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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궁의 은밀한 연서 (69)화 (69/123)

69화

륜도 같은 생각이었다. 그래서 고뇌했다. 후회가 덜한 쪽을 택해야 한다고 믿었고, 그 논리를 따르자면 애초부터 선택지는 하나뿐이었다.

“그래. 그래야겠지.”

견딜 수 있는 후회가 있고, 견딜 수 없는 후회가 있다. 그뿐이야. 륜은 그렇게 되뇌었다.

“대답 고맙네.”

황제는 대장군에게 정중히 말했다. 그의 미소는 이제 완전히 그쳤다. 그는 이제 입술로도 웃지 않았다.

“황송합니다, 폐하.”

온은 기계처럼 대답했다. 그는 자신의 자비롭고도 잔혹한 형을 이해하려는 시도를 진즉에 포기했다.

“이만 돌아가지.”

아까 불쑥 말을 꺼냈듯 륜은 이번에도 느닷없이 입을 열었고, 온은 당연히 복종했다.

형제는 방금 왔던 길을 거슬러 올라갔다. 기묘한 만큼 짧았던 동행이었다.

형제가 동시에 자리로 돌아오자 음식을 깨작이던 류하는 초조하게 흘긋했다. 둘 다 시야에서 사라지는 바람에 얼마나 불안했던지.

온이 무사하고 륜이 화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눈으로 확인하자, 류하는 그제야 안심했다.

온은 좌석에 앉았다. 륜은 앉지 않고 계속 기립했다. 그제야 객들의 재잘거림이 조금씩 잦아들었다. 악사들은 연주를 그쳤고, 모두의 시선이 한쪽으로 쏠렸다.

“다들 오늘 초대에 응해 줘서 고맙게 생각하오. 뭐, 응하지 않을 거라고 기대한 적은 없지만.”

황제의 낭랑한 음성이 공중을 가로질렀다. 몇몇은 그가 덧붙인 오만한 말에 속으로만 눈살을 찌푸렸다. 그래, 어찌 황제가 초대장을 보냈는데 감히 응하기를 거부할까.

“오늘 내가 그대들을 전부 한자리에 모은 건 종전의 기쁜 뜻을 전하기 위함도 있지만, 또 다른 경사가 있어 만천하에 고하기 위함이오.”

또 다른 경사? 몇몇이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뜻이지?

다른 눈치 빠른 자들의 두뇌는 바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조용히 경악했고 누군가는 희열을 느꼈으며, 누군가는 아직 설마, 했다.

화은 본인은 잠잠했다. 류하의 안색이 서늘해졌다.

“황후가 회임했거든.”

온의 심장은 쿵, 떨어졌고.

“신과 선조들의 보살핌에 힘입어 또 다른 황손이 태중에 내려왔으니, 어찌 경사라 칭하지 않겠소?”

륜은 좌중을 느리게 훑으며 표정의 변화 하나하나를 감상했다.

소리 없는 수군거림, 환희, 충격. 짧게 터졌다가 빠르게 억눌린 적의. 한 발짝 떨어져 흥미를 느끼는 관망.

“내 오랫동안 새 자식이 없어 근심하던 차에 황후로부터 이런 경사로운 얘기를 들었으니, 이 자리에서 미리 하나만 약속하지.”

륜은 이제 화은을 향해 돌아섰다. 그는 자연스레 함박웃음을 그렸다. 그건 최상의 가면인 동시에 완벽한 진심이었다. 남들에게 보여 주기 위함이었고, 또한 심중에서 우러나왔다.

“만일 그대가 황녀를 낳는다면 나는 우리의 딸을 세상의 그 어떤 보배보다 귀히 여길 것입니다. 그리고 만일 그대가 황자를 낳는다면.”

륜은 화은의 손을 쥐고 손등에 입을 맞췄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거룩한 약속을 담아.

그는 다시 입술을 뗐고, 아내를 똑바로 보며 말을 이었다.

“출생과 동시에 태자로 책봉하죠.”

기류가 폭발했다. 환희든 충격이든 적의든 간에 모든 감정이 한 겹씩 짙어졌고, 살짝 심드렁한 듯 평정을 유지하던 이들도 눈빛에 동요를 일으켰다.

온은 잠자코 앞만 바라보았다. 숙덕임에 파묻혀 익사할 것 같았다. 그때, 누군가 외쳤다.

“경하드립니다, 황제 폐하!”

