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그나저나, 일이 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류하는 수수한 차림으로 침대 위에 웅크려 다리를 끌어안았다. 눈빛이 골똘하게 가라앉았다.
첫사랑과 첫 입맞춤 외에도 생각할 게 많아서 머리와 마음이 터질 것 같았다.
‘그 도깨비는 뭐야, 누구 편이야? 도깨비 맞지? 파란 눈에, 분명 신통력도 나와 같았고…….’
같기는 같되, 훨씬 강했다. 인간의 피가 섞여 묽어진 나의 힘과 비교도 안 될 만큼 강력했어. 딱히 말로 설명할 수는 없어도, 그때 분명 느꼈다.
‘왜, 도깨비가 인간이랑 같이 다니는 건데.’
대전쟁 이후, 이종족은 전설 속의 존재였다.
그래서 내 어머니도 인간으로 꾸민 도깨비와 정을 통해 나를 낳고도 네 아비는 신적인 존재니 뭐니, 그렇게 부정확한 말을 늘어놓은 거겠지.
‘신적인 존재는, 무슨.’
그냥 우리와 다른 존재일 뿐이다. 아, ‘우리’라고 함부로 부르면 안 되나.
피가 각각 반씩 섞여 어느 쪽에도 오롯이 속하지 못하고 겉도는 류하는 잠시 설움에 치여 입술을 물었다.
‘그래서, 대체 왜.’
뜬금없이 웬 도깨비가 5년 전에 죽었다고 알려진 인간 여자와 같이 다니는 것도 이상했고, 난데없이 나타나 대장군을 구한 것도 이상했다.
‘5년 전에 죽었다고 알려진, 인간 여자…….’
그래. 그 부분도 정말 의문이었다.
다시 생각은 온에게로 돌아갔다. 류하와는 초면인 미지의 여인을 보고 가윤 낭자, 라고 애틋하게 부르던 그의 모습이 박제된 듯 떠올랐다.
‘으으, 아니야, 그렇게 애틋하지는 않았는데?!’
바보 월류하. 내가 지금 유치한 질투심에 눈이 멀어 기억을 심각하게 왜곡하고 있구나.
류하는 자학하는 마음으로 무릎에 이마를 콩콩 박았다.
‘5년 전. 5년 전이라. 그렇다면 지금 황제가 즉위할 때 멸문당했다는 뜻인데. 가족이 온을 지지하는 쪽이었나.’
세상 물정 모르고 큰 공주도 권력의 기본적인 흐름쯤은 알았다.
적법한 황태자를 제치고 제위를 탈취한 새 황제가 그 태자의 지지 세력을 곱게 뒀을 리가 없었다.
‘그러니까 그 여인은 일가족이 온을 편들었다는 이유로 황제에게 죽임을 당했다는 건가.’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류하는 덜미에 오싹 소름이 돋았다.
‘만약 내가 그런 상황이었다면, 나는 누구를 가장 미워할까?’
현재 류하가 머릿속에 재구성한 과거는 어디까지나 그녀의 추론에 근거한 얘기였고, 이를 뒷받침할 정보는 아직 불충분했다. 물론, 추론과 진실이 정확히 일치하긴 했지만.
‘내 가족의 숙청을 주도한 황제?’
가족이 역적으로 몰려 죽었다면, 가장 큰 원수는 당연히 처형을 명한 황제겠지. 아니면.
‘……애초에 자리를 빼앗긴 온?’
그러면 좀 많이 곤란하다. 아니, 곤란한 정도가 아니라 상당히 끔찍했다.
대장군에게 원한을 품었을지도 모르는 사람이 인간의 머리를 과일처럼 깨부수는 강력한 도깨비와 함께 다니고 있다니, 류하는 생각만으로도 아찔했다.
다른 많은 건 바라지 않기로 했다. 내가 그의 정인이 되지 않아도 좋아.
우리의 처음이자 마지막 일탈은 추억 속에 묻어 두고, 나는 그대의 형수이자 뒷방 후궁으로 그냥 죽은 듯이 살게.
제발, 그대가 무사하기만 했으면 좋겠어.
그 간단한 소원조차 너무 어려운 일일까.
누군가 자객을 보내 저를 죽이려 하고, 황제에게 아들이 생긴다면 목숨이 위태로워질지도 모르고, 강력한 이종족과 함께 다니는 웬 여인에게 원한을 샀을지도 모르는 휘온. 나의 첫사랑.
