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황궁의 감옥 같은 성벽이 어느새 코앞이었다. 온은 궁의 쪽문으로 이어지는 샛길을 활용하여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고 목적지에 도착했다.
“저는 제게 잘못이 없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바로 이때, 온은 우뚝 멈췄다.
류하는 온의 목에 팔을 감은 채 그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온은 류하를 안은 채 머뭇거렸다. 이 순간을 차마 끝내지 못하겠다는 듯.
그러나 끝내 그는 현실을 직시했고, 류하를 조심히 내려놓았다. 류하는 두 발로 땅을 디뎠다.
그녀는 여전히 그를 쳐다보았다. 이 시간의 끝이 비참한 건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궁녀를 불러 바로 모시겠습니다, 마마.”
온은 서럽게 속삭였다. 월빈으로 돌아온 류하는 시선을 떨구었다.
온은 류하를 등진 채 궁의 문지기를 불렀다. 한 번만, 딱 한 번만 더, 마지막 입맞춤을 갈망하는 마음을 누르며.
곧 궐문이 열렸다. 문지기는 후궁과 대장군의 너덜너덜한 모습을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으나, 궁에서 오래 일해 입이 무거운 사람답게 그저 공손히 인사만 했다.
“궁녀를 불러 월빈마마를 처소로 모셔라. 그리고 황제 폐하께 내가 복귀했다고, 알현을 청한다고 말씀드려.”
“명 받들겠습니다, 대장군님.”
문지기에게 지시하는 내내 온은 류하를 돌아보지 않았다. 류하도 묵묵히 바닥만 내려다봤다. 어차피 모든 것이 끝났다.
하루빨리 이 마음도 같이 끝나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었다.
제10장. 혈연, 악연, 인연
<저는 제게 잘못이 없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게 잘못이 없지는 않지. 나의 애매한 다정함이 너무 많은 사람을 죽였으니까.
나는, 반정을 막지 못했으니까. 그래 놓고 나 혼자 살았어.
<그대는 참 효자네요. 다정한 오라비고요.>
그가 사랑하는 여인은 오늘 그를 보며 말했다.
글쎄, 효자라. 다정한 오라비라. 내가 진정 효자였다면, 어머니의 말을 더 새겨듣지 않았을까. 새겨듣지 않을 거라면, 적어도 그분의 만행을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태자, 이 어미의 말을 똑똑히 들으세요. 1황자를 가까이하시면 안 됩니다.>
그 말을 새겨들어 애초에 분란의 싹을 잘라 버리든가. 아니면 차라리 어머니를 설득하여 형과 형의 모친을 제대로 보호했어야 했는데.
<1황자는 태자의 앞날에 걸림돌이 될 자입니다. 그래서 내가 그 애를 미리 치우려고 하는 겁니다. 그대는 손을 더럽힐 필요 없습니다. 그대는 그저 성군의 길을 가세요.>
어린 아들을 붙잡고 당부할 만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황실의 정신 나간 생리가 원래 그랬다.
착하고 올바른 황태자는 모친의 말을 듣고 깊이 상처받았다.
<어마마마, 어떻게 제게 성군의 길을 가라는 말과 피가 섞인 형제를 배척하라는 말을 동시에 하십니까? 경쟁자가 있다고 무력이나 술수로 도려내는 건 군자의 길이 아닙니다. 소인배나 하는 짓이죠.>
병아리 같은 꼬마가 눈을 부릅뜨고 항의하자 당시의 황후는 탄식을 삼켰다.
세상에, 애가 너무 잘 커서 문제구나. 군자라니, 소인배라니. 영민하고 올곧으며 아직 어려서 순진하기 그지없는 소년이라 할 수 있는 말이었다.
<태자, 태자도 배웠겠지요. 삿된 정에 휘둘려 대의를 챙기지 않는 것도 소인배의 행동입니다. 부디 기억하세요.>
어린 온은 그게 비겁한 변명이라고 생각했다.
대를 위한 소의 희생이라는 건가? 그렇다면 나는 성군이 되기 위해 우애를 포기하고 친형을 버려야 해? 하지만 어떻게 그런 자가 만백성의 모범이 될 수 있지?
세상의 추악한 면을 잘 모르는 어린아이는 다만 혼란스러웠다.