벌떡 일어난 그는 륜의 충신이었다. 그가 마음으로까지 륜에게 충성하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중요한 건 겉으로 드러난 그의 정치적 선택과, 그가 따라야 할 황제의 약속이었다.

“경하드립니다, 폐하!”

“회임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황후 전하.”

곳곳에서 축언이 터졌고, 신하들이 고개를 조아렸다. 후궁들도 하나씩 일어나 황제와 황후를 향해 예를 갖춰야 했다.

류하는 허리를 수그리는 척하며 온을 스쳐봤다. 그의 아득한 시선은 그녀를 고스란히 비껴갔다.

그는 모친을 바라보며 안타까워 몸부림쳤다. 그의 몸부림은 소리도 형태도 없이 침잠했다.

태후는 눈빛에는 절망이 가득했다. 온은 모친의 심정을 이해했고, 눈을 감고 싶었다.

<꼭 그 선택을 내려야만 하는 이유가 따로 있나요?>

본인의 목소리가 귀에 울렸다. 온은 뒤따른 답변을 곱씹었다.

<있지. 있어. 만약 그 선택을 내리지 않으면, 나중에 내가 더 후회할 것 같거든.>

형수님을 선택하지 않으면, 더 후회할 것 같았구나.

<그러면 마땅히 후회가 덜한 쪽을 택해야겠지요.>

나는 그렇게 스스로 나와 어머니의 무덤을 팠다. 차라리 나를 버리지 말아 달라고 매달릴걸.

황후 전하가 아들을 낳으면 당연히 태자로 책봉되겠거니, 하고 단순히 사람들이 넘겨짚게 두는 것과.

모두가 보고 듣는 앞에서 황후가 아들을 낳으면 후계로 삼겠다고 선포하는 건, 하늘과 땅의 간격만큼 거대한 차이를 지녔다.

군주의 말은 결코 가볍지 않으며, 절대 가벼워서도 아니 된다. 영토를 다스리고 백성을 보살피는 자는 작은 몸짓 하나마저도 수많은 타인의 삶에 영향을 미치니.

륜은 이를 알면서도 그 파장을 전부 짊어질 각오로 화은에게 공개적으로 약조했다.

그대의 아들이 보위를 이을 것이다. 이번에 그대가 다시 딸을 낳더라도. 다른 여인이 황자를 먼저 낳더라도. 혹 아이가 병약하게 태어나더라도, 그대의 핏줄이 내 후계가 될 거야.

그러니까, 황태제는 필요 없어.

온은 존재 가치를 잃었다.

륜은 껄끄러운 이복동생을 여태 살려 두며 언젠가 황실의 대를 잇는 데 그를 쓸지도 모른다고 둘러대곤 했는데, 이제 륜 스스로 그 핑계를 깨부쉈다.

“대장군.”

축하와 축복의 아수라장 속에서 륜은 온을 돌아보았다. 온은 묵묵히 고개를 들었다.

형은 평소처럼 다정하게 웃으며, 동생에게 잔잔히 부탁했다.

“그대도 축하해 주게.”

온의 눈빛에 모종의 감정이 스쳤다가 곧 가라앉았다. 그가 아뢰었다.

“경하드립니다, 황제 폐하. 황후 전하.”

온은 형과 형수에게 차례로 머리를 숙였고, 부부는 서로 다른 마음으로 그의 인사를 받았다.

연회는 그렇게 폭로와 더불어 소란스럽게 끝났다.

류하는 끝까지 간절하게 온을 훔쳐봤으나, 눈길은 꿋꿋이 어긋났다.

“폐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몇 주 전, 황후가 아뢰었다. 황제는 고개를 갸웃하다가, 순순히 승낙했다.

“말하세요.”

“온 대장군에 관한 얘기입니다.”

“……그러니까, 말하세요.”

륜은 아내가 동생에 관해 얘기하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화은이 온을 싫어한다는 걸 알았고, 그게 당연하다는 사실이 서글펐다.

어쩌면 나도, 그 아이가 꿈꾸던 동화적인 세상을 항상 동경해 왔던 걸지도 모른다. 내 소중한 사람들이 서로 모두 친하게 지내는, 그런 맑고 예쁜 세상.

화은은 륜을 수수께끼 같은 표정으로 보다가, 몸을 조금 기울여 그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만약 제가 아들을 낳는다면, 우리의 아이를 위해 대장군을 어디까지 해칠 수 있습니까?”

