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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궁의 은밀한 연서 (63)화 (63/123)

63화

주안은 다시금 굳게 다짐했다. 비록 나와 상관없는 이종족의 반정이긴 하지만, 내 개인적인 원한도 있고 하니, 너를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내 목숨마저 바치겠다고.

네 삶을 한때나마 시궁창으로 만들었던 그 황제 놈에게 보복할 수 있다면, 나는 당장 근원이 깨져 죽어도 좋아.

“알아서 잘 생각해 보십시오. 당신이 어떻게 해야 내가 가장 기분이 풀어질 것 같습니까?”

가윤은 앙큼하게 도발했다. 그러면서도 눈빛과 몸짓은 여전히 뻣뻣했고, 얼굴은 여전히 장밋빛이었다.

그녀는 이런 간지러운 행위가 여전히 몹시 어색했다. 해 본 적이 있어야지.

싱그러웠을 사춘기에 그녀는 가족을 잃고 헤매는 신세였기에, 이런 봄빛 같은 설렘이 낯설었다.

“음, 알 것 같아. 방금 방법이 생각났어.”

서툴고 어색한 태도를 무릅쓰고 최선을 다하는 용감한 여인을 위해 도깨비는 적극적으로 장단을 맞추었다. 내가 한참 연상이니 내가 이끌어야지, 암, 그렇고말고.

그 ‘한참’이 수백 년 차이라는 점에서 조금 심각한 문제가 있기는 한데, 그런 본질적인 하자는 일단 잠시 잊자.

“이렇게 해 주면 기분이 조금 풀리려나.”

그러더니 그는 고개를 기울여 입술에 입술을 포갰다. 분홍빛이 서로 겹치며 치아가 벌어지고 그 사이로 젖은 혀가 숨결을 밀어 넣었다.

가윤은 눈을 꼭 감았다. 숨 쉬는 법을 잊을 지경이었다.

“하아…….”

가윤이 먼저 신음했다. 주안은 조용히 전율했다.

귀여워라. 교성마저 귀여우면 대체 어쩌라는 건지. 아니, 실은 귀여우면서도 야해서, 주안은 그 괴리에 갇혀 살짝 혼란을 느꼈다.

“엇.”

혼란이 곧 가셨다. 혼란스러워할 틈조차 없을 만큼, 저돌적인 체온이 빠르게 그를 덮쳤다.

주안은 내심 당황했다. 방금까지만 해도 온통 수줍고 서툴던 여인이 지금은 더없이 당당하게 그의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고 있었다.

목마른 새가 물을 삼키듯, 입술을 부리처럼 열어 안쪽을 할짝대며.

“읏……!”

이제는 주안이 움찔했다. 뒤통수를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가윤은 주안의 아랫입술을 살짝 깨문 뒤, 혼탁한 눈빛으로 유혹하듯 그를 응시했다. 먹색 눈에 욕정이 들끓었다.

“하하, 이게 뭐야.”

주안은 작게 실소했다. 하체가 벌써 열기로 저릿했다. 도깨비나 인간이나 창조주는 같은지라, 육체가 흥분하는 원리는 비슷했다.

두 사람은 마음으로나 몸으로나 서로를 동등하게 원했다.

“이럴 거면 여태 왜 거부했어, 응? 가윤아.”

나는 당신을 연모하지 않는다고, 서로 같은 마음이 아니라고, 복수가 끝나고 나면 나는 떠날 거라고, 그리 맨날 말했지.

네가 뭘 두려워하는지 알아. 너의 공포와 나의 불안은 같으니까.

한쪽은 흘러가고, 한쪽은 멈춰 있고. 우리의 시간은 끝내 그렇게 어긋나겠지.

그러나 현재의 맞닿는 순간만이라도 소중히 여기지 않으면 너무 아쉬워서, 그들은 끝을 직감하면서도 서로를 택했다.

주안은 가윤의 허리를 안고 살짝 밀었다. 가윤의 등이 침대에 닿았다. 열기를 머금은 늘씬한 몸은 푹신한 감촉에 파묻혀 단단한 가슴에 덮였다.

도깨비는 입맞춤을 이어 가며 인간의 옷고름을 풀었다. 매끈한 속살이 유려한 곡선을 따라 드러났다. 이번에는 주안이 신음했다. 촉각이 아니라, 시각적 자극 때문에.

“하, 미치겠네.”

주안은 진심으로 난감해서 탄식했다. 대체 뭐가 그리 미칠 지경인지 가윤은 묻지 않았다. 그런 걸 물어볼 틈도 없이 그녀는 갈급히 그의 입술을 삼켰다.