제발, 끝까지 건재하기만 해다오.
그날부터 류하의 희원은 단 하나뿐이었다.
자신의 이복동생이 죽을 뻔한 날 밤, 륜은 정비와 합방했다.
“오늘 자객들이 월빈과 대장군을 덮쳤어요.”
륜이 화은을 보며 나직하게 운을 뗐다. 잔에 술을 따르던 화은이 멈칫했다.
“네, 저도 들었습니다.”
그녀는 마침내 동작을 재개하며 끄덕였다. 주전자를 기울이는 손길에 떨림은 없었다.
“그래, 들었겠지.”
륜은 평소와 다르게 굳은 낯이었다. 화은은 륜이 고작 그 철부지 이복동생 때문에 제게 저런 눈빛을 보이는 게 싫어서 한숨을 삼켰다.
“폐하, 저를 의심하십니까?”
화은은 정면 돌파를 택했다. 발 빠르고 입이 싼 궁녀들을 통해 오늘 낮에 궐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들은 때부터, 이런 순간을 예측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왜요, 내가 그대를 의심하는 것 같아요?”
륜은 짐짓 삐딱하게 따졌다. 화은은 그를 대놓고 쏘아보고 싶은 마음을 꾹 참았다.
“폐하, 아마 수많은 신하가 이번 일로 저와 제 친정을 공격하며 폐하의 마음에 불신을 심으려 하겠지요. 그때마다 흔들리실 겁니까?”
싸늘한 도발이었다. 고작 내게 이런 식으로 나오면서 앞으로 나와 내 가족을 지켜 줄 수 있겠냐는 물음.
뭐, 그놈의 가족이야 어찌 되든 제 알 바가 아니지만, 자신의 딸과 나중에 태어날지 모를 아들의 외척 되는 이들이기에 그들도 무사해야만 했다.
“설마요.”
륜은 새침하게 꼬리를 내렸다. 그러더니 다시 예전처럼 빙긋 웃으며 화은의 옷자락을 건드렸다.
“고작 그딴 이간질과 모함 때문에 갈팡질팡할 사람이었다면, 내가 애초에 여기까지 올라왔겠어요?”
적어도 같잖은 중상모략과 진실한 고발쯤은 구분할 재주가 있다고 내심 자부했다. 황자 시절 내내 본인이 직접 당했던 일들이니.
<폐하, 저 계집이 태자의 차에 독을 탔습니다!>
<폐하, 미천한 1황자가 후궁들이 다니는 길목에 덫을 놓았습니다!>
<폐하, 저 계집의 궁인들이 폐하를 모독하는 말을 나누는 것을 들었습니다!>
지긋지긋한 앵무새 같은 소리. 전부 무고죄로 판결하여 엄벌로 다스려야 했던 것들.
황제는 황후가 첩의 아들을 모략하는 것임을 알면서도 태자를 위해 눈감아 주고, 정작 황태자 본인은 작은어머니와 형님께서 그럴 리가 없다고 변호하는, 별 웃기지도 않던 나날이었다.
‘그 정직한 성품 덕분에 그대가 살았죠, 아우님.’
사람들이 냉혈한이라 욕하는 나도 실은 한낱 감상적인 인간이라, 그런 한결같은 호의를 받고도 도저히 물러지지 않을 수 없었어요.
“그러니 그대는 걱정하지 마세요, 황후. 그대의 결백을 믿습니다. 그러니 그대도 나를 온전히 믿어 줘야 해요. 내가 그대에게 오래전에 한 약속을 지키겠다는 그 마음을.”
고급 비단을 한 겹씩 벗겨 내며 륜은 속삭였다. 화은은 지아비의 손길을 가만히 느끼다가, 문득 그의 손을 붙들며 그와 눈을 맞췄다.
“폐하께서 저를 설득하셔야 할 겁니다. 그 약속이 아직 믿을 만한 가치가 있다고.”
당돌한 발언이었다.
만약 화은이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면, 또한 륜이 폭군 놀이를 하던 즉위 초반이었다면 본보기로 목이 날아가도 모자랐을 말이었으나, 륜은 그저 너그럽게 웃었다.
“최선을 다해 노력하지요.”
직후 륜은 아내의 뒷머리를 감싸며 입을 맞췄고, 화은은 남편과 숨결을 섞으며 부디 이번에는 아들을 배기를 바랄 뿐이었다.