<태자. 1황자는 계속 살아서는 안 됩니다.>
황후는 절박하게 쐐기를 박았다. 그러나 온은 거부했다. 인자하신 어마마마가 그렇게 말씀하시는 게 속상할 따름이었다.
만약 내가 그때 어머니의 충고를 명심했다면. 형님을 멀리했다면. 짓밟았다면. 죽여 버렸다면.
반정이 일어나고 정복 전쟁이 시작돼 그 수많은 사람이 죽지는 않았겠지.
가윤 낭자의 가족이, 그렇게 죽지는 않았겠지.
“어디 다친 데는 없는 거죠?”
“네, 폐하. 저도 월빈마마도 무사합니다.”
“하아, 이게 진짜 대체 무슨 일인지…….”
처소에 들러 의복을 정돈하기도 전에 형부터 찾은 동생은 현재 알현실에서 황제와 독대했다.
륜은 두통을 느끼며 이마를 꾹 눌렀다. 수도 한복판에 자객이라니, 그것도 황족을 노렸다니.
“아우님이 말한 곳으로 사람을 보내 시체를 회수하고 조사하라고 하겠습니다.”
“네, 폐하.”
“그리고 도깨비가 나타났다고요?”
“그렇습니다.”
“그건 정말 다른 의미로 미칠 노릇이네요.”
온은 가윤의 존재에 대해서는 함구했다. 전설 속 존재로나 치부되는 도깨비를 목격했다는 사실은 털어놓으면서도, 가윤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었다.
“충격이 클 텐데, 그래도 무사히 돌아와서 다행입니다. 이제 가서 쉬세요, 아우님.”
륜은 부드럽게 권했고, 온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시선은 숱한 언어를 담아냈고, 그 언어는 끝내 침묵으로 끝났다.
“황송합니다, 폐하.”
결국, 한 가지 인사말만 흘러나왔다. 온은 고개 숙여 예를 갖춘 뒤 일어서서 퇴장했다.
“그런데, 아우님.”
정확히 말하자면, 퇴장하려 했다. 그러나 그 전에 황제의 음성이 그를 붙잡았고, 온은 다시 돌아서야 했다.
“월빈과 비를 피하며 단둘이 무슨 일로 시간을 보냈습니까?”
륜이 온을 바라보듯, 온은 륜을 바라보았다. 륜의 얼굴에 웃음기는 없었다. 그렇다고 성난 기색이 있지도 않았다.
륜은 그저 몹시 단조롭게, 마치 수학 문제의 답을 궁금해하듯 질문했다.
“비가 꽤 오래 내렸던 것 같은데.”
륜이 덧붙였다. 온은 무표정했다.
소매치기한테 돈과 노리개를 빼앗길 뻔했다는 일화와, 소나기 때문에 잠시 폐가에 들어갔다는 사실은 이미 아뢴 뒤였다. 그 외에는 고할 게 없었다.
“마마께서 제국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이것저것 질문하셔서 대답해 드렸습니다.”
고할 게 없어야만 했다. 고하기 전에 차라리 죽는 게 나았다.
“그렇군요.”
륜은 담백하게 수긍했다. 그제야 그는 빙긋 웃었다.
“이제 정말 물러가도 좋아요, 아우님.”
온은 꾸벅한 뒤 물러났다. 손끝도 떨리지 않았고, 눈빛도 무너지지 않았다. 호흡 곤란이 오지도 않았으며, 안색이 하얘지지도 않았다. 그는 자기 자신이 너무 대견했다.
아직도 제 품에서 제 숨결을 빨며 제 이름을 거듭 부르던 이를 떠올리면 몸속이 저릿하고 명치끝이 아픈데, 그 모든 걸 효과적으로 숨긴 자기 자신이 기특했다.
서럽고 그립고 두려워서 부서질 것 같은데, 아직도 온전히 걷고 말하고 호흡할 수 있어서 자랑스러웠다.
그런 생각으로라도 버텨야 했다.
문이 열렸다. 침대 안에 웅크려 있던 가윤이 고개를 들었다. 주안은 쟁반에 잔을 받친 채 조심스레 들어왔다.
“따뜻한 차야. 마셔.”
그는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으며 부드럽게 권했다. 가윤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주안은 염려하는 마음으로 눈살을 찌푸렸다.
