

이제는 그가 그녀를 시험할 차례였다. 과거에 가장 유력한 태자비 후보였다는 이유로 지금도 반정 세력 내에서 심심찮게 눈총을 받는 그대. 어디, 그대의 결백을 한번 입증해 봐.

“그자가 역적의 딸과 몰래 만나고 다닌다는 소문이 두루 퍼지게 하시오. 황제가 그자를 버릴 수밖에 없도록. 그리고 그자가 정녕 고립됐을 때, 다시 그자에게 접근하시오.”

“네, 나리.”

“절대 들켜서는 안 되오.”

“명심하겠습니다.”

“그대가 살아서 대장군과 밀회를 가진다는 소문만 나야지, 그대가 실제로 잡혀서는 안 되오. 만약 꼬리가 밟힌다면…….”

“자결하겠습니다. 원칙대로.”

가윤은 덤덤히 대답했다. 이 자리에 주안이 없었기에, 그토록 쉽게 약속할 수 있었다.

“그래, 당연하지.”

휘륜은 근엄하게 속삭였다. 그가 입술로만 빙긋 웃었다.

“그대의 활약을 기대하겠소, 가윤 낭자.”

가윤 낭자. 가윤 낭자라. 태자 당신도 나를 그렇게 불렀지.

다정했던 당신과 수줍었던 나는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전혀 동화 같지 않은 이 세상에서 나는 반드시 하나를 버려야 하기에, 과거의 따스한 추억보다 미래의 냉혹한 복수를 택했어.

“실망 따위 안겨 드리지 않겠습니다.”

가윤은 고개 숙여 인사했다. 그녀가 원하는 냉혹한 미래를 실현해 줄 사내에게.

반군의 수장은 계속해서 웃었다.

또다시 류하의 처소 앞에서 보초를 서는 날, 고요한 복도와 달리 온의 머릿속은 시끄러웠다. 며칠 전 연회에서 황후의 회임 소식이 알려진 날부터 줄곧 그래 왔다.

그의 내적 소란을 뚫고 한 가지 자그마한 소리가 전해졌다. 온은 돌아봤고, 곧 입술을 꾹 물어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입매가 저절로 부드러운 미소로 휠까 봐 두려웠다.

“대장군. 내가 이 시간에 산책하자고 하면 화낼 겁니까?”

류하는 빠끔히 문을 열고 내다보았다. 창밖에서 스미는 달빛에 물들어 그녀의 매혹적인 얼굴은 은색으로 어룽졌다. 온은 한순간도 바라보지 않는 게 아까워서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제가 어떻게 감히 마마께 화를 내겠습니까? 저는 한낱 호위인걸요.”

온은 짐짓 새침하게 답했고, 이번에는 류하가 새어 나가는 웃음을 참고자 입술을 꼭 물었다.

“한낱 호위이기 전에 폐하의 동생이고, 내 인척이죠.”

류하가 속닥속닥 반박했다. 온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도 여전히 당신이 저보다 지위가 높습니다, 형수님.”

이제는 이런 농담도 가능했다. 때로는 우리 둘 다 그냥 미쳐 버린 게 아닐까, 그런 생각도 들었다.

우리가 미쳤든 제정신이든, 월광 아래 은은히 드러난 서로의 얼굴이 몹시 소중한 건 사실이다.

“어쨌든, 화 안 낸다는 거죠?”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당신께 화낼 수 없습니다, 마마.”

“그것참 다행이네요. 그대는 화나면 좀 무서울 것 같아요.”

“제가 마마께 화낼 일은 없을 겁니다.”

“왜요, 내가 그대보다 지위가 높아서?”

“아뇨, 당신은 제가 화낼 만한 일을 하지 않으니까.”

대화는 야트막한 저음으로 이어졌다. 누군가 들었다면 숨소리로 알았으리라. 류하는 빙긋 웃으며 지시했다.

“궁인들을 불러 주세요. 잠이 오지 않아서, 조금 걸어야겠어요.”

잠이 오지 않는다는 건 사실이었지만, 동시에 핑계이기도 했다. 이렇게라도 미욱하게나마 발버둥 쳐야 종종 그대와 스치기라도 할 테니까.

“명 받들겠습니다, 마마.”

온은 류하의 뜻을 이해했다. 자신의 마음이 그녀와 일치했기에, 너무 쉬운 일이었다.

온은 가볍게 꾸벅한 뒤 옆 복도로 가서 당직 중인 궁인들을 불렀다.

호위대장 온과 다른 호위 하나, 그리고 서너 명의 궁녀들이 후궁과 달밤의 산책을 함께했다.

궁녀들과 호위들은 평소처럼 조금 멀리 떨어져 걸었고, 류하는 달빛 아래를 천천히 가로질렀다.

온은 다른 이들보다 아주 살짝 앞서며 류하의 뒷모습을 잠잠히 눈에 새겼다.

“악!”

문득, 류하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땅에 풀썩 엎어졌다. 온은 놀라서 자동으로 달려갔다. 그가 류하 옆에 몸을 낮췄다.

“마마, 괜찮으십니까?”

“윽, 네, 괜찮아요…….”

으아아, 창피해! 류하는 왼쪽 발목을 문지르며 내적으로 절규했다. 방금 그녀는 정말 그냥 걷던 도중에 발을 헛디뎌 넘어졌다.