룬이 멈칫했다. 그의 머릿속이 시끄러워지는 순간, 화은은 속닥속닥 덧붙였다.

“폐하께서 그자의 목숨을 지키기 원하시는 걸 압니다. 그러면 유배는요? 위리안치는? 그자가 절대 다시는 도성에 돌아오지 못하도록 벌하시는 건 괜찮나요?”

“왜 이런 걸 묻지?”

륜이 딱딱하게 되물었다. 그 사나운 저음을 듣고 화은은 그를 살짝 밀어냈다. 그녀는 남편과 눈을 똑바로 맞추며 나지막이 실토했다.

“저, 회임했습니다. 태기가 있다고 오늘 어의가 그러더군요.”

륜은 숨을 뱉었다. 화은은 이미 쥐고 있던 그의 손을 더욱 세게 맞잡았다. 구명줄을 잡듯, 또는 원수를 짓누르듯.

“배 속의 아이가 아들이라면, 폐하께서는 이 아이를 위해 어디까지 해 주실 수 있습니까?”

확답을 요구하는 질문이었다.

륜은 표정 없이 화은을 바라보았다. 배 속의 아이를 위해 어디까지 해 줄 수 있냐고? 만약 그 아이가 딸이 아닌, 아들이라면.

그렇다면 당연히 그 아이를 황태자로 삼아야 한다. 그 아이는 적자이자 장자일 테니, 망설일 이유는 없었다. 어느 쪽으로든 조건이 충족됐다.

물론 화은이 또 딸을 낳는다면 고민할 필요도 없을 테지만.

“제가 이번에는 아들을 회임했다고 칩시다. 제가 무사히 황자를 출산해서 폐하께서 황태자를 얻는다고 쳐요. 그러면, 어린 태자에게 상식적으로 누가 가장 큰 위협이 될 것 같습니까?”

당연히, 장성한 숙부. 선황의 적장자. 륜이 살려 둔 유일한 직계 황족. 답은 너무 뻔했다.

“폐하, 부디 대장군을 내쳐 주세요.”

화은은 간곡하게 청했다. 아직 성별조차 모르는 태중의 아이를 위해 그녀는 빌었다.

“죽여 달라고 하지 않겠습니다. 그가 다시는 재기할 수 없을 만큼 심각한 죄를 지어 유배되는 것으로도 족합니다. 황궁에 발도 못 붙이게 해 주십시오. 그를 따르던 무리가 그에게 실망하고 뿔뿔이 흩어지게 해 주십시오. 폐하, 부디 약속해 주세요.”

화은은 가련한 눈망울로 륜에게 매달렸고, 륜은 그 손을 뿌리치지 못해 망설였다. 그는 잠자코 괴로워했다. 두 가지 고통스러운 선택지를 앞에 두고.

그는 동생을 버리고 싶지 않았다. 5년 전에 자신의 다른 동생들과 친아버지까지 직접 베면서 많이 지쳤으니까.

내게 상냥하던 그 아이마저 내가 손수 나락에 처박는다면 나의 나약한 무의식에 지독한 죄책감이 악몽으로 깃들까 봐 여태 주저했다.

하지만, 내가 과연 후회하지 않을 수 있을까. 동생을 애매하게 지키기 위해 아내를 어정쩡하게 외면한다면, 그리고 나와 내 아내의 아이를 제대로 품어 주지 못한다면.

‘위선자.’

륜은 씁쓸하게 자조했다. 그는 온의 우직함을 떠올렸다.

‘나는 아우님 면전에 대고 그렇게 욕했으면서…….’

제발 냉정하게 구는 법을 좀 배우고 오라며 그 애를 전쟁터로 내몰았지.

사실, 거기서 그 애가 죽기를 바랐는지도 몰라. 내가 내 손을 또다시 더럽힐 필요 없이, 그가 명예롭게 전사하기를 원했는지도 몰라.

그런데 지금 자기가 그 올바르고 어리석은 동생과 똑같이 굴고 있었다.

한쪽을 놓지도, 다른 한쪽을 내치지도 못해 양쪽을 미욱하게 붙잡고 전전긍긍하는 꼴이라니.

동생을 짓밟고 싶지 않았다. 온 본인에게 권력욕이 손톱만큼도 없다는 사실도 알았다.

그러나 때로는 상황이 선택을 강요하며, 온이 움직이지 않더라도 그의 주변 사람들이 원해서 그가 휩쓸릴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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