륜은 자신은 결백하다는 화은의 말을 믿었다. 믿지 않았다. 믿고 싶었다. 믿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만약 화은이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라면 다른 누군가 온의 목숨을 노린다는 뜻인데, 그게 누구일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지금 온을 죽여서 얻는 게 뭐지? 황태제 후보를 없애는 거? 하지만 아직 황실에는 황자조차 없는데? 아들도 동생도 없는 황제는 대체 누구를 후계자 삼아야 한단 말인가?
온이 죽고 륜은 계속 아들이 없어 동궁의 자리가 빈다면, 과연 누구에게 가장 큰 이득일까.
슬슬 다른 황족들을 한자리에 모을 때가 됐다고 륜은 결론지었다.
오랜만에 열리는 가족 모임이었다.
수도의 외곽에 사택을 짓고 사는 황제의 육촌 휘결은 상황이 퍽 재미있게 돌아간다고 생각했다.
그는 눈앞에 두 사람을 앉혀 놓고 자신의 감상을 공유했다.
“황제가 내게 초대장을 보냈소. 나뿐 아니라 황실과 조금이라도 엮인 사돈의 팔촌까지 죄 초대받은 것 같던데.”
정확히 하자면, 둘 중 하나만 ‘사람’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눈 파란 도깨비였다.
문제의 그 도깨비는 딴청을 피우며 시선을 돌렸고, 옆에 여인은 가만히 앉아 있었다.
“전쟁의 종식과 평화의 시작을 선포하며 황족끼리 친목을 도모하는 연회라. 명목은 그럴싸한데, 결국 핑계잖아.”
서늘한 인상의 중년 사내가 도깨비와 여인 앞에 서신을 내던졌다. 과연, 황실에서 온 서신이었다.
조만간 황궁에서 연회가 열릴 테니, 황족의 피가 단 한 방울이라도 섞인 이는 재깍재깍 달려오라는 내용이었다. 목숨이 아깝지 않다면.
물론, 목숨 운운하는 마지막 부분은 실제로 서신에 적혀 있진 않았다. 수신자들이 알아서 해석한 부분이었다.
“다들 모아놓고 하나씩 추궁하겠다는 거지. 안 그래요?”
사내는 의문문으로 말을 끝맺었으나, 가윤도 주안도 저 사람이 정말 답을 모른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이건 심문이 아닌 신경질이었다.
“뭐, 나리께서 그리 말씀하신다면 그런 거겠죠. 나리는 똑똑하신 분이니까요.”
주안은 해맑게 비꼬았고, 결은 어금니를 으득 깨물었다. 물리적으로도, 전략적으로도 저 건방진 놈을 쥐도 새도 모르게 없애 버릴 수 없음이 천추의 한이었다.
“나는 그대들도 적어도 나만큼은 똑똑한 줄 알았소. 적어도 그대들이 왜 내 밑에 들어왔는지 끝까지 기억할 만큼은 총명한 줄 알았는데.”
결이 딱딱거리자 주안은 눈썹을 치켰고, 가윤의 눈빛은 조금 싸늘해졌다.
둘 다 일단은 아무 말도 없었다. 그러자 결은 더욱 집요하게 항변을 이어 갔다.
“그런데 내 일에 직접 훼방을 놓은 것도 모자라, 내 부하를 죽여? 제정신이오?”
스스로 황제가 되기로 결심한 이상, 친모를 인질로 잡혀 이복형에게 충성하는 대장군은 방해물에 불과했다.
게다가 그놈이 살아 있으면 결 본인의 정통성이 떨어진다.
선황의 나머지 직계는 전부 처형당하고 온 혼자 남은 지금, 아무리 륜을 처치한다 한들 한참 방계인 결은 입지가 위태로울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를 일찌감치 제거하기 위해 자객들을 보냈더니, 이게 웬걸. 그들 전부가 당했다.
황당해진 결이 나중에 사람을 보내 정황을 파헤쳐 보니, 자객 하나는 머리가 깨져서 죽었다고 한다. 검에 베이거나 찔려서가 아니라.
뭉툭한 물체로 내리치는 것만으로도 두개골을 깨부수는 힘은 결코 인간의 것이 아니다.
결은 날카로운 직감으로 주안에게 연락했고, 예측한 답을 들었다.
“그 사람이 나리의 부하인 줄 제가 어찌 알았겠습니까? 얼굴을 본 것도 아니고, 나리께서 제게 귀띔하신 적도 없는데요. 미리 알았더라면 안 그랬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