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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궁의 은밀한 연서 (60)화 (60/123)

60화

잿빛 소나기. 잔잔한 빗소리. 뜨겁게 감기는 숨결. 체온. 신음. 귓가를 간질이는 눅진한 저음. 혀끝에서 녹던 속살. 다시는 꿈꿔서도 안 될 일탈.

황궁으로 돌아와 제게 주어진 현실을 다시 직시하고 나자, 불과 몇 시간에 자신이 얼마나 미친 짓을 저질렀는지 더욱 새롭게 다가왔다.

“보고 싶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미친놈처럼 속삭인다.

“류하 님.”

벽에도 귀가 달린 황궁에서는 호흡조차 계산하며 뱉어야 하거늘, 속에만 꾹꾹 담아 두기엔 너무 버거워 나도 모르게 혼잣말을 흘린다.

온은 눈을 감았다. 소낙비와 일탈, 자객들의 비명과 핏빛 죽음. 눈이 보석처럼 빛나던 생경한 존재. 그런 것들이 겹쳐 너무 피곤했다.

류하 님. 가윤 낭자. 자신이 절대 연모해서는 안 될 분과, 어쩌면 자신의 신부가 되었을 어느 여인.

복잡하게 뒤엉킨 하루의 끝에, 나는 정답을 모른 채 가라앉는다.

그리고 그 심연 속에 울리는 부하의 탄식.

<하, 조사요…….>

마치 황제가 절대 이번 일을 제대로 조사하지 않을 거라고 믿는, 그런 냉소적이고 불경한 발언이었다.

온은 그를 이해했다. 사실, 온도 비슷한 심정이었다.

자객들의 배후를 캐다가 혹여 정말로 황후가 범인으로 밝혀질까 봐 황제가 이번 일을 조용히 덮으려 할 가능성도 컸다.

온은 원망하지 않았다. 어차피 이건 덤으로 사는 삶이다. 5년 전, 나는 형님의 가장 큰 경쟁자로서 진즉 죽었어야 했다.

그냥 너무, 너무 피곤해.

간신히 견디는 나날이었다.

온의 부하들이 바람 같은 속도로 소식을 알아냈듯, 후궁전에도 속보가 순식간에 퍼졌다.

“흐어엉, 마마, 저는 마마께서 정말로 돌아가신 줄 알았습니다!”

“제하야, 침착해, 그만 울거라. 그리고 제발 내 귀에 대고 소리치지 말아 줄래?”

“흑, 흐윽, 송구합니다, 마마. 어쨌든 마마, 정말 다행입니다. 무사하셔서 정말 다행이에요.”

“그래, 나도 내가 죽지 않아서 정말 기뻐. 이제 그만 울고, 목욕물을 좀 준비해 주렴.”

“흑, 히끅! 네, 마마. 명 받들겠습니다.”

제하의 호들갑은 결국 딸꾹질로 끝났다. 제하가 상전의 목욕을 준비하기 위해 목욕간으로 쭐레쭐레 사라지자, 류하는 내심 안도로 혀를 내둘렀다. 휴, 쟤는 정말 시끄럽구나.

“마마, 탈의를 도와 드리겠습니다.”

“그래, 고맙다. 더러워진 의복은 바로 빨도록 해.”

“네, 마마.”

제하 외에도 월빈을 시중드는 이들이 그녀의 곁에 옹기종기 모였다. 전부 제국 궁인들이었지만, 제하와 마찬가지로 진정 류하를 걱정하는 모습이었다.

“세상에, 마마, 온몸에 멍이…….”

류하의 속옷 끈을 풀던 궁인 하나가 울먹였다. 궁인의 시선을 느낀 류하의 마음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녀가 최대한 태연하게 달랬다.

“일단 씻고 나서 의원을 불러 제대로 치료할 테니, 걱정하지 마.”

실제로 자객을 피해 구르느라 전신에 자잘한 상처가 가득해서 다행이었다.

궁인이 지적한 쇄골 부근의 검푸른 자국은 절대, 절대, 절대 역경으로 인한 부상이 아니었다.

‘으악, 이 대장군 놈아, 내가 진짜 너 때문에 미쳐…….’

류하는 식은땀을 흘렸다.

이 순진한 궁녀들은 살면서 단 한 번도 입맞춤 때문에 생긴 자국을 실제로 본 적이 있을까? 없겠지? 없으니까 모르겠지? 일반적인 멍이랑 구별이 안 되겠지? 제발, 그렇다고 해 줘.

‘평소에는 그렇게 목석같으면서.’

