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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궁의 은밀한 연서 (67)화 (67/123)

67화

비겁함에 대한 죗값인가. 불효가 결국 징벌을 불렀나.

소녀는 얼마 못 가 따라잡혔다. 차라리 부모님과 동생들과 함께 죽을 걸 그랬다.

<역적의 딸을 찾았다!>

<쯧, 귀찮게 도망이나 가고 그래.>

<그런데, 바로 상부에 넘기기엔 좀 아깝지 않아?>

어두운 골목에서 소녀를 붙든 군졸들은 비릿한 눈으로 소녀를 훑었다.

어차피 처형당해 죽을 역적 계집 따위, 멋대로 다뤄도 후환은 없으리라는 쓰레기다운 생각을 품고.

<좀만 갖고 놀지, 뭐.>

추잡한 조롱에 이어 수많은 손이 소녀를 덮쳤다. 어린 가윤은 이해하지 못했다. 벌써 너덜너덜하게 지친 탓에,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그리고 그때, 구원이 나타났다.

<얘, 인간 어린이. 너 괜찮아?>

어린이? 어린이라 부르기엔 좀 과년한데. 그러나 그런 사소한 호칭이 문제는 아니었다.

<이런, 완전 넋이 나갔네.>

순식간에 나타나 군졸들을 도려내고 소녀 앞에 몸을 낮춘 미지의 존재는 소녀의 엉망진창이 된 상태를 보고 나직이 혀를 찼다.

그 존재는 눈이 새파랬고 몸은 새빨갰다. 원래부터 새빨간 건 아니라, 방금 소녀를 겁탈하려 했던 인간 폐기물들을 전부 그어 버리고 나자 그런 색만 남았다.

<너 혼자야?>

도깨비가 부드럽게 물었다. 소녀는 대답 없이 눈물만 똑, 흘렸다.

눈앞에서 부모가 묶이는 걸 봤고, 본인도 방금 묶일 뻔했고, 심지어 옷이 갈가리 찢겼다. 울지 않는 게 이상했다.

게다가 아득한 전설을 다룬 그림책에서나 봤을 법한 벽안의 존재가 너무 괴이해서 소녀는 말을 잃고 떨었다.

소녀는 그대로 까무러쳤다. 그리고 정말 우연히 지나가던 중이던 주안은 눈앞에서 누군가 기절했는데 차마 두고 갈 수가 없어서, 잠시 우왕좌왕하다가 끝내 소녀를 안고 사라졌다.

며칠 뒤, 죄인들의 절단된 목이 궐문 앞에 줄줄이 효수됐다. 그중에는 소녀의 가족도 있었다.

그날 단씨 일가를 체포하러 갔던 말단 군졸 몇몇이 실종됐는데, 평소에 워낙 행실이 안 좋던 놈들이라 그들의 상사와 동료들도 처음에 대충 찾는 시늉만 하고 말았다.

또 며칠 뒤, 사창가에서 열대여섯 살 즈음의 계집아이가 죽은 채로 발견되었다. 단씨 집안의 장녀라는 판정이 내려졌다.

그 뒤로 숱한 시간이 얽혀 여기까지 흘러왔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열심히 해?”

주안이 이제는 가윤의 소매를 쿡쿡 건드리며 물었다. 아기처럼 계속 장난치는 모습이 가윤은 싫지 않았다. 그녀는 회상을 그치고 빙긋 웃으며 답했다.

“당신이 좋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거짓말이되, 사실이었다. 자신이 주안과의 첫 만남을 떠올리고 있었다고 털어놓는 건 싫었다. 그때가 내게 아픈 기억임을 당신도 알기에, 당신도 덩달아 아파할까 봐.

하지만 당신이 좋다는 말은 거짓이 아니니까, 가윤은 솔직하지 않은 상황에서도 자신이 주안을 속였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야, 너, 진짜…….”

주안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짓더니, 곧 뺨이 달아올랐다.

가윤은 복숭아처럼 변한 말랑말랑한 살을 한 번 꼭 찔러 볼까 하다가, 그랬다간 주안의 안면이 정말 열기로 폭발할 것 같아서 행동을 삼갔다.

“너, 완전히 딴사람 됐어.”

주안이 중얼거렸다. 예전에는 그리도 밀어내지 못해 안달이더니, 이제는 자신이 대비할 틈도 없이 매번 속절없이 다가와 자신을 거듭 사랑에 빠트렸다.

