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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궁의 은밀한 연서 (70)화 (70/123)

70화

만약 정말로 화은이 아들을 낳는다면, 어린 태자의 가장 큰 위협은 장성하고 명망 높은 숙부일 터.

륜은 고통스러운 갈림길에 섰다. 어느 쪽을 택하든 후회하리라. 동생을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해. 또는, 아내와 아이를 살리지 못한 것에 대해.

나는 둘 중 어느 쪽을 버려야 할까.

“대답하기가 그리도 어려우시다면 굳이 애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화은은 륜이 조용히 고뇌하는 걸 보고 쓸쓸히 한 걸음 물러섰다. 명치끝이 아렸고 공포가 차올랐지만, 지금은 내색하고 싶지 않았다.

“다만, 한 가지 더 쉬운 것은 지금 약속해 주세요. 당분간 제가 회임했다는 사실은 비밀로 지켜 주세요. 누군가 저와 제 아이를 해치려 할까 봐 두렵습니다.”

임신 초기, 태아의 건강을 가장 유의해야 할 때 누군가 미래의 황손을 미리 해코지하기 위해 음식에 독이라도 탈까 두려웠다.

오히려 자신의 회임 사실을 알려 사람들이 제 주변에서 특히 조심하도록 단단히 타일러야 하나 고민도 했지만, 생각해 보니 그게 더 위험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어차피 화은은 존귀한 황후이기에 그녀가 회임했든 회임하지 않았든 사람들은 그녀의 곁에서 늘 행동을 조심했다.

그런데 만약 그녀가 회임했다는 사실이 알려진다면, 누군가 위기감 또는 질투를 느끼고 그녀의 빈틈을 노릴까 봐 두려웠다.

화은은 추종자가 많은 만큼 적도 많았다. 때로 그 적은 륜의 적과 일치했고, 때로는 꼭 그런 것만도 아니었다.

“약속하지요.”

륜은 엄숙히 대답했다. 그러더니, 잠깐 괴로운 눈빛을 지었다. 그가 아내의 손을 부드럽게 감쌌다.

“연회 당일까지는 비밀로 할게요. 그리고 그날, 그대가 회임했다는 사실을 그 자리에서 고하겠습니다.”

이건 또 무슨 말이람. 비밀로 지켜 달라고 했더니, 몇 주 뒤에 사람들이 쫙 깔린 자리에서 이를 폭로하겠다고?

화은이 미심쩍게 쳐다보자, 륜이 나직하게 덧붙였다.

“그리고 그날 만민이 보는 앞에서 그대에게 약속하리다. 그대가 아들을 낳는다면, 태자로 삼겠다고.”

화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녀는 떨리는 숨을 뱉으며 잠시 입술을 열었다가, 곧 다시 앙다물었다. 그녀의 손을 싸쥔 륜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이 정도면 대답으로 충분한가요?”

고통스럽다. 갈림길에서 내려야만 하는 선택이.

그러나 내 가여운 동생이 그러했듯, 어영부영 모두를 지키려 하다가 결국 모두를 잃는 것보다는 나아.

어느 쪽을 택하든 후회할 거라면, 그나마 견딜 수 있는 후회를 택해야지.

내가 막판에 또 마음이 흔들려 갈팡질팡할 때, 아우님 그대마저도 내게 그렇게 말했어.

“그 선택을 내리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데, 말이 선택이지 사실상 선택지는 없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회할 것 같으면, 그대는 어떻게 대처할 건가?”

“꼭 그 선택을 내려야만 하는 이유가 따로 있나요?”

“있지. 있어. 만약 그 선택을 내리지 않으면, 나중에 내가 더 후회할 것 같거든.”

“그러면 마땅히 후회가 덜한 쪽을 택해야겠지요.”

아우님, 그대가 나를 보며 그대 입으로 직접 말했어.

그러니 내가 그대를 저버리는 일에 대해서, 너무 나만을 탓하지 마.

“그래. 그래야겠지.”

뭇사람이 보는 앞에서 선포하고 나면, 더는 돌이킬 길이 없다.

설령 화은이 이번에 딸을 낳더라도, 황제가 황후의 아들을 태자 삼겠다고 약속한 이상, 정말, 정말 최후의 상황이 오지 않는 한 온이 황태제가 될 일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 최후의 상황이 오기 전, 륜은 온을 잘라 낼 생각이었다.