예전에는 그렇게 근엄하고 진지해서 내가 그대를 처음 만나 휘국으로 오는 내내 저자는 몸속에 돌이 흐르나, 고민하게 했던 인간인데.

그토록 점잖고 진중하여 더욱 사랑스럽던 사내가 하늘에 빗물이 들어차자마자 그렇게 짐승처럼 변할 줄은 누가 알았을까.

‘뭐, 나도 할 말은 없지만.’

궁인들의 손에 이끌려 온수에 몸을 담그며 류하는 자신의 이중인격 또한 겸허히 인정했다.

나, 세상 물정 모르는 파릇파릇한 스무 살 공주 아니었니? 거의 평생 별궁 밖에 나가 본 횟수도 손에 꼽을 정도인걸. 연애와 정사는 당연히 책으로만 배웠고.

그런데 불과 몇 시간 전, 채 반나절도 안 되는 시간이 흐르기도 전에, 나는 그대에게 온몸을 맡겼어. 그대의 온몸을 원했어.

지독한 갈증이었어. 너무 달콤해서 서러웠어.

기억을 낱낱이 더듬자 얼굴이 붉어졌다. 낯가죽에 불꽃을 바른 느낌이었다. 류하의 머리칼을 감겨 주던 궁녀 하나가 걱정스레 여쭈었다.

“마마, 안색이 몹시 붉습니다. 혹시 신열이라도 있으신지요?”

“글쎄, 잘 모르겠구나. 너무 놀라서 그런가, 정신이 없어. 의원이 오면 제대로 진료받겠다.”

“네, 마마.”

류하는 그럴싸하게 둘러댔고, 궁녀는 애처로운 눈빛으로 끄덕였다.

류하는 퍼뜩 죄책감을 느꼈다. 윽, 나를 위해 진심으로 걱정해 주는 순진한 애들을 속이는 느낌이잖아. 평범한 멍과 입맞춤의 흔적도 구별하지 못하는 천연기념물 같은 애들인데.

‘……그런데, 나 지금 대체 뭐 하냐.’

류하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궁인들을 상대로 거짓말하는 것보다 훨씬 거대한 과오에 대한 죄악감이 그녀의 양심을 아프게 찔렀다.

사람이 죽었다. 사람이, 죽었어.

돈이나 명령을 받고 대장군을 죽이려 한 나쁜 사람들이지만, 그래도,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살아 숨 쉬던 누군가가 류하의 눈앞에서 죽었다.

칼에 찔리고, 베이고, 누군가는 머리통이 깨져서.

원초적인 비애가 류하를 짓눌렀다. 타인의 흥건한 피를 목격해 놓곤 지금 자신은 목욕이나 즐기며 입맞춤 따위를 회상하는 상황이 뒤늦은 수치심으로 다가왔다.

게다가, 이건 정치적으로 분명 심각한 사안이었다. 류하는 그 자객들이 자신이 아닌 온을 노렸다고 확신했다.

한낱 후궁인 내가 목숨을 위협받았어도 후폭풍이 엄청났을 텐데, 하물며 온이라면 얼마나 더 심할까. 선황의 적자요, 현황의 동생인 그인데.

대체 누가 그를 죽이려 했을까.

‘황후……?’

명료한 대답이었다. 아직 황실이 낯선 이방인 후궁이 생각하기에도 너무 당연하고, 지나치게 뻔한.

‘……일 리가.’

아닌가? 정말 황후가 맞나? 설마. 황궁에 들어온 지 고작 한 달쯤 된 나조차 이렇게 쉽게 그 사람을 의심하는데, 그 사람이 과연 스스로 무덤을 팠을까?

만약 황후가 아들을 가진 뒤였다면 확신이 더 섰을지도 모른다.

장성한 숙부는 어린 조카에게 존재만으로도 위협이고, 태자를 낳은 황후의 입지도 훨씬 탄탄했을 테니, 그녀가 조금 무모하게라도 온을 제거하려 했다면, 그래, 훨씬 납득하기 쉬웠다.

그러나 조만간 온을 황태제로 책봉해야 할지도 모르는 판국에 황후가 섣불리 움직였을 것 같지는 않았다.

‘어쩌면 그런 판국이라 더더욱 조급했을지도 모르지.’

온이 황태제가 된다면 나중에 황후가 아들을 낳더라도 그 아들을 황태자로 삼는 건 여러모로 어려울 것이다.

언제 태어날지 모를, 태어나기나 할지도 알 수 없는 아들을 위해 황후는 시동생을 미리 죽이려 했을까.

