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주안의 마음에 다시 유치한 감정이 솟구쳤다. 그의 눈빛이 한결 식었다.
“왜, 대장군이 너에 대해 폭로할까 봐 걱정돼?”
또. 또, 휘온을 언급하며 내게 날을 세우고 있어. 가윤은 주안을 유심히 보다가, 그냥 대놓고 묻기로 했다.
“주안 님, 지금 질투하세요?”
그러자 주안의 뺨이 진홍빛으로 물들었다.
“야, 너는 그런 거 직설적으로 물어보지 마.”
그는 미약하게 항변하며 시선을 돌렸다. 건성으로 자신의 얼굴을 쓱쓱 문질러 보았지만, 그런다고 홍조가 지워지진 않았다.
“주안 님, 당신이 질투할 필요가 없습니다.”
가윤은 떨떠름하게 타일렀다. 질투, 질투라. 나와 휘온의 관계를 두고 질투라니. 그야말로 대상도 없이 허공에 대고 헛발질하는 수고였다.
“그리고 질투할 이유도 없지요.”
그녀는 조금 더 잔인하게 덧붙였다. 당신은 질투할 대상도 없거니와, 질투할 자격도 없다. 나와 휘온이 아무 사이도 아니었듯, 나와 당신도 지금 아무 사이가 아니거든.
당신은 은인, 나는 채무자. 복수를 다 마치고 빚을 갚고 나면, 떠날 거야.
“글쎄. 나는 이유가 충분하다고 생각해.”
주안의 음성이 낮아졌다. 그가 문득 상체를 기울여 거리를 금세 좁혔다.
가윤은 숨을 삼켰다. 실수였다. 숨을 삼킴과 동시에 주안의 입술에서 풍기는 옅은 향기가 그녀 안으로 빨려들었다.
“아까 뜬금없이 월빈이랑 대장군 만나기 전에, 내가 너한테 뭐라고 말했는지 잊었어?”
주안이 속삭였다. 가윤은 혹여 숨결이 엉킬까 호흡을 억눌렀다.
충분히 뒤로 물러날 수 있는 상황이었으나, 벽에 가로막힌 듯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같이 살자고 했잖아. 반정이 끝난 뒤에도.”
주안은 절박하게 고백했다. 다시, 또다시. 매번 밀려나도, 또.
상대방이 지겹다고 여기더라도 할 말이 없을 만큼.
그러나 그녀는 단 한 번도, 지겹다고 여긴 적 없었다.
가윤은 그제야 시선을 돌렸다. 기왕 눈을 피했으니, 이제는 아예 몸까지 틀어 회피해 볼까. 언제나처럼 외면해 볼까.
아니면 딱 한 번만, 그저 한순간이라도 진심에 따라 행동해 볼까.
“좋은 동족을 만나시길 빌겠습니다.”
가윤은 새침하게 중얼거렸다. 주안은 나직하게 실소했다. 헛웃음에 섞인 가냘픔 숨결이 그녀를 간질였고, 그녀는 미칠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래, 나중에라도 꼭 만났으면 좋겠네.”
주안은 씁쓸하게 읊조렸다. 가윤의 심장이 지끈 쑤셨다.
바보, 욕심쟁이. 자신은 받아 주지 못하겠다고 철벽을 세웠으면서, 정작 다른 이의 품에서 행복할 주안을 상상하자 턱이 저절로 뻣뻣해졌다.
“그런데 말이야, 지금 당장은 주변에 그런 도깨비가 없거든.”
가윤의 굳어진 눈빛에서 무엇을 봤는지, 주안은 다시 픽 웃으며 조심스레 손을 뻗었다. 전혀 강압적이지 않은 손길이 가윤의 턱을 쓸었다.
살짝 당기는 힘에 이어 가윤의 시선이 정면으로 돌아갔다. 파란 눈과 검은 눈이 다시 만났다.
“그러니까, 그때까지만이라도.”
충분히 뿌리칠 수 있었다. 충분히, 뿌리칠 수 있는데.
지금 순간에마저도 주안은 가윤에게 선택할 기회를 주고 있었다. 언제라도 멀어질 수 있도록, 다시 저버릴 수 있도록.
“그때까지만이라도, 내가 너를 원하게 해 줘.”
그러나 가윤은 멀어지지도 저버리지도 않았으니, 그전부터 답은 이미 나와 있었다.
