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대장군의 얼굴은 알지 않소. 누군가 그자를 공격하는 장면을 봤다면 바로 상황 파악이 됐어야지, 어째서 그리 둔하게 굴었소? 아니지, 애초에 왜 굳이 귀찮게 개입했어요?”
주안이 능청을 떨자 결이 이를 악물고 다그쳤다. 모르는 상황이었다면 차라리 지나쳤으면 될 것을, 왜 굳이 무기를 꺼내면서까지 설쳐야 했는지.
“저기요, 나리, 제가 그렇게 냉혈한은 아닙니다. 눈앞에서 당장 누군가 다른 누군가를 죽이려고 칼을 들었는데, 그럼 제가 그냥 구경하고만 있어야 해요? 마침 제게도 무기가 있었으니 반사적으로 행동한 거죠. 별다른 뜻은 없습니다.”
주안은 어깨를 으쓱하며 거짓으로 해명했다.
대장군이 지키던 그 후궁이 내 반쪽짜리 동족이라고, 혼혈의 힘에 본능적으로 이끌려 그 사람의 아군을 도울 수밖에 없었다고 털어놓지는 않았다.
동족의 비밀을 존중해 줄 생각이었다. 정체를 까발리지는 말아야지.
“참, 말은 번지르르하게 잘하는군.”
결이 싸늘하게 내뱉었다. 그는 주안의 뻔뻔한 낯을 잠시 쏘아보더니, 끝내 한숨을 흘리며 귀찮다는 듯 말했다.
“어쨌든 잘 알겠으니, 이제 물러가시오. 또 쓸데없이 싸돌아다니다가 정체 들킬 생각은 말고, 둘 다 처소에만 틀어박혀 있으세요.”
“여부가 있겠습니까, 나리.”
“명 받들겠습니다.”
주안은 산뜻하게 비꼬며 자리에서 일어났고, 가윤은 정중하고 무심한 태도로 그를 뒤따랐다.
“젠장, 대체 기억은 왜 또 안 지운 거야.”
멀어지는 그들의 등에 대고 결은 다 들으라는 듯 신랄하게 중얼거렸다.
가윤은 멈칫했고, 주안은 돌아볼 필요도 없다는 듯이 어깨 너머로 상쾌하게 대꾸했다.
“급히 빠져나가야겠다는 생각에 그만 잊었지 뭐예요. 이제 와서 뭘 어쩌겠습니까.”
결은 다시 어금니를 깨물었고, 주안은 무시하며 가윤을 위해 문을 열었다. 가윤이 먼저 밖으로 나가자 주안은 마지막으로 결을 돌아보았다.
“그럼 화 좀 그만 가라앉히시고, 필요할 때 다시 불러 주세요, 나리.”
주안은 명백하게 놀리는 투로 생긋 웃은 뒤, 결의 찌푸리는 면전에 대고 문을 닫았다. 방 안에서 결은 이마를 짚었다. 주안은 생글대며 가윤에게 다가갔다.
“그만 좀 못되게 구시라고 제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가윤은 못마땅한 눈빛으로 나직하게 꾸중했다. 주안은 그저 더 짙게 웃었다.
“사람이 싸가지가 없잖아. 그래서 나도 싸가지 없이 구는 건데, 뭐가 나빠?”
“제발, 좀, 쉬이…….”
가윤은 기겁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행히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가윤은 처음에는 안도로, 나중에는 짜증으로 한숨을 폭 뱉었다.
“밖에서는 말을 가리시라고도 말씀드렸습니다.”
“알겠어, 알겠어. 미안해, 가윤.”
“전혀 미안해하시는 기색이 아닙니다만.”
“그래, 그것도 미안.”
“됐고요, 어서 돌아가도록 하죠. 처소에서는 마음껏 싸가지 없게 떠들 수 있으니.”
“바라던 바야.”
주안은 다시 둔갑술로 눈과 귀를 가렸고, 가윤의 얼굴을 주술로 덮어 그녀의 과거를 아는 이들이 그녀를 알아보지 못하도록 했다.
두 사람은 황족의 사저를 빠져나왔다. 그들은 다시 시내의 여관으로 향했다.
“월빈이 반도깨비라는 사실은 말하지 않을 생각입니까?”
단둘의 공간에 무사히 도착하자 가윤이 침대에 걸터앉으며 물었다. 주안은 외투를 벗으며 끄덕였다.
“응. 그러면 월빈 본인이 가장 곤란해질 텐데, 그건 싫어서.”
