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기왕 억지로 데려온 거, 편히 살게 해 주자.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고 있으니. 아직은.
처음에는 분명 그렇게 결심했다. 마지막에 조건부를 덧붙이며.
‘화은이 나선 게 아니라면, 다른 누군가 아우님을 해치려고 했다는 건데.’
륜은 싸늘한 눈빛으로 시체들을 직시했다.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그렇다면, 내가 모르는 또 다른 적대 세력이 있다는 뜻이고.’
륜에게 아들이 없는 상황에서, 륜의 동생을 제거하려 했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아아, 황실의 대를 끊어 버리겠다는 뜻이 아닌가?
‘사람 머리나 터트리고 다니는 정체불명의 이종족은 덤이고…….’
갑자기 나타난 도깨비는 대체 뭐지? 황족을 공격하던 자객을 죽였으니, 황실의 편인가? 적의 적은 과연 아군일까? 정말로?
‘돌아 버리겠네.’
륜은 잠시 눈을 감았다. 시체에 눌어붙은 피비린내가 역했다. 그는 자신이 직접 친부의 목을 벴던 그날을 떠올리지 않으려 애썼다.
‘그러니까, 만약에 월빈이 그중 한쪽에 붙는다면.’
존재마저 불명확한 제3의 적대 세력. 바람처럼 나타나 대장군을 구한 뒤 또 바람처럼 사라진 미지의 도깨비.
그들은 한패일까, 아닐까. 만약 한패라면, 대체 무엇을 원할까. 그리고 그들은 월빈의 정체를 알까? 황궁 내부에 도깨비 혼혈이 있다는 사실을?
어쩌면 황실의 그 어떤 군인보다도 강력한, 땅을 흔들고 불을 내리쳐 시체 군단을 말살한 여인의 존재를 알까?
그들이 월빈을 이용하려 하면 어떡하지?
가능하잖아. 터무니없는 가정은 아니야. 사람 일은 아무도 모르는 거야.
‘……죽일까.’
그냥 싹을 아예 잘라 버릴까. 이렇게 불안한 상태로 있느니.
‘그냥 죽이면 간단한데.’
아비의 목을 베고 스스로 황제가 되던 날. 륜은 깨달았다. 아, 죽이면 정말 간단하구나.
아우님, 그냥 나를 죽였어야죠. 살리려고 하면 복잡해져요.
그대의 곧고 따스한 성품이 나를 지킨 탓에, 그대의 편에 섰던 수많은 이들이 괴로워졌어요.
나는 그대와 같은 실수를 범하지는 않으려고요. 그냥 다 죽여 버릴래요. 그러면 편하잖아요.
그래야만 온전히 후환을 도려낼 수 있으니, 얼마나 현명해요?
하지만, 륜은 망설였다.
‘젠장, 사실 그렇게 간단하지만도 않아.’
월빈이 외국의 공주라서. 류하를 대놓고 처형하든, 의문사를 꾸미든 간에 자칫하면 월국과의 외교 문제로 이어질 수 있었다.
물론, 그 모자란 아비가 내내 별궁에 처박아 두었던 딸의 죽음을 진심으로 슬퍼하기나 할지는 의문이었다.
그래도 어쨌든, 류하는 공주였다. 조용히 넘어갈 만한 사안이 아니었다.
월국 측이 소심하게 진상 규명을 요구한들 강대국 휘국이 가뿐히 무시하면 그만이긴 했으나, 륜은 구태여 그런 찜찜함을 남겨 두고 싶지 않았다.
‘일단 지켜보자.’
륜은 끝내, 미지근한 결론을 내렸다. 월빈과 혼례를 치른 지 아직 한 달도 되지 않았다. 조급하게 굴 필요는 없겠지. 이번에 그는 과감함보다 신중함을 택했다.
륜은 연회를 열기로 결정했다. 어차피 정복 전쟁의 종식을 조만간 공표할 셈이긴 했다. 완벽한 핑계가 생겼다.
성대한 축하연을 열리라. 화은이 결백하다는 가정 아래, 감히 황족의 목숨을 노릴 법한 다른 황족을 알아봐야지.
그게 며칠 전이었다. 오늘 화은은 후궁들과 다과회를 열었다고 했다.
“내명부에도 전달했죠? 연회 때 열릴 공연에 대해.”
“물론입니다, 폐하.”
“수고했어요.”