나 혼자 흘러갈 동안 당신은 멈춰 있는 게 두려워 밀어내고 또 밀어냈으나, 마음은 오래전에 이미 정해졌다.
그 역시 자기 혼자 이런 모습으로 영원을 살고 그녀는 청년으로, 중년으로, 노년으로 변화하며 나아가는 게 무서워 한때 숨기도 했으나, 이제는 참기 어려웠다.
입술이 맞물렸다. 느릿하게, 달콤하게.
방금 가윤이 삼킨 찻물이 주안의 혀에도 향기를 옮겼다.
팔이 허리를 감싸 더 가까이 당겼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사르르 눈이 감겼다.
불확실한 미래를 앞두고도 현재에 담긴 이 순간은, 아름다워야 했다.
별궁에 진입하자마자 부하들이 달려들었다. 그들은 피투성이에 흙투성이인 온을 보고 저마다 울상을 지었다.
“대장군님, 괜찮으십니까?!”
“습격을 받으셨다고 들었습니다.”
“보다시피 멀쩡해. 궁인들이나 불러와라.”
“대장군님, 월빈마마는요?”
“그분도 무사하시다. 어서 궁인들을 불러오든지, 너희가 직접 가서 목욕물을 데우든지, 둘 중 하나만 해. 정말 간절하게 씻고 싶거든.”
온은 평소답지 않게 은근한 신경질을 부리며 처소에 성큼 들어섰다.
그가 군장을 풀어 바닥에 검을 내던진 뒤 땀과 피와 흙먼지에 절은 겉옷을 그 옆에 툭 떨구었다.
“대장군님, 궁인들에게 명을 전달했습니다.”
“그래, 고맙다.”
“폐하께는 이미 상황을 말씀드렸습니까?”
“당연히 아뢰었지. 가장 먼저 가서 보고했다.”
“대장군님.”
“왜.”
“대장군님을 노린 습격이었습니까, 월빈마마를 노린 습격이었습니까?”
거친 동작으로 허리띠를 풀던 온이 멈칫했다. 그가 부하를 돌아보았다.
온과 함께 황궁에 상주하며 류하의 호위를 번갈아 맡는 군졸은 분노를 참는 듯한 눈빛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
“……그건 차차 밝혀지겠지. 폐하께서 조사를 명하셨다.”
온이 마침내 대답했다. 그러자 군졸은 불경하게도 실소를 흘렸다.
“하, 조사요…….”
온은 그를 지그시 보다가, 부드럽게 타일렀다.
“밝혀질 수 있을 만큼 밝혀질 테니, 미리 성내지 마라.”
온은 부하를 내보냈다. 목욕 시중을 들 내관들이 들어왔다.
그는 목욕간에 준비된 향긋한 온수에 몸을 담갔다. 핏자국은 핏물이 되어 묽게 씻겨 나갔다.
온은 목욕통 언저리에 몸을 기댄 채 눈을 감았다. 무수한 생각과 감정과 조각난 기억들이 암흑을 배경으로 정신없이 펼쳐졌다.
하나씩 집어 찬찬히 살핀다면 파헤치지 못할 것도 없으나, 그럴 의지를 다잡는 게 어려웠다.
아까 부하의 눈에 서린 울분을 보고 온은 넉넉히 짐작했다. 그 애가, 그리고 아마 자신의 다른 부하들까지 전부 류하와 같은 결론을 내린 뒤라는 걸.
한낱 후궁을 노린 습격이 아니었다. 자객들은 호위 대상을 노리는 척하며 사실은 호위 본인을 노렸다.
그게 사실이라면, 배후는 과연 누구일까.
‘……황후.’
너무 뻔한 정답. 너무 뻔해서, 오히려 온은 망설였다.
‘무조건 첫 번째로 의심받을 사람이 이렇게 투박하게 일을 벌였다고?’
황후가 대장군을 경계한다는 사실은 정치와 조금이라도 연관이 있는 제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지겨운 이야기였다.
그도 그럴 것이, 만약 온이 빼앗긴 자리에 대한 미련을 품고 역모를 꾀한다면 륜에게 굉장히 위험한 일이었다.
온은 선황의 적자라는 명분도 있었고, 명장으로 이름을 날리며 대중적 인기도 누렸다.
반정에 성공할 확률이 엄청나게 높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결코 낮지도 않았다.