“앞으로 매일매일 해야 할 것 같아.”

주안은 진지하게 푸념했다. 뭐라는 거야, 이 도깨비는. 가윤이 거듭 그의 입술을 오물대며 눈빛으로 말뜻을 묻자, 그는 그녀를 어렵게 떼어 낸 뒤 겨우 답할 틈을 만들었다.

“한 번 보고 나서 어떻게 잊어. 계속 생각날걸.”

주안은 징징댔고, 가윤은 웃었다. 정말, 정말 아름다운 미소. 주안은 홀린 듯 바라보았다.

가족을 잃고 혼자 살아남은 너는 지난 5년간 잘 웃지 않았다. 먹구름을 깨부수는 햇살처럼 이토록 찬란한 눈웃음은, 처음이야.

주안은 감격의 표시로 다시 입을 맞췄다. 가윤은 입술을 벌리고 달큼한 호흡을 섞었다. 미처 벗지 못했던 옷가지가 하나둘씩 몸에서 분리됐다.

한쪽은 단단하고 한쪽은 말랑하게, 둘 다 마찬가지로 뜨겁게, 그들은 공평하게 맞물렸다.

내가 이런 행복을 누리는 게 가당키나 할까 싶을 정도로 가윤은 기쁘고, 기쁘고, 또 기뻤다.

“연모합니다, 주안 님.”

정열의 끝에서 그녀가 말했다. 얘는 또 왜 이러나, 싶어서 주안은 그녀의 얼굴을 훔쳐보았다. 가윤의 눈빛에서 무엇을 보았는지, 그는 본인도 곧장 다정하게 고백했다.

“나도 너를 연모해, 가윤아.”

비록 우리의 시간이 덧없는 일순에 불과해도.

사랑하는 그들은, 속절없이 하나가 되었다.

황궁은 한동안 뒤숭숭했다.

월빈과 대장군이 외출 도중에 자객을 만났다는 소문이 쫙 퍼지더니, 이에 대한 공식적인 발표는커녕 올여름이 가기 전에 연회가 열릴 거라는 뜬금없는 황명이 있었다.

“그래서 내명부의 여인들도 각자 하나씩 공연을 준비하기로 했네.”

이게 웬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며칠 전 내 호위가 죽다 살아났는데, 배후를 밝혀 주지는 못할망정 갑자기 공연 준비나 하라고?

류하는 속으로만 이래저래 욕했고, 겉으로는 얌전히 식탁 위의 찻잔을 내려다봤다. 표정까지 완벽하게 공손할지는 장담할 수 없었다.

“시간이 그리 넉넉하지는 않으니, 최대한 빨리 역할을 정하고 연습을 시작했으면 좋겠는데.”

황후는 그토록 우아하게 뜻을 밝힌 뒤, 손을 뻗어 잔을 쥐고 차에 입김을 불었다. 자리에 모인 일곱 후궁 중에 해비가 부드럽게 맞장구쳤다.

“전하를 실망하게 해 드리지 않겠습니다.”

“실망할 거로 생각하진 않았어. 그대들이 얼마나 다능한 여인인지 내가 모르지는 않아.”

“황송합니다, 전하.”

여기서 월국과 휘국의 차이가 극명히 드러났다.

월국에서 춤이나 음악을 뽐내는 건 어디까지나 아랫것들의 몫이었고, 왕족과 귀족은 고상하게 구경하는 쪽이었다.

고귀한 이가 예술에 관심을 가지면 천한 광대를 흉내 낸다고 비난받기 일쑤였다.

반면, 휘국에서는 귀족이나 황족이 손님들 앞에서 전시할 재주가 하나쯤은 있는 것을 당연한 교양으로 여겼다.

오히려 눈에 드러나는 예술적 소질이 없다면 쟤는 참 재미없는 애라고 욕먹기에 십상이었다. 하다못해 시라도 낭송할 줄 알아야 했다.

‘어떡하지, 나 할 줄 아는 거 없는데.’

류하는 찻잔을 쏘아보며 초조하게 눈살을 찌푸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황제에게 검이 아니라 춤을 배우게 해 달라고 청할 걸 그랬다.

‘시라도 하나 외워야 하나. 아니면 노래를 할까?’

내가 암기력이 부족하지는 않으니 시 암송 정도면 무난하게 마칠 것 같고, 어릴 적부터 음색이 곱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으니 노래도 가능성이 없지는 않았다.

