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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궁의 은밀한 연서 (66)화 (66/123)

66화

“화는 그렇게 생각 안 할 겁니다.”

“그걸 그대가 어떻게 알아요?”

“그냥 직감입니다. 장수의 직감이요.”

“여기는 전쟁터가 아니에요, 대장군.”

“네, 압니다. 천만다행이죠.”

온은 새침하게 대꾸하다가 입을 꾹 다물었다.

안 돼, 이러면 불안해. 대화가 길어지고 눈빛이 뒤엉켰다간 나는 또다시, 그날의 악몽 같은 꿈으로 되돌아가고야 말 거야.

“그래요. 천만다행이에요.”

류하는 온화하게 답한 뒤, 애써 평범하게 싱긋 웃고는 고개를 돌려 버렸다.

빗소리. 애절한 입맞춤. 그건 꿈이었을까. 여름날의 쨍한 햇살 아래서 그날 먹구름 덕분에 훔쳐낸 짤막한 기쁨은 덧없이 스러졌다.

이렇게 말도 안 되는 관계로 서로를 맴돌며 이따금 스치는 시선으로만 마음을 전하고 형식적인 언어로 안부를 물었다.

그것만으로도 만족했다. 만족해야 했다.

오늘 아침에 일어났더니 그대가, 당신이 무사히 사지 멀쩡하게 내 앞에 있다. 건강하고 올바르게 서 있어. 그것만으로 족해.

사랑하는 사람이 앞으로도 이렇게 행복하고 평안하게 살아만 준다면, 나 또한 기꺼이 웃어 보리라.

이게 만약 정말 행복이고, 평안이라면 말이지.

“마마, 너무 빨리 달리시면 안 됩니다.”

류하가 고대하던 승마장에 도착해 화의 등에 몸을 실을 때, 온은 옆에서 초조하게 당부했다.

“그대는 참, 걱정도 팔자에요.”

류하는 연인의 잔소리를 명랑하게 물리쳤다. 이제 제법 기마가 능숙해진 그녀는 나날이 점차 대범해졌다. 온은 눈살을 찌푸렸다.

“만약 마마께서 다치시기라도 한다면 제가 폐하를 뵐 면목이 없습니다.”

폐하를 뵐 면목은, 무슨. 오히려 방금 자신이 한 말이 훨씬 면목 없는 짓이었다.

온은 황제가 아닌 자기 자신 때문에 류하가 다칠 가능성을 저어했다. 당신의 몸에 손톱만 한 생채기라도 난다면, 나는 억장이 무너질 테니.

“그대의 면목은 내가 단단히 지킬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류하는 눈매를 휘며 생긋 웃었다.

예전에는 온이 황제를 핑계로 쓸 때마다 상처받곤 했는데, 이제 그녀는 넉넉히 알아듣고 다른 이유로 조금 아파했다.

내 안위를 걱정할 때도 본인이 아닌 내 남편을 핑계로 써야 하는 그대.

이 관계의 정체는 뭘까. 그리고 그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그저 우리 각자 조금씩 잊고 서서히 식는 시시한 결말이었으면 좋겠다.

계속 보다 보면, 익숙해지겠지. 익숙해지다가 지겨워지고, 결국 시들해지겠지.

호위와 후궁으로 서로를 계속 맴돌다 보면 언젠가 따분해지겠지.

지금은 형수와 시동생의 불장난 같은 비밀이 즐거워 짜릿한 자극을 느끼지만, 언젠가 이조차 일상이 되면, 빛바랠 거야.

류하는 그날을 기다렸다. 내가 그대의 얼굴을 바라보고 그대의 숨결을 떠올려도 심장이 저미듯 아프지 않을 날을.

그날을 기대하면서도 두려워하며, 류하는 오늘도 그저 유쾌한 척 말고삐를 고쳐 잡았다.

“정 걱정되시면 그대도 같이 달리든가요.”

류하는 한마디 초대를 툭 던진 뒤, 얄밉게도 먼저 출발했다.

온은 경쾌하게 멀어지는 연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일그러진 미소를 삼켰다. 그러다 결국 못 이기는 척, 본인도 말을 꺼내 매끄럽게 착석했다.

“너희는 오지 않아도 된다.”

“네, 대장군님.”

온과 그의 부하 둘이 월빈을 함께 지켰다. 세 명이 줄줄이 말을 타고 따를 필요 없이 혼자로도 충분하다고 거듭 안심시킨 뒤에야, 온은 말에 박차를 가했다.