륜은 간단히 질문을 끝내며 아내의 옷고름을 풀었다. 화은은 문득 그의 손을 잡았다. 동작이 막히자 륜은 의아하여 고개를 들었다.
“폐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화은이 아뢰었다. 륜은 고개를 갸웃하다가, 순순히 승낙했다.
“말하세요.”
“온 대장군에 관한 얘기입니다.”
“……그러니까, 말하세요.”
륜의 눈빛이 조금 굳었다. 화은은 그 미세한 경직을 수수께끼 같은 표정으로 지켜보다가, 몸을 조금 기울여 륜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륜은 끝까지 듣고야 말았다.
연회 준비가 한창이었다. 황족들이 황성에 몰려들고, 평화의 시대를 선포하는 날이 다가왔다.
궁인들은 평소보다도 분주했고, 군졸들도 여느 때보다 들떴다.
저잣거리의 서민들조차 궐에서 들려오는 복작복작한 소식에 마음을 뺏긴 듯했다.
그래서 다들 잊어버렸다. 만약 기억하는 자가 있다면, 잊은 척했다.
불과 며칠 전에, 아니지. 이제는 어느덧 몇 주 전이 돼 버린 어느 날, 제국의 심장인 황성 근처에 감히 괴한들이 나타나 황족을 해치려 했다는 사실을.
륜은 끝내 공개적인 조사를 명하지 않았고, 온은 한 가닥 서운함을 되삼켰다.
애초에 기대한 적 없으니, 실망해서도 아니 된다. 나는 그럴 자격이 없어.
‘폐하께 황후 전하가 더 중요한 건 당연해.’
거짓말처럼 평화로운 날의 일과 중, 온은 파란 하늘을 보며 곱씹었다. 충직한 호위의 얼굴에는 표정이 없었다.
‘황후 전하 없이는 폐하도 없었을 테니까.’
나는 내 어미가 형님을 괴롭힐 동안 무력하게 있었고, 형수님은 온 힘을 다해 형님을 보필했으니, 우선순위가 갈릴 수밖에.
만약 륜이 누군가 온을 죽이려 했다고 공표한다면, 그 사실 여부를 떠나서 세간의 의심과 신하들의 비난은 대부분 화은을 향할 것이다.
화은을 견제하는 일부 귀족들은 이를 기회 삼을 수도 있다. 후궁 본인들은 가늘고 길게 사는 게 목표지만, 후궁의 부모는 정반대인 경우가 많았다.
화은은 비록 귀족이긴 했지만 한미한 집안의 여식이었다. 외가도 처가도 전부 힘없는 자들만 가득한 륜은 즉위 직후 잦은 혼인을 통해 제국의 세도가들과 동맹을 맺었다.
호시탐탐 자신들의 딸이나 누이를 황후로 모실 틈만 노리는 자들에게, 온이 가까스로 모면한 죽음을 참으로 훌륭한 무기일 것이다.
그러니까, 원망하지 않아. 원망할 자격이 없어. 형님이 형수님을 선택한 건 당연해.
‘내가 고작 이런 일로 섭섭해할 단계는 지났지.’
온의 눈빛에 씁쓸함이 스쳤다. 섭섭함이라. 그런 귀여운 감정도 그에게는 과분했다.
‘어차피 덤으로 사는 삶인걸.’
황태자 시절, 천대받는 이복형에게 같잖은 온정을 베풀었기에 본인도 같잖은 자비를 받아 살아남았다. 그뿐이었다.
‘그래, 결국 무사했으니까 됐어.’
비록 형님은 동생인 내가 죽을 뻔했다는 사실조차 외면했지만, 실제로 죽지는 않았으니, 이렇게 멀쩡히 살아 있으니, 괜찮아.
다만 걱정되는 건, 이번에는 범인이 잡히지 않았으니 다음번에 똑같은 일이 일어날 가능성인데.
그때는 제발, 나 혼자 있을 때였으면 좋겠다.
다시는 나로 인해 당신이 같은 위험에 처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온은 눈을 감고 귀를 기울였다. 그가 앞을 지키는 문의 안쪽에서 정다운 말소리와 노랫소리, 맑은 악기 소리가 들렸다.
함께 모여 임박한 연회를 준비하는 류하, 수연, 훤아였다. 후궁들의 호위는 성실하게 근처를 지켰다.