월빈이 곤란해지는 것 이상으로 황실에 혼란이 번지고 민심이 동요할 거라고, 그래서 자신을 비롯한 다른 반정 세력에게는 더 유리할 거라고, 가윤은 차마 항의하지 못했다.
도깨비 주안은 인간들의 반군에게 빚이 없었다.
주안 외에도 적잖은 이종족이 다양한 이유로 휘국의 황제를 교체하는 일에 동참하기로 했지만, 그들 역시 훨씬 유동적이었다.
인간들의 나라에 대한 절절한 충성심은 없다. 휘륜이나 휘온이나 휘결이나 그들의 눈에는 다 거기서 거기였다.
주안 또한 대전쟁 시절 가장 많은 이종족을 학살한 게 휘국이라서, 그리고 가윤이 휘륜의 죽음을 원해서 휘결의 반정에 참여하기로 한 것뿐이었다.
가윤은 반정을 위해 모든 것을 걸지 않겠다는 주안을 탓하지 않기로 했다.
혼혈 후궁의 정체를 폭로하지 않겠다는 결심에 내가 서운해할 자격은 없어. 가윤은 이성적으로 생각하려 애썼다.
하지만, 원래 사람은 그렇게까지 이성적인 존재가 아니더라.
“네, 그렇겠지요. 당신 동족이니까.”
가윤은 새침하게 중얼댄 뒤 입을 다물었다. 너무 길게 떠들었다간 자신의 수치스러운 본심이 너무 적나라하게 튀어나올 것 같았다.
“설마 섭섭한 건 아니지, 가윤아?”
주안은 문득 초조해져서 소심하게 물었다. 가윤은 주안을 꿍하게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설마요. 전혀 섭섭하지 않습니다.”
전혀요. 전혀. 가윤은 필요 이상으로 부사에 힘을 주었다. 주안은 고개를 갸웃대며 그녀를 살펴보다가, 살짝 씁쓸하게 웃으며 가윤 앞에 몸을 낮췄다.
“그것참 유감이네. 나는 섭섭하거든.”
자기 앞에 아이처럼 쭈그려 앉아 손으로 발목을 감싸는 주안을 내려다보며 가윤은 숨을 참았다.
주안의 저런 식으로 올려다보는 시선에 가윤은 면역력이 꽤 약했다. 사실, 주안에 관한 다른 모든 부분에서도 면역력이 떨어지긴 매한가지였지만.
“딱 봐도 섭섭한 게 있어 보이는데 왜 섭섭하다고 말을 안 해, 응? 나는 그게 더 섭섭해.”
“말장난하지 마십시오.”
“말장난 아닌데.”
주안의 양손이 슬금슬금 위로 올라와 이제는 가윤의 종아리를 쓸었다. 가윤의 맥박이 빨라졌다. 분명 바지를 입고 있는데, 맨살에 손이 닿은 느낌이었다.
“내가 월빈을 감싸는 것 같아서 화났어? 네 복수보다 내 동족이 더 중요할까 봐?”
주안은 맑은 눈으로 처량하게 물었고, 가윤은 그를 똑바로 보기 괴로워서 시선을 피했다. 그녀는 허공을 보며 대답했다.
“제 복수보다 당신의 동족이 더 중요한 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당신께 월빈의 정체를 밝히라고 강요할 생각 없어요. 어차피 그런 정보 없이도 승산은 있으니까요.”
현 황제가 이종족 혼혈을 후궁으로 들이고 그 사실을 숨겼다는 사실이 폭로된다면, 이종족에 대한 반감이 높은 백성들의 마음이 흔들릴 것이다. 그 동요는 반군의 무기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고작 그런 변수 하나에 승패가 갈릴 만큼 반군의 준비가 허술하지는 않았다. 게다가, 가윤은 다른 부분도 마음에 걸렸다.
“그리고 그런 쪽으로 정보를 은폐한 건 오히려 우리가 훨씬 많잖아요. 주안 님이 도깨비라는 사실만 해도 대부분한테는 기밀이고요.”
결을 포함한 반군의 지도부는 주안을 포함한 이종족 조력자들의 정체를 알았지만, 반정에 동참하기로 한 모든 인간이 그 사실을 공유받은 건 아니었다.
“그러니까, 굳이 당신의 의사에 반하면서까지 월빈이 혼혈이라는 사실을 고할 필요는 없습니다. 원하시는 대로 하세요, 주안 님.”
