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화은을 온을 미워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온의 어미를 미워했다.
과거의 황후는 당시 1황자비였던 화은을 집요하게 박해했는데, 륜의 주변 사람들을 건드림으로써 륜을 간접적으로 압박하려는 전략이었다.
옛날의 황후는 화은을 매질하기도 하고 불임으로 만들기 위해 독약을 먹인 적도 있었다.
그때마다 온은 모친에게 화를 냈지만, 화은이 보기에는 그런 시동생의 분노조차 같잖은 위선에 불과했다.
왜 그대의 어미에게 화를 내시오? 적어도 그분은 적군과 아군을 구분할 줄이라도 알았잖아.
그대야말로 한심하지. 모든 사람이 사이좋게 지내는 동화적인 망상에 휩싸여 내 낭군을 변호했으면서, 실질적인 위협은 막아 주지 못했으니.
물론, 화은도 염치를 아는 사람이었다. 적어도 온 덕분에 륜이 아예 죽는 건 면했다.
온은 유능하고 명망 높은 황태자였다. 만약 그가 맘먹고 형을 공격하는 일에 가담했다면, 륜은 가망이 없었을 거다.
그런 그대의 온정 또는 오판은 늘 고맙게 여기고 있소.
너무, 매우, 몹시 고마워서, 그대에게 꼭 보답하고 싶어. 죽음이라는 단호한 형태로.
언젠가 꼭, 나의 시동생님. 곱게 저승으로 보내 드릴게요.
화은은 계속해서 우아하게 차를 마셨다. 그사이 태후는 내리 비명을 참았고, 온은 조용히 식사했으며, 륜은 적절하게 분위기를 주도했다. 연회는 점차 무르익었다.
시간이 흘러 귀빈들이 가장 고대하던 부분이 시작됐다. 바로 황후와 후궁들의 공연이었다.
이곳에서는 아직 여인들이 관상용에 가까웠다. 황궁의 어여쁜 꽃들이 아름다운 무대를 보여 줄 것을 기대하며 초대받은 손님들은 기쁘게 떠들었다.
류하는 떨떠름하게 자신의 차례를 기다렸다. 그녀는 아직도 고국과 제국의 문화 차이가 익숙하지 않았다.
만약 월국에서 왕의 아내를 두고 꽃처럼 예쁘네 뭐네 신이 나서 떠들었다면, 목이 잘렸을 것이다. 감히 임금의 여인을 품평한 죄로.
여기서는 후궁의 미모를 치켜세우는 게 오히려 황제를 향한 적절한 아첨으로 여겨졌다.
혼인 전에는 류하가 그랬듯이 얼굴을 꽁꽁 싸매야 하지만, 정식으로 사내에게 엮이고 나면 굳이 그러지 않아도 종속이 입증되니까.
어느 쪽이든 여인을 소유물 취급한다는 점에서는 근본적으로 같았다. 그러나 지금 류하는 그 불의에 조용히 분노할 정신조차 없었다.
‘으아, 긴장돼……!’
이 많은 사람 앞에서 노래라니. 지금까지는 연습 자체에 집중하느라 관객에 대해서는 생각해 본 적 없는데, 막상 차례가 다가오자 맥박이 비정상적으로 빨라졌다.
‘역시, 나는 무대 체질은 아니야.’
환영회 때도 거의 기절할 뻔했었다. 실제로 기절하지 않아서 천만다행이었다.
차라리 까무러치는 게 훨씬 정신적으로 편안할 거라는 생각마저 얼핏 들었지만, 제국의 황족들 앞에서 실신하는 외국인 공주가 되고 싶지 않아서 류하는 꾹 참았다.
황후가 먼저 공연했다. 아름다운 춤이었다.
다음, 후궁 중에서 가장 지위가 높은 해비가 포함된 삼인방이 무대에 올랐다. 류하는 남몰래 심호흡했다.
살짝 후들대는 다리는 겹겹의 치마폭이 가려 주었다. 그리고 저 앞에, 그대가 있다.
류하는 좌중을 둘러보는 척하며 온을 직시했다. 아주 잠깐, 시선이 마주쳤다.
온은 웃어 주지 않았다. 입술을 벙긋대며 격려하지도 않았다. 그저, 바라만 보았다.
고작 시선이 맞닿았을 뿐인데, 그것만으로도 가슴 한쪽이 따뜻했다.
