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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궁의 은밀한 연서 (64)화 (64/123)

64화

이후, 여름날의 흔한 다과회는 순조롭게 이어졌다.

황후는 종종 이렇게 후궁들을 모아 내명부의 수장으로서 소임을 다했다. 첩실들의 안부를 살피고 친목을 도모하며 우아한 미소로 덕담을 나누는 게 그녀의 일이었다.

때로 그들은 저 황홀한 눈웃음에 덧없이 속아 스스로 착각하기 원했다. 저 인자한 미소를 보라. 분명 우리를 진심으로 품어 주시는 거야.

하지만 다시 정신을 차리고 현실을 돌아보면, 그들 앞에는 냉혹한 선이 있었다.

“그러면 다들 성심껏 준비해 주게. 연회가 끝나고 나면, 다 같이 말이라도 몰자꾸나.”

저 아름답고 인자한 황후 전하가 지금 우리를 정녕 아끼는 것처럼 온화하게 바라보는 유일한 이유는, 우리 중 아무도 아들이 없어서이며, 황제 폐하가 오직 저분만 사랑하시기 때문이라고.

“네, 황후 전하.”

“황송합니다.”

그저 그뿐이라고, 그렇게 깨달아야 했다.

“오늘도 즐거웠어. 다들 건강히 잘 지내는 걸 보니 마음이 놓이는군.”

“다 폐하와 전하의 은덕 덕분입니다.”

자리를 마무리하며 황후가 몸을 일으키자 해비가 겸허히 인사했다. 황후는 해비를 보며 생긋 웃었다.

“그래, 그렇지.”

그러면서 황후가 손을 뻗을 때, 다들 자동으로 긴장했다. 그러나 화은은 그저 훤아의 옷깃에 달린 노리개를 반듯하게 매만져 주었다.

“장식이 조금 비뚤어졌구나.”

“황송합니다, 전하.”

“황송할 것까지야.”

황후가 먼저 물러났고, 후궁들은 황후가 물러날 때까지 고개를 깍듯하게 숙였다가 황후가 사라진 뒤에야 허리를 폈다.

‘그래, 차라리 예빈한테 미움받는 게 낫지.’

류하는 한없이 낮췄던 시선을 도로 들며 현명하게 안도했다.

해비랑 친하다는 이유로 예빈의 질투를 감당하는 게 수백 배는 더 나았다. 황제의 총애를 누려 황후의 살의까지 뒤집어쓰는 것보다는.

천덕꾸러기로 자란 이의 본능이랄까. 호의와 적의를 구분하는 류하의 촉은 거의 재능에 가까웠다.

누군가 나를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아니면 단순히 용납하는 정도인지, 만약 적으로 돌아선다면 나를 얼마나 지독하게 짓밟을지, 그런 걸 직감하는 데는 이미 도가 텄다.

무뚝뚝한 수연은 처음에는 어려웠으나 사실 그때부터 본능적으로 이자는 자신을 해치지 않을 것임을 알았다.

조금 뭉툭하지만, 그래도 올곧은 사람. 류하는 수연을 그렇게 판단했다.

화은은 달랐다. 저토록 상냥하고 찬란하고 흠잡을 곳이 없는 모습을 보고 류하는 느꼈다.

아, 저 사람한테 잘못 걸리면 정말 뼈도 못 추릴 거야.

황제가 자신과 한 번도 동침한 적 없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나저나, 정말로 저 사람이 그랬을까?’

수연과 함께 방으로 돌아가며 류하는 곱씹었다.

후궁들은 삼삼오오 뿔뿔이 흩어졌고, 수연과 류하의 처소는 서로 나란히 위치했기에 두 사람은 같이 걸었다.

‘황후가, 온을…….’

저 사람이, 저 상냥하고 찬란하고 한겨울의 바다처럼 무자비한 여인이 정말로 시동생을 죽이고자 자객을 보냈을까.

‘그래서 이렇게 덮는 거야?’

벌건 대낮에 괴한들이 나타나 후궁과 대장군을 덮쳤다. 심지어 그 대장군은 황제의 친동생이었다.

당장 황성이 뒤집히고 추국이 시작돼도 모자랄 판에, 지나치게 잠잠했다.

‘아예 조사를 하지도 않은 거야, 아니면 다 캐 놓고는 쉬쉬하는 거야?’