그래, 전략적으로 섭섭해할 이유는 몹시 적다. 별거 아니야. 주안 님의 선택으로 인해 계획에 차질이 생길 리는 없어. 가윤은 자기 자신을 애써 달랬다.
다만, 그녀의 눈빛은 아직도 은근히 뾰로통했다. 평소에 워낙 무심한 표정이라 아주 작은 흔들림조차 너무 쉽게 드러나는 걸까.
“흐음, 가윤아. 내 생각에는 있잖아.”
아니면, 그냥 너의 미세한 감정 하나하나가 이제는 내 눈에 너무 잘 보이는 걸까. 주안은 어느새 웃고 있었다.
“너도 질투하는 것 같은데.”
그의 손은 그녀의 무릎에 닿았다. 그는 허리를 펴고 아래가 아닌 위에서부터 그녀와 눈을 맞췄다. 토끼처럼 얼어붙은 가윤을 보며 주안이 속삭였다.
“내가 너 말고 다른 여인을 챙기는 것 같아서 기분이 나쁘니?”
가윤은 자신을 압도하는 주안의 시선을 가만히 맞바라보았다. 하늘 같기도 하고 바다 같기도 하고, 때로는 별빛 같은 밝은 파란색. 자신을 볼 때 오직 애정만을 담아내는 선명한 벽안.
“……네, 그런가 봐요.”
가윤은 나직이 대꾸했다. 예전 같았으면 아닌 척하며 잡아뗐을 텐데, 며칠 전의 입맞춤 이후, 핑계조차 사라졌다.
밀어낼 거면 끝까지 밀어냈어야지. 자신이 의지가 약해서 그를 받아들였으면서 이제 와서 거리를 벌리는 건 비겁했다.
가윤은 비겁한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이 소중한 사람 앞에서는, 더더욱.
“제가 질투했나 봅니다. 당신이 제가 아닌 다른 여인을 감싸서요.”
유치하고 창피해도 꿋꿋이 말해 볼게. 당신이 월빈에 대해 거듭 얘기하는 게 싫어. 도깨비 피가 석였다는 이유로 묘한 동질감을 느끼고 호기심을 보이는 것도.
가윤은 이제 주안이 어째서 온 대장군이 언급될 때마다 제 앞에서 그렇게 불퉁해졌는지 이해했다. 그건 논리나 이성과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아무리 비합리적이어도, 생떼 쓰는 어린아이처럼 우스워도. 누군가를 마음에 담게 되는 순간, 그런 것들은 의미를 잃었다.
“내가 방금 그 말 듣고 되게 기분 좋아졌다고 말하면, 화낼 거야?”
주안은 빙그레 웃었다. 아, 숨 막히는 아름다움이여. 가윤은 저 미소에 자신을 낱낱이 녹여 담고 싶었다.
아직도 먼저 죽은 가족을 향한 죄책감이 컸고, 언젠가는 이 사람을 보내 줘야 한다는 생각을 했지만, 그래도 지금은, 불완전한 찰나만큼은, 그의 온기를 독점하고 싶었다.
“아니요. 제가 어찌 감히 당신에게 화를 내겠습니까.”
가윤은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더니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주안을 보며 청했다.
“대신, 조금 토라질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당신이 저를 잘 달래 주셔야 합니다.”
주안은 가윤의 말뜻을 곱씹다가, 상대방이 참을 수 없이 귀여워서 결국 피식 웃고야 말았다.
“흐음, 글쎄. 내가 너를 어떻게 달래 주면 좋을까?”
이제 보니 가윤은 진지한 게 아니라, 긴장한 거였다. 주안은 자신의 사랑스러운 연인을 놀리며 몸을 더 가까이 붙였다.
주안의 팔이 가윤의 허리를 감아 당겼다. 상체가 밀착했다.
“내가 너를 어떻게 달래 주면 좋겠어? 응?”
이미 다 알면서, 주안은 자신의 깜찍한 애인을 품에 안고 실컷 놀렸다. 스물한 살 여인은 얼굴이 새빨갰다.
주안은 종종, 가윤이 생각보다 훨씬 어리다는 사실을 잊었다. 조금 더 풋풋해도 될 나이였다. 이제 갓 친정을 떠나는 새색시 정도 되겠지.
그런데 너는 어째서 열여섯 살 앳된 나이에 가족을 잃고, 이제는 망자의 썩은 몸을 되살려 군대를 이룰 생각을 아무렇지 않게 하며, 복수를 위해 삶을 내거는가.
이런 너를 보며 가슴이 아파. 정말로 휘륜을 죽여 버리고 싶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