아아, 그대는 역시 내게 빛 같은 존재야. 그대를 사랑하느라 퍽 괴로웠지. 그러나 이럴 때는, 또 행복해.
자신을 동물원의 짐승이나 식물원의 화초처럼 구경하는 다른 못난 사람들을 생각할 필요 없었다. 류하는 오직 사랑하는 사람에게 자신의 무대를 바쳤다.
내 마음속의 낭군이여, 지켜보세요. 그대를 위해 자존심도 굽히고 두려움도 이겼어요.
나는 꽃도 아니고 소유물도 아닌 그저 나 자신이기에 그 누구를 위해서도 아름다울 필요 없지만, 그래도 그대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최선을 다해 눈부셔질래요.
그리하여 류하는 찬란하게 노래했다. 정녕 지상에 강림한 선녀처럼, 진심을 담아.
그녀를 그저 예쁘장한 외국인 후궁쯤으로만 여기던 관객의 눈빛이 조금씩 달라졌다.
가장 얕은 호흡조차 시끄러울까 봐 숨죽여 듣는 사람들이 있었다.
류하는 그들 전부를 매료했다.
륜도 굉장히 집중하며 듣고 있었다. 화은은 대충 경청했다. 그녀는 내리 륜을 흘긋했다.
남편의 시선이 한순간도 후궁을 떠나지 않는 걸 보고 그녀는 입매를 굳혔다.
온은 두려운 마음으로 주목했다. 무대에 선 당신이 숨 막히게 아름다워서 나 외의 세상 모두가 당신과 사랑에 빠질까 두렵다.
짙은 독점욕이 솟구쳤다. 온은 스스로 깜짝 놀랐다.
‘내가 이렇게 못난 사람이었나.’
멀리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내겐 과분하고, 당신이 나와 같은 곳에서 살아 숨 쉰다는 것만으로도 더없는 영광이거늘.
한데 감히 과욕을 품고, 혼자 당신께 사랑받기 원하다니.
온은 필사적으로 무표정을 유지했다. 들키지 말자. 제발 들키지 말자. 당신을 향한 내 갈망이 너무 짙어서, 내 눈빛에 전부 드러날까 두려워.
내 연정이 발각된다면 나 혼자 추락하지 않겠지.
온은 도를 닦는 심정으로 연인의 공연을 견뎠다. 드디어 노래와 악기 연주가 끝났고, 후궁들은 우아하게 인사했다.
류하가 무대에서 내려왔다. 그때 시선은 다시 스쳤고, 온은 전율을 삼켰다. 류하는 기쁨과 고통의 중간쯤에서 눈을 회피했다.
나머지 후궁들이 무대에 섰다. 화려한 검무가 펼쳐졌다. 이윽고 궁정 악사들의 웅장한 연주가 있었고, 귀족들을 위한 유희는 이어졌다.
그 와중에도 부지런한 황제는 틈틈이 친척들 사이를 다니며 안부를 묻고 고상한 덕담을 나누는 걸 잊지 않았다.
얼핏 보면 단순히 아랫사람을 두루 살피는 지혜로운 주군의 모습이었으나, 수려한 미소와 맞물린 차가운 눈빛에 꿰뚫릴 때마다 사람들은 깨달았다. 아, 우리는 지금 추궁당하는 중이야.
그사이 온은 점점 현기증을 느꼈다. 갑갑하고 어지러웠다.
‘술을 너무 많이 마셨나.’
황후의 눈치를 살피고 어마마마의 시선을 의식하며 연인 때문에 괴로워하는 지금, 그는 당장 도망치고만 싶었다.
아직도 내게 모종의 미련이 남아 종종 의미심장한 곁눈을 던지는 방계 황족들. 그런 나를 거듭 훔쳐보며 차갑게 주시하는 형님의 측근들.
그들 앞에서 숨죽인 충견 연기를 이어 가는 게 지겨웠다. 잠시만이라도 안식을 원했다.
온은 주변 사람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스르르 자리를 빠져나갔다. 술이라도 조금 깨고 돌아오면 나아지려나.
온은 연회의 불빛이 가득한 대전 뜰을 벗어나 건물 주변을 느리게 돌며 어둠을 삼켰다. 그러자 열기가 가라앉으며 속이 조금 편해졌다.
‘역시, 그냥 과음 때문이었어.’
연회로 돌아가기 위해 발걸음을 돌린 온은 멈칫했다. 어둠의 건너편에 익숙한 인영이 아른댔다.