그런데, 그러다 영영 륜이 아들을 보지 못하면? 지금은 그가 팔팔한 스물일곱 살이니 하염없이 기다린다 쳐도, 나중에 그가 늙은이가 되고 여전히 황실에는 황녀들뿐이라면?

그때 가서 머나먼 종친을 찾아 꾸역꾸역 후계자로 삼는 것도 껄끄러운 일일 터.

황자의 탄생을 자신할 수 없는 지금, 미리 온을 없애 버리는 건 황실의 대를 끊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류하가 여태 파악한 화은의 실체는 냉철하고 현명한 사람이었다. 후계 구도가 불안정한 상태에서 함부로 큰일을 벌일 것 같지는 않았다.

‘만에 하나 황후가 황자를 낳고 나면, 그러면…….’

그러면, 그때 가서야 큰일을 벌이려나?

그렇게 되면, 온은 어찌 되는 걸까.

류하는 온을 걱정했다. 그녀가 모르는 사이에 그가 자신의 처소에서 그녀의 평안을 기원하듯이, 그녀도 상황이 딱 이대로만 유지돼서 그가 끝까지 무사하기를 바랐다.

황제의 후계? 황손의 출산? 그딴 게 다 나랑 무슨 상관이야.

이 거대한 나라가 혼란스러워지면 주변의 약소국들에도 불똥이 튈 테고, 여기서 살아가는 나와 대장군도 필시 휘말릴 테니, 그저 최소한의 안정을 바랄 뿐이었다.

그대가 황태제가 되든 황제가 되든 그냥 평생 일개 장수로 살든, 부디 무사하기를. 지금처럼, 딱 이대로만.

“이제 침소로 돌아가자.”

“네, 마마.”

딱, 지금처럼만. 그런데 그 소박한 소망조차 류하의 마음을 무겁게 했다.

목욕을 마치고 처소로 돌아가며 류하는 불과 몇 시간 전의 뜨거운 순간을 곱씹었다. 몸의 곳곳에 닿던 갈급한 입술. 자상하고도 저돌적이던 숨결.

그런 것들이 찰나의 일탈일 수밖에 없는 이 갑갑한 상황이, 나는 그대를 위해 영영 이어지기를 바라야 하는구나.

차라리 우리 둘이 도망가면 어떨까.

하지만 그대는, 그대의 모친과 부하들을 절대 떠나려 하지 않겠지.

“마마, 해비마마와 성빈마마가 각자 궁인을 보내셨습니다. 마마의 안부를 묻는 전갈입니다.”

마른 옷으로 갈아입고 궁인들의 도움을 받아 머리카락을 빗던 중에 궁인 하나가 다가와 고했다. 류하의 눈매가 굳었다.

‘하여간, 황궁 안은 소식도 참 빨라.’

자신과 나름 친하게 지내던 월빈이 뜬금없이 궐 밖에서 자객들의 습격을 받았다는 말을 듣고 꽤 놀란 게 분명했다.

류하는 자신을 위해 염려해 주는 두 사람이 퍽 고마웠지만, 지금은 그들의 근심 및 호기심 어린 질문에 일일이 답해 줄 심적 여유가 없었다.

“나와 대장군 둘 다 무사하고, 나는 방금 환궁해서 씻은 뒤 이제 처소에서 쉴 예정이라고 궁인들에게 전하렴. 그리고 그 애들을 안으로 들이지는 마.”

“네, 마마.”

아무도 외부에서 들이닥쳐 자신의 휴식을 방해하지 못하도록 미리 명시한 뒤, 류하는 의복과 머리의 정돈을 마쳤다.

이제는 정말, 혼자 쉬면서 생각할 차례였다.

“너희도 전부 나가 있어라.”

류하는 본인의 궁인들까지 전부 물렸다. 혼자 남은 공간은 고요했고, 화창했다.

류하는 변덕스러운 날씨를 종잡지 못해 창밖을 뚱하게 바라보았다. 언제는 온 세상을 잡아먹을 기세로 소낙비가 쏟아지더니, 이제는 다시 쾌청하다.

‘……뭐, 덕분에 기뻤지만.’

날씨가 변덕을 부린 덕에 폐가에 갇힐 수 있었다. 그곳에서 마음을 확인했고, 처음이자 마지막 입맞춤을 나눴다. 앞으로 이어질 절망의 나날에 한 조각 빛이 될 애틋한 추억을 쌓았다.

그 순간을 되씹으면 너무 고통스러워 심장이 반으로 쪼개질 것 같기도 하지만, 영영 그와 단 한 번도 맞닿지 못하느니 그런 고통을 감내하는 게 나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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