형의 그런 의지를 깨달은 밤, 온은 한숨도 자지 못했다.

제11장. 계략

황후의 회임 소식을 듣고 반정 세력도 들썩였다.

“젠장, 변수가 하나 더 생겼군.”

“황후가 정말로 아들을 낳으면 어떻게 되는 거요?”

“어떻게 되긴 뭐가 어떻게 돼요. 황태자까지 함께 죽이면 되는 거지.”

“쯧. 그래도 황녀면 더 수월할 텐데. 대장군 하나만 제거하면 되는 거니까.”

“황자든 황녀든, 황후가 아예 출산을 하지 못하게 막는 방법도 있소.”

“황후를 제거하자는 뜻인가요? 그게 가능할까요?”

“지금이 가능성을 따질 때요? 황제도 죽이려고 마음먹은 우리인데, 황후라고 불가능할까.”

“꼭 죽일 필요는 없소. 유산하게 만드는 방법도 있어요.”

“어느 쪽이든 일단 황후에게 접근해야 한다는 건데…….”

“온 대장군을 이용하세요.”

잠자코 듣고 있던 한 사람이 낮고 맑은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웅성거림이 잦아들면서 시선이 한쪽으로 쏠렸다. 이목이 모인 곳에 가윤이 앉아 있었다.

“대장군과 황후가 서로 싸우게 하세요. 아니면 우리가 직접 황후를 해치고, 죄를 대장군에게 뒤집어씌우든가. 그러면 황후도 제거하고 대장군도 끌어내릴 수 있으니, 일거양득입니다.”

조곤조곤한 가윤의 설명에 딱히 흠잡을 부분이 없어서 자리에 모인 사내들은 전부 거북한 기색을 내비쳤다.

그들은 새파랗게 어린 계집이 반정 세력 핵심 인원들의 전략 회의에 동석하는 것 자체가 불편했다.

다만, 가윤의 아비가 명망과 권세가 두루 높았던 단씨 가문의 가주였기에 가윤에게도 발언권이 생겼다.

살아남은 단씨 가문의 일원들, 그리고 피가 섞이지는 않았더라도 집안과 연이 닿았던 사람들은 가윤의 존재를 알고 반정 세력에 합류했다.

죽은 줄 알았던 큰아가씨가 사실 살아 계셨다니, 단순히 살아 계시기만 한 게 아니라 당당하게 가주 나리와 주인마님의 원수를 갚고자 하신다니, 어찌 우리가 손 놓고 보고만 있겠는가.

나이가 젊고 여인이라는 이유로 가윤은 실질적인 권력이 전혀 없었지만, 가문 사람들의 상징적 구심점으로서 때때로 적잖은 역할을 맡았다.

그리고 그녀가 가끔 이렇게 의견을 제시하면, 터무니없는 소리라고 물리칠 만한 구석이 없었다.

“정확히 어떤 식으로 대장군을 이용한다는 뜻이오? 혹 생각해 둔 방법이 있소?”

그때까지는 가만히 경청하던 휘결이 문득 물었다. 가윤은 공손히 조아리며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대장군이 반역을 꾸민 것처럼 의심받게 하십시오. 그러면 황제는 어쩔 수 없이 그를 내치려 할 겁니다. 그때 절박해진 대장군에게 접근해 우리와 손잡으라고 꾄 다음, 그의 손을 빌려 황후를 치면 됩니다. 설령 황후를 치는 단계까지는 다다르지 못하더라도, 황제가 대장군을 완전히 버리게 하는 것만으로도 수확이 클 거라고 믿습니다.”

“대장군이 반역을 꾸민 것처럼 의심받게 하라고? 어떻게?”

“제가 그자와 접촉하겠습니다.”

잠시 정적이 찾아왔다. 가윤은 담담한 표정으로 답변을 기다렸다. 휘결의 눈빛이 골똘해졌다.

“죽은 줄 알았던 역적의 딸과 온 대장군이 비밀리에 만나는 장면을 연출해 그를 반역자로 몰아가자, 이런 뜻이오?”

“그렇습니다.”

“……나랑 잠깐 둘이 얘기 좀 하지.”

휘결과 가윤은 밖으로 나왔다. 이곳은 도성 외곽의 고급 기방으로, 휘결과 그를 따르는 자들이 은밀한 회담을 위해 자주 모이는 곳이었다.