때로는 저 그림자가 제게 이렇게까지 낯익지 않았으면 했다.
“대장군?”
황제였다.
“폐하.”
미워하지만, 미워할 수 없는 나의 형님.
내 자리를 빼앗고 나를 전쟁터로 내몰았으며 내 어머니의 목숨을 담보로 내게 충정을 강요하는 형님.
한때는 참 다정했던 형님. 어릴 적에 많이 외로웠던 형님.
우리는 함께 황궁에 숨어든 길고양이를 보곤 했지. 그때만 해도 나는, 동화 속에 살았어.
나 혼자 동화 속에 산 대가로 이렇게 되었어.
“모습이 안 보여서 찾았더니 여기 있었군.”
륜은 웃으며 말했다. 곁에 그를 보필하는 궁인들이 있었기에 그는 말을 낮췄다. 온은 말없이 고개를 꾸벅했다.
“어두운 곳에서 혼자 뭘 하고 있었나?”
“과음한 탓에 어지러워서 잠시 걷고 있었습니다.”
“이런, 그토록 절제력 뛰어난 그대가 어쩌다가.”
륜은 역시 웃으며 덧붙였고, 온은 다시 잠잠해졌다. 딱히 마땅한 답변이 떠오르지 않았다.
“지금은 좀 괜찮나?”
“네, 폐하.”
“그것참 아쉽군. 만약 그대가 아직도 어지러웠다면 그 핑계로 함께 걷자고 했을 텐데.”
형님도 술을 많이 마셨나. 온은 뜨악한 마음을 최대한 감추며 륜의 얼굴을 조심스레 살폈다.
조금 낯선 눈빛, 다소 시끄러운 시선이 보였다. 륜은 많은 것을 숨기는 표정이었다.
“폐하께서도 핑계가 필요하십니까?”
온은 나직이 되물었다. 핑계라니. 당신처럼 힘 있는 자가 어찌 핑계가 필요하다는 말인가.
나처럼 형의 여덟 번째 아내를 사모하게 된 멍청하고 무력한 사람이나 핑계를 찾는 거야.
소나기를 핑계로 입을 맞추고, 승마를 핑계로 시선을 나누고.
“아니, 딱히 그렇지는 않지.”
륜은 더욱 짙게 웃었다. 역시, 많은 것을 억제하며 은폐하는 눈빛으로.
“그러니까, 그냥 하명하겠네.”
륜은 부드럽게 손짓했다. 그 동작 하나에 궁인들은 반걸음씩 물러났다. 륜 혼자 온에게 다가왔다.
“같이 걷자.”
온은 시선을 내리깔았다. 황궁의 주인이요 연회의 주최자인 황제가 너무 오래 자리를 비워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그는 굳이 간언하지 않았다.
“네, 폐하.”
온은 방향을 틀어 걸음을 옮겼다. 륜은 동생과 보폭을 맞췄다. 기묘한 동행이었다. 어둠에 침묵만 뒤섞였다.
“만약에, 그대는 그대가 후회할 것 같은 선택을 내려야 하는 상황이 오면.”
륜이 불쑥 운을 뗐다. 그러면서 걸음을 그쳤다. 그래서 온도 멈춰야 했다.
“어떡할 것 같아?”
륜의 헤아릴 수 없는 말은 의문문으로 끝났다. 온의 생각이 길어지기 전에 륜은 다소 절박하게 덧붙였다.
“그 선택을 내리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데, 말이 선택이지 사실상 선택지는 없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회할 것 같으면, 그대는 어떻게 대처할 건가?”
수수께끼 같은 말이었다. 반드시 선택해야만 하는 일과, 그 일에 뒤따르는 후회라. 온은 한참을 고민했다.
“꼭 그 선택을 내려야만 하는 이유가 따로 있나요?”
뒤늦게 그는 신중하게 반문했다. 진지한 상황의 속뜻을 파헤치려는 동생을 보고 륜은 기특하다는 듯 피식 웃었다. 그러나 그의 눈은 웃지 않았다.
“있지. 있어. 만약 그 선택을 내리지 않으면, 나중에 내가 더 후회할 것 같거든.”
그렇다면 처음부터 의미 없는 질문이었다.
두 가지 선택지가 있고 둘 다 후회로 끝날 운명이라면, 만약 온 자신이 그런 운명을 짊어졌다면, 그는 스스럼없이 고하리라.
“그러면 마땅히 후회가 덜한 쪽을 택해야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