당신도 말을 몰고, 나는 빠르게 뒤따르고. 끝내 거리는 순식간에 좁아져, 남녀는 거의 나란히 뛰었다.

“같이 달리자고 하면 못 달릴 줄 알았습니까?”

오직 둘만이 들을 수 있는 간격에서 온이 꽁하게 중얼거렸다. 그러자 류하의 예쁜 입술이 시원한 호선을 그렸다.

“설마요. 같이 달리자고 하면 당연히 올 줄 알았습니다.”

온은 말을 잃었다. 그사이 류하는 고삐를 당겨 조금 속도를 늦췄다. 온은 곧장 따라 했다.

내가 빨라지면 당신도 빨라지고, 그대가 느려지면 나도 느려지고. 그렇게라도 조금씩 맞닿기 원했다.

“그대는 참, 다루기가 쉬워요.”

“그거 욕입니까?”

“해석하기 나름이지요.”

“그럼 좋은 쪽으로 해석해 드리겠습니다.”

“하하, 영광이에요.”

“너무 크게 웃지 마십시오.”

“그건 갑자기 또 무슨 말이에요?”

“저 말고 남들이 보기에 너무 예쁩니다.”

온은 진지하게 간언했고, 류하는 어안이 벙벙해서 웃음을 뚝 그쳤다. 온은 뒤늦게 딴청을 피웠다.

“그대는 참…….”

류하는 적절한 형용사를 찾느라 한참을 고민했다. 그러다 끝내 최적의 단어를 찾았다.

“사랑스러워요.”

온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그는 아까 자신이 뱉은 낯간지러운 발언에 대한 죗값을 톡톡히 치렀다. 그는 말고삐를 움켜쥐며 괴로워했다.

“그리고 그런 말도 금지입니다. 적어도 미리 경고하고 말씀하세요.”

온은 산딸기처럼 익은 얼굴로 항의했고, 류하는 폭소를 참고자 입술을 꼭 깨물었다.

내가 또 크게 웃으면, 그대가 나더러 예쁘다고 할까 봐. 그때는 너무 달아서 기절할 것 같거든.

“대체 뭘 어떻게 경고해요? 나는 그저 몹시 솔직하고 담백하게 진실을 전하는 것뿐인데.”

“음, 아닐걸요. 아마 아닐 겁니다.”

“온, 그렇게 얼굴 붉히지 마요.”

“……왜요?”

“나 말고 다른 사람이 보기엔 너무 예쁘니까.”

온의 혈색이 한층 짙어졌다. 결과적으로 연인의 말을 거역한 셈이 됐으나, 류하는 성내지 않고 그저 사악하게 쿡쿡 웃었다.

“짓궂으십니다.”

온은 처량하게 투덜댔다. 자신이 먼저 같은 방식으로 류하의 정신을 빼놨다는 사실은 감쪽같이 잊은 듯했다. 류하가 씩 웃었다.

“뭐, 내가 당하고만 사는 성격은 아니라서요.”

다른 사람들이 전부 멀리 있어서 다행이다. 그대의 노을빛 뺨이 남들의 눈에는 잘 보이지 않아서 다행이야.

만약 궁녀들과 호위들이 근처에 있었다면, 당장이라도 그대의 저 수줍어하는 얼굴에 홀딱 반해 각자 본분을 잊을지도 몰라. 나는 졸지에 연적이 수두룩하게 생길걸.

“저는 당신한테 늘 당하고만 살아도 괜찮습니다.”

온은 불쑥 고백했다. 그는 어느새 다시 진지해졌다. 그의 준수한 얼굴에는 아직 석양빛이 남아 있었다. 류하도 차츰 웃음기를 거두며 깊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럼 곤란해요.”

그녀가 부드럽게 타일렀다. 둘 다 이제는 너무 느리게 움직였다.

궁녀들의 눈에 수상쩍게 보일까 봐 류하는 속도를 다시 살짝 높였다. 그러면서 온이 아닌 허공을 보며, 보일 듯 말 듯 달싹이는 입술로 속삭였다.

“나 때문에 당하고 살지 마요, 대장군.”

호칭이 이름에서 직책으로 돌아왔다. 그 사실이 온은 자못 서글펐다.

우리 각자 서로 때문에 피해 보며 살지 말자는 류하의 간곡한 당부가 온을 슬픔으로 채웠다.

아아, 류하 님. 어쩌면 이 세상 누군가에겐, 사랑과 설움은 반드시 하나여야만 하나 봐요. 마치 숙명처럼.