“그래요? 저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한결같은데.”

가윤은 뻔뻔하게 받아쳤고, 주안은 다시 한 번 어이가 없어서 그녀를 보다가 고개를 들어 갑자기 입을 맞췄다.

“읍.”

입술이 예고 없이 겹치자 가윤은 숨을 참았다. 흘러드는 호흡에 주안의 체온이 섞였다.

가윤은 저절로 눈을 감았다. 그녀의 손이 그의 허리에 닿았다.

“그래, 한결같이 예뻐.”

주안은 지척에서 생글댔다. 가윤은 가빠진 숨을 고르며 주안을 쳐다보았다.

저 파란, 파란 눈빛. 호수처럼 깊은 그곳에는 바닥이 없어 보였다.

“어릴 적부터 미인이라는 소리는 많이 들었습니다.”

가윤은 부러 도도한 척, 마치 그런 간지러운 칭찬쯤이야 제게는 길거리의 돌멩이처럼 흔하다고 과장했다.

당신의 그 예쁘다는 말 때문에 심장이 위태롭게 뛴다고 고백하기가 어쩐지 아쉬웠다.

나만 더 떨리고, 나만 더 절박한 것 같아서. 당신 때문에 일방적으로 정신이 혼미해서.

그러나 사실, 상대방 때문에 정신을 똑바로 차리기가 어려운 건 주안도 똑같았다.

그는 공연히 새침을 떼는 제 귀여운 연인을 흡족하게 보다가, 다시 애틋하게 입술을 삼켰다.

“앞으로는 나도 많이 해 줄게.”

그가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가윤은 다시 눈을 감았다. 주안의 팔이 가윤의 등을 감쌌다.

서로 맞닿는 걸로도 모자라서 몸은 조급하게 기울었고, 어느새 가윤은 침대에 누워 주안을 올려다보았다.

길고 짙은 체열을 나누며 가윤은 생각했다. 어쩌면, 이게 내 천벌일지도 모른다고.

가족을 두고 혼자 살아남은 나는, 결코 붙들어 둘 수 없는 대상을 마음에 담게 됨으로써 죗값을 치르는 걸지도 몰라. 잔인한 연정은 나의 형벌이겠지.

나는 흘러가고 당신은 그대로라서, 나중에 세월의 균열이 무시할 수 없을 만큼 커질 때 나는 기어코 울고 말 거야.

그러나 일단 지금은, 둘 다 뜨겁게 사랑했다.

술과 음식과 음악이 준비되었다. 제국의 위용에 충분히 걸맞은 사치스러운 연회였다.

영문을 모르는 어리거나 순진한 황족들은 그저 들떴으나, 몇 주 전에 온 대장군이 도성 안에서 죽을 뻔했다는 사실을 아는 황족들은 거북함을 되삼켰다.

‘내가 이렇게 지켜보고 있으니 다시는 헛수작을 부리지 마라, 이 정도의 의미겠지.’

휘결은 방계 황족들을 위해 준비된 좌석에서 궁궐의 비싼 술을 음미하며 묵묵히 궁리했다.

‘우스운 놈이야, 진짜.’

휘결은 속으로 비웃었다. 그는 잔을 내려놓고 가장 고귀한 상석에 앉은 자신의 먼 친척을 지켜보았다.

황제의 오른쪽에는 황후가 있었고, 그 왼쪽에는 대장군이 있었고, 가까운 곳에는 후궁들과 황태후가 있었다.

‘황후 때문에 제대로 조사도 명하지 않은 주제에.’

만약 륜이 마음만 먹는다면, 굳이 이렇게 고상하고 우회적인 압박을 택할 필요 없이 몇몇 의심되는 사람들을 붙잡아 족치면 그만이었다.

그는 피바람을 매우 효과적으로 활용하는 황제였다. 즉위하자마자 과시적인 숙청과 정복으로 정적을 제거하고 군대를 집결하여 단숨에 국정을 휘어잡았다.

결백한 사람이 휘말릴까 두렵다는 양심적인 이유로 망설일 작자가 아니건만, 이번에 답지 않게 몸을 사리는 걸 보니 확실히 황후가 신경 쓰이기는 하나 보다.

‘하여튼, 약점은 뚜렷하다니까.’

휘결은 장소도 잊고 하마터면 혀를 찰 뻔했다.