이 세상에 저리 달콤한 음색이 존재하는 줄은 처음 알았다. 저토록 다정한 가락이 있고 애틋한 가사가 있다니, 당신의 모든 게 나를 매일 놀라게 해.
아니. 음색이 달콤하고 가락이 다정하고 가사가 애틋한 게 아니라, 그저 전부 당신이라서 그런 거야.
이 마음이 사랑인지 설움인지 헷갈렸다. 어쩌면 누군가에게 그 두 가지는 숙명처럼 하나여야만 하는 게 아닐까. 그래, 아마도 그런가 봐.
온은 감았던 눈을 스르르 떴다. 노랫소리와 악기 소리가 사그라지고 말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연습이 끝났나 보다.
“오늘도 수고했어요, 성빈, 월빈.”
“마마께서도 고생하셨습니다. 저는 손가락이 끊어질 것 같아요.”
“하하, 그만큼 열심히 연습했다는 뜻이겠죠. 처소로 돌아가서 연고 꼭 바르세요.”
“네, 해비마마. 그대도 목 잘 관리하세요, 월빈.”
“그럴게요.”
여인들이 재잘대며 밖으로 나왔다. 호위들은 각자 조금씩 고개를 숙여 예를 갖췄다.
온은 늘 봐도 신기한 후궁들의 우정을 다시금 숙고했다. 다 같은 지아비를 공유해야 하는 처지인데, 어떻게 저리 넉살이 좋은지.
물론, 류하 님의 경우 한 번도 폐하와 동침한 적 없으니 법적으로만 남편에 불과하지만.
그만큼 성빈마마도, 해비마마도 폐하를 향한 진솔한 애정이 눈곱만큼도 없다는 거겠지.
만약 둘 중 하나라도 폐하를 진심으로 사모했다면, 절대 저렇게 웃을 수 없었을 테니까.
온은 말없이 씁쓸해졌다. 아비의 목을 직접 베면서까지 가장 높고 강한 자리에 오른 나의 형님. 그럼에도 당신은 고독해.
무려 아내가 여덟이 있으나 그중 일곱은 당신을 사랑하지 않고, 당신이 사랑하는 단 한 명의 여인은 당신이 늘 상처 줘야 하는 사람이야.
후계를 위해 마음에도 없는 여인을 억지로 품으며 연모하는 이의 마음을 짓밟아야 하는 형님도.
연정 자체가 죄악이라서 감히 눈길조차 제대로 섞지 못하는 자신도, 퍽 가엽게 느껴졌다.
“월빈마마, 처소로 모시겠습니다.”
“처소는 나중에 갈게요. 그 전에 들를 곳이 있습니다.”
대장군이 공손히 아뢰자 후궁은 정중하게 대답했다. 전부 완벽한 연극이었다. 제발 완벽해야만 했다.
만약 각자의 진심이 부스러기만큼이라도 새어 나가는 즉시 너무 큰 파국이 닥칠 거라고, 둘은 서로 사랑에 빠지는 순간부터 알고 있었다.
“먼저 승마장에 가죠. 말을 몰고 싶습니다.”
“연습하느라 피곤하지 않으십니까? 처소로 돌아가서 쉬시는 게 나을 듯합니다.”
“피곤하니까 더더욱 말을 좀 몰아야겠습니다. 종일 방에만 갇혀서 노래만 부르다니, 그건 사람이 할 짓이 아니에요.”
온이 진심으로 걱정돼서 부드럽게 고집하자 류하는 부르르 떨며 고충을 드러냈다. 온은 지켜보는 눈들을 잊고 슬쩍 웃을 뻔했다.
종종 필사적으로 얌전한 척하지만, 실은 장시간 가만히 앉아 있으면 좀이 쑤셔 견디질 못하는 나의 류하 님.
연습을 이유로 예쁘게 인형처럼 서서 꾀꼬리 같은 소리만 내다 보니 꽤 지치셨나 보다.
바람을 느끼며 들판을 발랄하게 누빌 때 당신은 가장 행복해 보인다.
이 으리으리한 황궁조차 당신에겐 감옥처럼 느껴져.
“그러니까 어서 승마장에 갑시다. 화를 만난 지 오래됐네요.”
류하는 자신의 애마가 그리운 죽마고우라도 되는 듯 애틋하게 얘기했고, 온은 유치하게도 조금 불퉁해졌다.
내가 당신 때문에 짐승마저 질투하는 치졸한 인간이 되어 버렸다. 부끄러워 차마 털어놓을 수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