살다 보면 이런 일이야 한 번쯤 일어날 수 있지만, 하필 그 한 번이 지금이어야 했다는 사실이 퍽 괴로웠다. 넘어질 거면 차라리 혼자 있을 때 넘어질 것이지.

“별로 안 괜찮으신 것 같습니다만.”

온은 심각하게 중얼대더니, 불쑥 손을 내밀어 류하의 발목을 살짝 눌렀다.

류하는 제 맨살에 닿은 온의 감촉에 기겁할 틈도 없이 진심으로 아파서 짧게 신음했다.

“아!”

“거봐요, 바로 반응하셨잖습니까. 조금 부은 것 같기도 하고요.”

“아니, 지금 그걸 확인하려고 다짜고짜 환부를…….”

류하는 아픈 와중에도 어이가 없어서 눈을 부릅떴다. 괜찮은지 안 괜찮은지 알아내려고 대뜸 다친 곳을 공격하다니, 이건 대체 어느 나라 진단법이죠?

“송구합니다. 그러니까 제가 그런 극단적인 방법을 사용하기 전에 미리 솔직하게 대답해 주셨으면 좋았으련만.”

온은 뻔뻔하게 속삭였고, 류하는 다시 기가 막혔다. 이때쯤 온의 부하가 다가와 대장군과 나란히 류하 옆에 몸을 낮췄다.

“월빈마마, 괜찮으십니까? 발목을 다치셨나요?”

“그런 것 같네. 넘어지면서 접질렸나 봐.”

이번에 류하는 상세히 설명하는 쪽을 택했다. 다른 호위의 질문에는 훨씬 자세하게 대답하는 류하를 보고 온은 잠시 뚱해졌다. 그러다 곧 정중한 태도로 아뢰었다.

“방으로 다시 모시겠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팔을 벌렸다. 제게 안기라는 뜻으로 정확히 알아들은 류하는 즉시 정색했다.

“처소까지만 모시겠습니다. 부디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온은 공손히 아뢰었고, 류하는 혹시 이자가 내 부상을 핑계 삼아 사심을 채우려는 게 아닌가 싶어 미심쩍게 쳐다보았다.

사실 류하의 짐작은 정확했지만, 내숭쟁이 온은 전혀 아닌 척 그녀를 진지하게 바라보았다.

“……그럼 나야말로 잠깐 실례하겠습니다.”

우스꽝스럽게 발목을 접질려 혼자 걷지 못하게 된 지금, 온의 도움을 받는 게 가장 합리적이기는 했다.

자기와 체구가 비슷한 비실비실한 궁녀들의 부축을 받는 건 너무 비효율적이었고, 생판 남이나 다름없는 온의 부하에게 덥석 안길 수도 없었다.

결국 법적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을 포장할 여지가 있는 온이 기꺼이 형수님께 팔을 내밀었다.

그는 자신은 외간 사내가 아닌 척 뻔뻔하게 다가왔고, 류하도 불안한 마음을 잊기로 했다.

류하는 온의 목에 어정쩡하게 팔을 감았다. 온은 안정적인 자세로 류하의 다리와 어깨를 감쌌다.

몸이 훅 들리는 느낌에 류하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의 숨결이 뺨을 스쳐서, 곤혹스러웠다.

온은 류하를 품에 담은 채 뒤돌아 그녀의 처소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궁인들과 남은 호위는 초조하게 뒤따랐다.

후궁이 맘먹고 벌인 달밤의 산책은 그토록 허무하게 끝났다.

“많이 아프십니까?”

“견딜 만합니다.”

“……일부러 넘어지신 건 아니죠?”

“설마요.”

온이 심각하게 속닥이자 류하는 코웃음을 쳤다. 그러다 문득 고개를 들었고, 저를 가만히 내려다보는 그의 시선이 너무 가까워서 숨을 삼켰다.

“다행입니다. 일부러 넘어지신 게 아니라서.”

온이 중얼거렸다. 그러더니 여전히 엄숙한 표정으로 덧붙였다.

“저는 또, 마마께서 이렇게라도 저한테 안겨 들어가고 싶어서 고의로 고통을 감내하신 줄 알았습니다.”

“나를 대체 뭐로 보는 거예요? 자학적 변태?”

“아니요, 신체의 통증쯤이야 가뿐히 각오하는 용맹한 여인이라고 생각했습니다만.”

“지금 나 놀리는 거죠?”

“아마도요.”

“정말, 적응 안 돼.”

“뭐가요?”

“그대, 원래 이런 사람 아니었잖아요.”

“그럼 제가 원래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마마께서 보시기에.”

“찌르면 피 한 방울 안 날 것 같은 사람이었죠.”

“엄청난 곡해입니다.”

“네, 그런가 봐요. 이제는 알겠어요.”

“사람은 누구나 찌르면 피가 난답니다.”

온은 농담이랍시고 속살거렸으나, 류하의 안색은 빠르게 굳었다.

온은 자신이 실수했나 싶어 조심히 눈치를 살폈다. 류하는 시선을 피했다.

“그대는 피 흘릴 일이 없었으면 좋겠네요.”

사실, 며칠 전부터. 황후 전하가 회임했다는 사실을 알아낸 뒤부터.

황후 전하가 태자를 낳을 가능성을 진지하게 고민하게 된 때부터. 그대를 걱정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