그가 폐위하고자 하는 황제는 여러모로 무너트리기 참 까다로운 자였으나, 그 와중에도 빈틈이 명확해서 나름 공략하는 맛이 있었다.

일단, 륜이 천첩의 소생이라는 점. 그의 어미는 귀족의 딸이 아니라 비천한 출신이었다.

그게 평생의 한이자 정치적 흠이 되어 륜이 명문가 여식을 줄줄이 후궁으로 들였다는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또한, 아내와 동생. 한 명씩 제 양옆에 앉혀 두고 새끼를 지키는 늑대처럼 싸고도는 꼴이었다.

황후야 그렇다 치고, 대장군은 정말 의외였다. 황제가 냉철하게만 판단했다면 진즉에 사약을 내려 존재 자체를 지워 버렸어야 할 사내거늘.

둘 중 어느 쪽을 건드려야 륜이 이빨을 드러낼지 예전부터 내심 궁금했는데, 이번에 본의 아니게 확인하게 되었다.

‘황후 쪽이구먼.’

휘결이 보기에, 균형은 이미 뒤집혔다.

휘결은 주변의 다른 황족들을 훑어보았다. 개중 일부는 결의 계획을 알았고, 일부는 몰랐다. 일부는 황제를 혐오했고, 또 일부는 황제를 존경했다. 어떤 이는 그저 무관심했다.

사람들의 속마음이 그토록 엇갈리는 현장에서 륜은 좌측의 동생을 돌아보며 싱긋 웃었다. 이어서 직접 술병을 들고 온에게 음료를 권했다.

“한 잔 들게, 대장군.”

온은 공손히 잔을 양손으로 받쳤다. 그는 끝까지 무표정했고, 륜은 내리 인자한 낯이었다. 황제는 그토록 자상하게 타일렀다.

“연회를 즐기도록 해. 모처럼 기쁜 날이니까.”

“황송합니다, 폐하.”

온은 정중하게 대답한 뒤 잔을 기울여 술을 마셨다. 그는 후궁들과 황태후가 있는 쪽을 보지 않으려 노력했다. 류하를 외면하기 위함이기도 했지만, 태후 때문이기도 했다.

륜은 태후까지 참석하는 공적인 자리에서 온에게 유독 살갑게 대하는 버릇이 있었다. 일종의 변태적인 복수였다.

자신을 가장 악독하게 괴롭히던 계모의 금지옥엽 아들에게 예쁘게 웃어 주면, 그 계모는 끔찍한 광경을 본 사람처럼 양손을 모으고 입술을 깨물며 창백하게 질리곤 했다.

앞에서는 저렇게 웃어 주면서 뒤에서는 모질게 군 것이 아닌가, 방금 정답게 따라 주던 술에는 독이라도 타지 않았을까, 태후는 아들을 위해 근심하며 매번 불안에 시달렸다.

태후가 자신의 죄를 잘 알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아니, 그걸 과연 죄라고 부를 수 있을까.

태후는 자신이 결백하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그 옛날 1황자를 짓밟고 그의 수족을 잘라 내며 그의 아내까지 지독하게 핍박했던 이유는 단 하나, 제 아들을 위함이었으니.

저것 봐, 내가 진즉 1황자를 제거하는 데 실패했기에 지금 내 아들은 고작 장수의 자리에 앉아 있잖아. 원래는 저 빛나는 옥좌를 차지했어야 할 아이가.

태후는 괴롭게 바라보았고, 온은 모친의 눈빛이 버거워서 필사적으로 음식에만 집중했다.

어머니를 생각한다면 형이 주최한 연회 따위 당장 차갑게 박차고 나와야 할 텐데, 오히려 그 어머니를 위해 온은 묵묵히 인내했다.

내가 감히 지존에게 대들면, 불충한 나로 인해 어마마마까지 고통받는다.

온은 오늘도 얌전한 충신을 연기했다. 륜은 계모를 의식하여 이복동생을 향해 생글생글 웃었고, 화은은 술 대신 차를 마시며 태후를 응시했다.

황후와 태후의 눈이 마주쳤다. 황후는 빙긋 웃어 주었고, 태후는 입술을 더 세게 물었다. 황후의 미소가 짙어졌다.

‘꼴이 좋으시네요.’

황후는 눈빛으로 조롱했고, 태후는 이제 거의 혼절하기 직전이었다.

화은은 오만하고 아름다운 얼굴로 옛 시어머니를 잘근잘근 짓씹다가, 여유롭게 시선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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