기녀들이 쓰는 하늘하늘한 너울로 얼굴을 가린 가윤은 위화감 없는 모습으로 휘결과 나란히 걸었다.

“할 수 있겠소?”

“할 수 있습니다.”

“나는 지금 그대의 능력을 의심하는 게 아니오. 그대의 충정을 의심하는 거지.”

노골적인 실토에 가윤이 우뚝 멈췄다. 그녀가 굳은 눈으로 휘결을 돌아보았다. 둘 다 싸늘하게 탐색하는 시선으로 서로를 마주했다.

“이 상황에서 제 충정을 의심한다는 건, 저보고 그냥 죽으라는 말씀입니까?”

가윤이 쌀쌀맞게 반문했다.

하나가 배신하면 모두가 발각되어 개죽음을 맞이할 상황에, 나는 네가 배신할까 봐 두렵다고 털어놓는 건 당장 너를 제거하는 게 마음이 편하겠다고 고백하는 거나 다름없었다.

“꼭 그런 건 아니요. 내 어찌 그대와 같은 인재의 죽음을 그리 쉽게 바라겠소? 다만, 싸움에 걸린 자들의 목숨이 너무 많아서 그렇지.”

휘결은 선선히 대답했다. 가윤의 눈매가 더욱 굳었다. 휘결은 그녀를 직시하며 말을 이었다.

“그대는 한때 대장군의 정혼자였죠. 고작 그런 과거 때문에 그대가 흔들릴 만큼 의지가 약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소. 그래도 사람의 마음은 모르는 일이라, 나는 그대의 확답이 필요해요.”

“저는 대장군과 정혼한 적이 없습니다.”

가윤은 이를 악물고 받아쳤다. 나는 정말로 그자와 혼약 같은 거 맺어 본 적이 없는데, 왜 나를 뺀 세상 모든 사람이 내가 그자와 약혼까지 했었다고 믿는지 모르겠다.

“거의 정혼 확정이었죠. 사람들이 얼마나 떠들기 좋아하는지 그대도 알지 않소? 이미 머릿속에 온갖 음모론과 낭만적인 각본이 판치는 이도 있을 거요. 황태자와 아름답게 맺어질 뻔했으나 비극적인 운명 탓에 지금은 적이 돼 버린 여인. 그럴싸한 각본이잖소.”

가윤의 어금니가 더 세게 맞물렸다. 휘결이 조곤조곤 쐐기를 박는 말에 차마 반박할 수가 없었다.

인간의 상상력은 늘 제멋대로였고, 너무 쉽게 자극적인 추문의 씨앗이 되었다.

대장군을 만나 함정을 파겠다고 자처한 여인이 실은 아직도 그를 향한 애틋한 미련을 품고 있다는 망상은 몹시 흥미로웠고, 그럴듯했다.

“그대가 대장군에게 접근해서 그자를 위한 덫을 놓기는커녕 우리의 계획에 대해 그자에게 귀띔하러 간다고 의심하는 사람도 분명 있을 거요. 그런 합리적인 의심을 무릅쓰고 내가 그대에게 일을 맡겨야 할 이유가 있소? 나를 설득해 봐요.”

휘결의 집요한 주장에는 이미 경계심이 깃들었다. 가윤은 이를 깨닫고 눈빛을 한층 싸늘하게 식혔다.

사실, 조금 지치는 느낌이었다. 휘온과 엮이는 게 지긋지긋했다.

“제게는 딱히 나리를 설득할 만한 방도가 없습니다. 제가 아무리 입에 침이 마르도록 말해 봐도, 나리께서 저를 한 번 의심하기 시작한 이상 돌이킬 길은 없겠죠.”

가윤은 뚝뚝하게 씹어뱉었다. 그녀는 품속에 손을 집어넣었다. 가윤이 평소에 감추고 다니는 호신용 단검을 꺼내자 휘결이 움찔했다.

그러나 그녀는 칼집을 벗기지도 않고 무기를 발치에 내던졌다.

“차라리 그냥 여기서 저를 죽이십시오. 그러면 만사 해결 아닙니까.”

가윤이 쏘아붙였다. 휘결은 굳은 눈으로 쳐다보았다. 가윤은 일종의 오기를 품고 맞바라보았다.

설마 진짜로 죽이겠어, 라는 생각과 더불어 차라리 진짜로 죽여 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어지럽게 뒤엉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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