부디 당신은 나를 잊고 흘러가기를. 사랑과 설움이 당신에게는 끝내 별개였으면 좋겠어요.

작은 소원 하나를 묵묵히 읊조리며, 온은 남은 시간을 고요하게 서성였다. 호위답게.

류하도 끝까지 조용했다.

연회 당일이 도래했다. 대낮부터 저녁까지 이어지는 호화로운 축제였다.

평소에는 도성 밖에 거주하는 황족들도 황제의 지엄하신 부름을 받고 오늘 하루는 궁의 귀빈이 되었다.

“영감탱이가 알아서 잘하고 오겠지?”

가윤의 머리칼 끝을 매만지며 빈둥대던 주안이 밝게 물었다.

영감탱이, 라 하면 황제를 꿈꾸는 휘결이었다. 그 지나치게 소탈한 호칭에 가윤은 한숨지었다.

“뭐, 그러시겠죠. 충분히 똑똑한 분이시니까요.”

“그래서 그 사람과 손잡기로 택한 거야? 똑똑해서?”

“제가 동등하게 손잡은 건 아니고, 주군으로 모시는 겁니다. 그리고 단순히 똑똑해서만은 아니에요. 영민함으로 치자면 현 황제나 대장군을 따라갈 이가 몇 있겠습니까.”

가윤이 시큰둥하게 대답하자 주안은 잠시 꿍해졌다. 그는 여전히 가윤이 대장군을 언급할 때마다 토라진 아이처럼 굴었다. 가윤은 이에 대해 조금 너그러워지기로 했다.

“얼핏 보면 성질 괴팍하고 쓸데없이 권위주의적인 노인네 같지만, 더 자세히 보면 상당히 융통성 있고 자기 사람을 아낄 줄 아는 지혜로운 분이십니다. 그래서 따르기로 한 겁니다.”

가윤의 침착한 설명에 주안의 기분이 묘해졌다.

성질 괴팍하고, 쓸데없이 권위주의적이고. 한없이 진지한 표정으로 욕부터 늘어놓는 게 조금 웃겨서 주안은 입술을 물었다.

“당신의 도움을 받아들이기로 한 것만 봐도 그렇죠. 그분도 이종족에 대한 편견으로 똘똘 뭉친 건 다른 늙은이들과 똑같습니다. 다만 필요하다고 여기시면 그런 편견 따위야 언제든 굽힐 수 있는 거죠.”

“글쎄, 그건 꼭 나이 문제는 아닌 것 같은데.”

주안이 맑게 대꾸했다. 편견으로 똘똘 뭉친 다른 늙은이들? 대전쟁 이후의 인간은 나이를 막론하고 이종족을 꺼렸다. 그건 거꾸로도 마찬가지였다.

“어쨌든, 황제가 되기에 부족함이 없는 사람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엄청난 성군은 못 될지 모르지만, 적어도 암군은 아닐 거예요. 그 정도로 타협하려고요.”

가윤은 냉담하게 결론지었다. 어차피 복수를 위해 반역을 택한 그녀는 대단히 고결한 기준에 따라 주군을 고르지 않았다.

태평성대를 위해, 대의나 백성을 위해 현 황제를 끌어내리려는 게 아니야. 그저 보복을 원해. 내 가족의 죽음을 명한 그자의 죽음을 원해.

5년 전, 또래에 비해 의젓하지만 여전히 순진하던 열여섯 살 소녀는 나락을 맛보았다.

소녀의 집안은 유명한 권세가였고, 소녀의 아비는 귀한 따님을 황태자에게 시집보내려 했다.

황제는 태자비를 뽑기 위해 간택령을 내렸으나, 사실 결과는 이미 내정됐다고 사람들은 수군댔다.

당연히 단씨 가문의 장녀가 태자비가 되겠지. 태자는 든든한 처가를 얻을 거야.

그런데, 갑자기 황제가 죽었다. 새 황제가 등극했고, 태자였던 소년은 한낱 장수로 전락했다.

새 황제는 전쟁에 앞서 내부의 불순한 무리를 먼저 솎아 내겠다는 이유로 무수한 이들의 처형을 명했다.

그중에는 옛 황태자 온의 강력한 아군이었던 단씨 집안도 있었다.

너만이라도 부디 살아 달라는 어머니의 애원에 따라 소녀는 혼자 도망쳤다.

이 얼마나 비겁한 짓인가, 얼마나 큰 불효인가 생각하면서도, 살고 싶다는 본능에 떠밀려 정신없이 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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