둘 중 어느 쪽이든 문제였다. 황제가 진상을 밝히기 두려워 아예 조사를 시작하지도 않았든, 아니면 비밀리에 배후를 파헤치며 공개적으로 입을 벙긋하지도 않든.

평범한 백성들은 황족 살인 미수 사건이 일어났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신하들과 궁인들도 일부만 알았고, 후궁들도 다 알면서 시치미를 뗐다.

그리고, 황후는.

‘만약, 진짜로 그 사람이 자객을 보내 놓고 오늘 나한테 그딴 식으로 굴었다면.’

그딴 식으로 친절했다면. 그딴 식으로 친근했다면. 황실의 자상한 안주인으로서 내명부의 아랫것에게 그토록 푸근한 표정을 지었다면.

‘정말, 정말 무서운 사람…….’

만약 당신이 정말로 온을 노리고 자객을 보냈다면, 나도 거기에 휘말려 죽을 뻔했거든요? 그래 놓고 나를 보며 웃으면 안 되지. 만약, 당신이 정말 범인이라면.

아니라고 믿는 것도 거북했고, 확신을 품는 건 너무 두려웠다.

“요즘은 좀 괜찮아요, 월빈?”

잠자코 보폭을 맞추던 수연이 나직하게 물었다. 류하는 상념에 골몰하던 걸 그치고 어리둥절하여 돌아보았다.

“그런 일을 당했는데, 만약 나였으면 최소 달포는 꿈자리가 뒤숭숭했을걸요.”

수연은 덤덤하게, 그러나 실은 다정하게 덧붙였고, 류하는 조금 놀랐다.

“……네, 괜찮아요. 걱정해 줘서 고마워요.”

류하는 호위들과 궁인들이 충분히 멀리 떨어져 뒤따르는 걸 확인한 뒤에야 부드럽게 답했다. 수연은 아주 살짝 웃었다. 조금은 서글프게.

“그래요. 그대는 강인하니까, 괜찮을 것 같았어요.”

수연은 다시 조용해졌다. 류하는 제법 뭉클해졌다.

다른 후궁들은, 심지어 훤아조차 대장군 살인 미수에 대해 한마디 언급도 없었다.

호위와 더불어 험한 꼴을 당할 뻔했던 류하에게 일말의 온정도 없어서가 아니었다.

다만, 무서워서. 살벌한 황궁에서 가늘고 길게 살아남는 법을 뼈저리게 익힌 이들이라서, 침묵했다.

류하는 그들을 원망하지 않았다. 나를 위해 그렇게 나설 필요가 없는 자들인걸.

괜찮냐고, 죽을 뻔했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호들갑을 떨며 안부를 묻지 않아도 돼.

지킬 사람이 있어서, 또는 본인의 안위가 소중해서 한없이 숨죽이는 당신들을 내가 나무랄 처지는 아니니까.

하지만, 정작 이렇게 짤막한 질문을 듣자 명치끝이 먹먹해졌다.

“좀 새삼스럽기는 한데, 무사해서 다행이에요.”

수연이 잔잔히 속삭였다. 사고가 터진 당일에 궁인을 통해 류하가 멀쩡히 환궁했다는 사실을 확인한 뒤로, 직접 진심을 전한 적은 없었다. 이제야 그녀는 미안해하며 고백했다.

“네, 맞아요. 정말 다행이죠.”

류하는 곧바로 수긍한 뒤, 도로 묵묵해졌다. 모두가 금기처럼 여기는 며칠 전의 습격에 대해 너무 오래 떠벌리고 싶지 않았다. 수연도 그 뜻을 좇아 입술을 잠갔다.

수연의 처소가 먼저 나왔다. 수연이 류하를 돌아보며 인사했다.

“살펴 가세요, 월빈.”

류하는 수연을 물끄러미 보았다. 숱한 언어가 혀끝까지 치솟았다가 간신히 스러졌다. 류하는 정중하게 미소했다.

“그대도 살펴 가세요, 성빈.”

실은, 절박한 마음에 그대라도 붙들고 물어보고 싶다.

저기, 혹시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황후 전하가 정말 온 대장군을 해치려 했을까요? 아니면 설마, 다른 배후가 있을까요?

답답했다. 대체 누구와 상의해야 할까. 불과 며칠 전, 황성에는 도깨비가 나타났고 사람이 죽었으며 최소 두 명이 더 죽을 뻔했다.