다만, 달랑 시 하나만 외고 무대에서 내려오는 건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너무 초라했고, 단지 음색이 곱다고 해서 모두 전문가처럼 노래할 수 있는 게 아니니, 여전히 걱정스러웠다.

“각자 개별적으로 무대를 꾸며도 좋고, 몇 명씩 조를 짜서 준비해도 괜찮을 것 같은데, 그대들의 생각은 어떤가?”

그때, 화은이 차분하게 제안했다. 류하는 솔깃한 심정에 고개를 들었다.

“서너 명씩 조를 둘로 나누어서 공연하는 것도 좋을 것 같아. 무대를 무려 일곱 개나 연달아 감상하는 것보다는 그게 덜 지루하고 나을 듯하네. 겸사겸사 내명부의 단합도 보여 주고.”

“역시 지혜로운 조언입니다, 황후 전하. 그럼 세 명과 네 명씩 조를 나누어서 공연을 준비하는 게 어떨까요?”

“그래, 그러도록 하게. 자세한 사항은 해비 그대에게 맡길게.”

“황송합니다, 전하.”

해비는 황후에게 우아하게 고개를 조아렸다. 그러더니 류하를 돌아보며 유순하게 물었다.

“월빈, 나와 같이 무대를 꾸며보지 않을래요? 노래를 좋아한다고 했죠?”

“아아, 네. 다만 워낙 미천한 재주라 오히려 마마께 누를 끼치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뜻밖에 지목당한 류하는 당혹감을 숨기며 공손히 대답했다.

황궁에 오면서 가장 빠르게 친해진 훤아와 수연에게 자신이 노래를 좋아한다고 우연히 털어놓은 적이 있었다. 그게 지금 이렇게 이용될 줄이야.

“미천하기는요. 벌써 기대되는걸요.”

훤아는 선하게 방긋 웃었고, 류하는 저절로 마주 웃었다. 세상에, 어떻게 저리 선녀처럼 맑은 사람이 이 세상에 강림했을까, 거듭 궁금해하며.

‘히익.’

훤아를 보며 웃다가 무심코 시선을 돌린 류하는 제게 표독하게 쏟아지는 예빈의 눈빛을 발견하고 조용히 기겁했다.

‘이런, 또 시작이네.’

예빈은 정녕 류하에게 껄끄러운 존재였다. 내 평생 살다가 후궁 하나를 사이에 두고 다른 후궁한테 저렇게 견제받을 줄은 몰랐지.

‘아니, 나보고 어쩌라고?’

류하는 누구와도 척지고 싶지 않았다. 낯선 황궁에서 이방인 계집으로 혼자 살아남기도 벅찬데, 거기다 적까지 만들었다면 고뇌 중에 아마 머리가 터졌을 것이다.

‘당신이 그렇게 노려본다고 해서 내가 해비마마랑 서먹하게 지낼 수 있는 상황이 아니란다.’

예빈이 옛날부터 유독 훤아를 잘 따랐다는 사실은 수연에게 들은 적 있다.

훤아와 예빈은 거의 같은 시기에 간택된 후궁들로, 총 일곱 중에서 최초에 속했다.

가장 먼저 알았던 사이라고 해서 독점욕이라도 부리는 걸까. 친언니를 뺏긴 느낌일지도 모르겠지만, 류하는 다른 후궁들의 애틋한 우정까지 챙겨 줄 틈이 없었다.

‘내 코가 석 자야.’

단 한 명이라도 더 자기편이 필요했다.

그리고 늘 순박한 시골 아가씨처럼 웃고 다녀서 자칫하면 얕잡힐 수도 있는 훤아는, 사실 제국 최강 명문가의 귀한 따님이었다.

친정의 위세로만 따진다면 해비가 황후를 능가할지도 모르겠다. 화은은 꽤 변변찮은 집안 출신이었다.

“나도 같이해도 될까요? 나랑 해비마마가 악기를 연주하고 월빈이 노래를 부르면 되겠네요.”

수연이 시큰둥하게 말을 얹었고, 이제 예빈은 수연을 노려보았다. 수연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무시했다. 다른 여인들은 최대한 모른 척해 주었다.

“그럼 해비, 성빈, 월빈이 함께하고 나머지 넷이 같은 조를 이루면 되겠구나.”

황후는 이 껄끄러운 상황을 간결하게 매듭지었다. 그로써 수면 바로 아래에서 요동치던 격랑은 겨우 다시 억눌렸다. 황실의 안주인이 명했으니, 마땅히 따라야 했다.

예빈은 다시 침울하고도 뾰족한 시선을 류하에게 옮겼다. 류하는 얌전하게 차를 마시며 외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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