황후는 당연히 황제의 편이니 옛날부터 온을 잡아먹지 못해 안달이었다. 그러니 아마도 이번에 그가 자객들의 칼에 죽었다면 제법 기뻐했을 거다.
그러나 그런 확신과 별개로, 온은 여전히 자신의 첫 번째 가설이 미심쩍었다.
‘황후는 영민하고 냉정하지. 만약 일을 벌였다면 훨씬 조용하고 깔끔했을걸.’
대낮에 자객이라, 너무 요란하잖아. 형수님답지 않아. 온은 어느새 눈을 뜨고 천장을 보며 묵묵히 궁리했다.
‘누군가 이간질이라도 하길 원했나?’
자객들의 습격이 공론화되면 자연스레 의심의 화살은 황후를 향할 것이다. 비록 물증은 없어도, 심증은 가득할 테지.
만에 하나, 누군가 정확히 그런 상황을 노렸다면?
온은 계속 고민했다. 자신이 죽거나 다치고 황후가 의심받음으로써 중간에서 이득을 취했을 법한 모종의 세력에 대해.
온은 제 형님의 최대 약점을 알았다. 바로 나, 그리고 첫째 형수님. 자신과 황후 사이에 우열을 가리기 힘들었다.
만약 자신의 아내가 자신의 동생을 죽이려 했다고 의심받는 상황이 온다면 형님은 어떻게 나오실까. 아내를 추궁하며 그분께 실망할까? 아니면 동생인 나를 내칠까.
어느 쪽이든 황제에게 별로 즐거운 가정은 아니었다. 비록 자객들은 온을 죽이는 데 실패했지만, 일을 벌인 것만으로도 황실에 균열을 심는 데 성공했다.
자신이 전장에서 돌아와 황궁에 상주하기로 결정된 직후에 이런 일이 터지다니, 얄궂었다.
‘여러모로 내가 죽지 않아서 다행이군. 내가 잘못됐다면 꼼짝없이 황후 전하가 범인으로 몰릴 뻔했어.’
온은 몸과 머리에서 물기를 방울방울 흘리며 욕조에서 일어났다. 내관들이 다가와 그에게 보드라운 내의를 둘렀다.
‘그분이 화를 입기라도 한다면 내명부가 흔들렸겠지. 황후가 교체될 수도 있다는 뜻이니까.’
만약 온이 죽거나 다쳐 화은이 범인으로 몰리고 륜이 별수 없이 그녀를 폐위하거나 처형해야 하는 지경에 이르기라도 한다면, 황후 자리는 공석이 되는 것이다. 후궁만 이제 일곱이고.
여태 황궁의 여인들이 피비린내 나는 궁중 암투에 삶을 낭비하지 않고 저들끼리 사이좋게 지내온 건, 화은이 진즉에 확실히 서열을 정리했기 때문이었다.
내명부도 다른 모든 조직과 비슷했다. 우두머리가 질서를 제대로 휘어잡고 있다면 괜히 대들었다가 피를 보는 쪽은 어디까지나 말단이었다.
황자를 낳아 입지가 독보적으로 탄탄해진 후궁이 있다면 모를까, 황제의 마음이 온통 황후에게만 쏠린 상태에서 공연히 나대 명을 재촉하려는 이는 없었다.
그러나 만약 화은이 쫓겨난다면, 안전장치가 사라지는 것이다.
가장 높은 자리를 꿈꾸는 건 사내든 여인이든 같으니, 후궁들이 각자 삿된 마음을 품고 쟁탈전이라도 벌이면 곤란했다.
설령 후궁 본인들은 욕심이 없다 한들, 그들의 친정이 그들을 부추길 수도 있고.
그리고 그건 절대 온이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이대로만, 제발 이대로만 계속 가자.’
그는 간절히 빌었다.
예나 지금이나 그는 평화주의자, 또는 겁쟁이.
불화를 일으키는 걸 싫어했고, 되도록 모두가 평안했으면 했다. 비록 그런 소망이 동화적 망상에 불과하다고 해도.
게다가 만약 내명부에 혼란이 일기라도 하면, 류하 님이 위험해진다.
‘……내가 미쳤지, 진짜.’
목욕간에서 처소로 돌아온 온은 자책에 휩싸였다. 아랫사람을 모두 물린 터라 자유롭게 얼굴을 붉힐 수 있었다.
나락과 낙원을 동시에 담은 기억이 그를 덮쳐 그의 혼백을 너덜너덜하게 갉아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