자객의 머리가 눈앞에서 과일처럼 깨졌고 나도, 온도 그 자객의 칼에 당할 뻔했다.

그런 일이 벌어졌는데 침묵을 강요하고 연회 때 부를 노래에나 집중하라는 이 기막힌 황실에서, 그나마 친하게 여기는 그대와라도 머리를 맞대고 궁리하고 싶다.

그러나 류하는, 역시 그러지 않았다.

두 후궁은 끝내 평소처럼 갈라섰다.

며칠 전, 대장군과 후궁이 가까스로 죽음을 모면한 날.

“처참하군.”

륜은 덤덤하게 중얼댔다. 그는 황궁의 깊은 지하실에서 제 앞에 다소곳이 놓인 여러 구의 시체를 유심히 살폈다. 그중 유독 하나가 그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두개골까지 박살 냈네.’

사실, 다른 평범한 사람이 봤다면 그 특별한 시체는 시선을 사로잡는 쪽이 아니라 시선을 물리치는 쪽이었을 것이다.

단순히 찔리거나 베인 상처가 아니라 살이 으깨지고 뼈가 으스러진 상태였다. 딱 한 명이 그렇게 죽었다. 온의 검이 아닌, 도깨비의 일격에 당해서.

‘……역시, 그냥 죽일까.’

륜은 곰곰이 궁리했다. 눈이 때때로 파랗게 빛나는 이방인 공주. 물론, 륜 본인은 한 번도 그 장면을 본 적 없지만.

‘이런 힘을 물려받았다는 거잖아?’

온의 상세한 증언에 따르면, 푸른 눈의 도깨비는 그날 난데없이 나타나 단검의 날이 아닌 손잡이로 자객의 머리를 내리쳐 뼈까지 부쉈다. 그러니까, 거의 순수하게 물리적 힘으로.

‘아무리 피가 희석됐어도, 만약 수틀리면…….’

여태 월빈은 조용히 지냈다. 그도 그럴 것이, 그자가 시끄럽게 굴어서 얻을 게 없었다.

만약 자신이 그자를 억지로 취하는 상황이었다면 강간당하듯 연명하는 삶이 싫어서라도 깽판을 쳤겠지. 그러나 지금 그자는 편안했다.

월국 왕실을 상대로 인질로 쓸 가치가 있을까 싶어 데려왔더니, 정작 월국 왕은 예상한 것보다도 딸에게 훨씬 무심했다.

또한, 그 왕이라는 작자는 예상한 것보다도 훨씬 겁쟁이였다.

륜은 뭘 별로 하지도 않았는데, 전쟁광으로 소문난 황제가 딸을 요구하자 지레 겁부터 집어먹고 알아서 설설 기는 중이었다.

‘아비가 딸보다 한참 못하군.’

륜은 건조하게 코웃음을 쳤다. 과연 친딸이 맞기는 하는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륜이 지금껏 파악한 월빈은 영리하고 용감했다. 퍽 고집스러우면서도 제 안위나 이득을 위해 몸을 사릴 줄도 아는 약아빠진 자였다.

그런데 그녀의 친부라는 작자를 보라. 정략혼의 대상으로 왕후의 소생을 내놓으라 했더니 그 딸은 몸이 아프다고 둘러대고 다른 이를 떠넘기는 것부터가 황당했다.

아니, 누가 나라 간의 일을 그딴 식으로 처리하냐고. 게다가 너, 나 무섭다며? 네 나라에 나는 폭군으로 소문난 거 아니었니?

그렇게 부분적으로만 딸 바보가 되어 후궁의 여식을 신부로 보내 놓더니, 륜이 먼저 요구하기도 전에 국왕이 스스로 바치는 조공의 양을 늘리겠다고 청했다. 우스울 지경이었다.

‘그래서, 어쨌든.’

상념을 이어 가다가 곁길로 샜다. 고민하는 륜의 표정은 차가웠다.

‘죽여, 말아?’

지금이야 편안하고 조용하게 잘 지내고 있는 월빈이지만, 만에 하나 그자가 배알이 뒤틀리는 일이라도 생긴다면. 모종의 이유로 황실에 지독한 원한이라도 품게 된다면.

그렇다면 사람을 내리쳐 뼈마저 깨트리는 힘을 물려받은 그자가, 과연 가만히 있을까.

‘여태는 굳이 죽일 이유도 없어서 살려 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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