“좀 마셔. 너 지금 떨고 있잖아.”
비를 맞았고, 또다시 시체를 봤고, 한때 정혼자가 될 뻔했던 옛 황태자를 만났다. 심적으로든 뭐든, 가윤은 뼛속까지 지친 상태였다.
가윤은 주안의 간절한 눈빛 앞에서 패배를 시인했다. 그녀는 고분고분 도깨비가 내민 찻잔을 받았다. 잔을 입술로 물고 고개를 기울이자 달고 따스한 액체가 입 안에 흘러들었다.
“기분이 어때?”
주안이 물었다. 가윤은 답하기 전에 고민했다.
“괜찮습니다.”
정확히 어떤 부분에 대해 내 기분을 궁금해하는 걸까. 내 눈앞에서 사람의 머리가 반쯤 으깨진 것에 대해? 이제 와서 내가 비위라도 상했을까 봐 새삼 걱정하는 건지.
아니면, 다른 것에 대한 질문일까. 가윤은 알아내기 두려웠다.
“……나, 오늘 판단을 잘못했어.”
가윤을 빤히 보던 주안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자백했다. 가윤이 주안을 돌아보았다. 도깨비는 여느 때보다도 굳은 낯으로 인간을 직시했다.
“오늘 그 자객을 죽이지 말았어야 했어.”
가윤은 찻잔을 무의식중에 꽉 움켜쥐었다. 만약 그녀에게도 초인적인 힘이 있었다면, 도자기는 진즉에 산산이 깨졌을 것이다.
“눈앞에 동족이 있어서 판단력이 흐려졌어. 원래는 대장군을 죽였어야 했는데 말이야. 안 그래?”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으면 그냥 하세요.”
주안이 가윤을 쳐다보며 집요하게 속삭이자 가윤이 불퉁하게 내뱉었다. 주안은 주먹을 한 번 꽉 쥐더니, 애써 힘을 풀며 매정하게 물었다.
“정말 적으로 둘 수 있겠어?”
다른 황족과 손잡고 반정을 일으키기로 한 이상, 좋든 싫든 륜에게 충성하는 온은 이제 그들의 적이었다.
“아까는 그리도 애틋하게 쳐다보더니만.”
주안은 가윤이 미련에 휩쓸려 그토록 애타게 원하는 복수를 그르칠까 두려웠다.
또한, 그것보다 훨씬 유치한 감정 때문에 명치끝이 아렸다.
“적으로 둘 수 있습니다. 이미 적인걸요. 아까는 그냥 너무 당황해서, 저도 모르게 옛날 호칭이 튀어나온 겁니다.”
가윤은 딱딱거렸다. 그렇게 당당하게 고집하면서도 차마 주안과 눈을 맞출 수 없었다.
애초에 이렇게 감정적으로 까칠해진다는 것 자체가 가윤답지 않은 일이었다.
그녀는 늘 무신경했다. 가족을 잃고 혼자 살아남은 뒤로, 감정의 기복조차 사치라는 걸 깨달았다.
잊은 줄 알았는데, 아니, 애초에 잊을 것도 없는 관계였는데.
그래도 막상 그렇게 갑자기, 또한 가까이서 마주하자 무심코 지긋지긋한 존칭이 튀어나왔다. 태자 전하, 라고.
물론 지금 온은 태자가 아니었지만, 가윤이 그를 알던 시절에 그는 늘 황태자였기에 오직 그 호칭만 그녀의 기억 속에 남았다.
그녀는 그 어떤 다른 이름으로도 그를 불러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당신은 늘 나를 가윤 낭자라 불렀다.
“그나저나, 정말 괜찮겠습니까? 기억을 지우지 않아도. 도깨비인 당신이 성안에 버젓이 돌아다닌다는 걸 그자에게 들켰는데요.”
가윤은 부러 퉁명하게 화제를 돌렸다. 주안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서? 좀 아쉽긴 한데, 어쩔 수 없잖아. 별로 심각한 일도 아니야. 내가 자객들과 한패인 것처럼 보였다면 모를까, 대장군이랑 후궁을 살리고 사라졌으니 굳이 위험 요소라고 생각해서 추격하지는 않을 거야.”
주안은 충분히 합리적으로 가윤을 달랬다. 그녀는 여전히 불안한 표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