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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궁의 은밀한 연서 (57)화 (57/123)

57화

자객의 머리는 과일처럼 으깨졌다. 시체가 털썩, 하고 쓰러졌다.

류하는 입을 틀어막았고, 온은 검 손잡이를 움켜쥔 채 쳐다보았다.

“아슬아슬했네.”

주안은 숨 가쁘게 불평했다. 그가 어느새 빼 든 단검 손잡이에는 방금 즉사한 복면인의 피와 뇌수가 묻어 있었다.

괴한이 다른 남자를 덮치는 장면을 본 순간, 주안은 직관적으로 적군과 아군을 분류했다.

눈이 파랗게 빛나는 저 여인, 동족이잖아. 그리고 동족이 저 사내를 걱정하며 대장군, 이라고 불렀다. 그러니 저 사내를 구하는 게 마땅했다. 주안은 반대편 사내를 죽였다.

그런데, 잠깐만. 대장군이라고?

“가윤 낭자?”

온은 아득하게 속삭였다. 귀신을 본 듯, 문자 그대로 귀신을 본 듯 창백하게.

긴박한 상황 속에 가윤의 얼굴을 숨기던 도깨비의 주술이 풀려 그녀의 모습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그리고 온은, 단숨에 알아보았다. 알아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태자 전하…….”

가윤은 신음했다. 단검을 그러쥔 손끝이 살짝 떨렸다. 그녀는 무언가 덧붙이려는 듯 입을 열었다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뜻밖의 상봉 장면에 당황한 건 나머지 둘이었다.

온이 가윤을 부르기 전까지 류하와 주안은 서로만 보고 있었다. 한쪽은 도깨비, 한쪽은 도깨비 혼혈. 둘 다 서로를 본능처럼 알아보았다.

어차피 본능 같은 거 없이도 각자 눈이 새파랗게 빛나는 중이라, 서로의 정체를 가늠하는 건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온이 가윤을 알아보고 가윤이 애처롭게 화답하자, 류하와 주안의 시선이 그쪽으로 쏠렸다.

주안은 가윤이 알아본 온을 쳐다봤고, 류하는 온이 부른 가윤을 직시했다.

둘 다, 사실은 넷 모두, 머릿속과 마음속이 뒤죽박죽이었다.

“이걸 어쩌나.”

주안이 눈매를 좁혔다. 죽은 걸로 알려진 가윤의 얼굴을 알아본 인간이 나타났다. 한때 태자라 불리던 대장군 온. 주안은 그를 향해 성큼 다가갔다.

“안 돼!”

류하가 앙칼지게 외쳤다. 온도 주안도 흠칫 놀랐다.

류하는 시퍼런 빛이 펄펄 흐르는 눈으로 온 앞에 뛰어들어 주안을 가로막았다. 양팔을 벌리며 주안을 쏘아보는 기세가 사나웠다.

“해치려던 건 아닌데.”

뜻밖의 거센 저항에 부닥친 주안은 떨떨하게 뇌까렸다. 실제로 해칠 마음은 없었다. 그냥 잠깐 기억만 지우려던 거지.

“그럼 나중에 또 봐, 동족님.”

끝에 주안은 싱긋 웃어 주었다. 류하는 여전히 그를 노려보며 입만 꾹 앙다물었다.

주안은 순식간에 뒤돌아 가윤에게 다가가더니 그녀를 양팔로 안아 품에 담았다. 그가 땅을 가볍게 박차자, 푸른빛이 번쩍였다. 직후, 가윤도 주안도 사라졌다.

류하와 온은 다시 골목에 단둘이 남았다. 단둘에, 시체 두어 구를 포함해서.

도깨비가 사라지자 류하는 힘이 풀렸다. 그녀가 풀썩 주저앉았다.

“마마, 괜찮으십니까?”

온이 황급히 다가왔다. 그는 무릎을 꿇어 몸을 낮추고 류하의 안색을 절실히 살폈다.

류하는 가늘게 떨며 온을 돌아보았다. 먹색으로 돌아온 그녀의 눈에 물기가 그렁그렁 맺혔다.

“대장군…….”

큰일 날 뻔했어. 정말 큰일 나는 줄 알았잖아. 그대가 내 앞에서 죽을까 봐 두려웠어. 류하는 울먹이며 온을 와락 안았다.

“마마, 괜찮습니다. 이제 다 끝났습니다. 자객은 다 죽었어요. 당장 궁으로 모시겠습니다.”

“흑, 나는……. 나는 그대가 다치는 줄 알고…….”

“저는 정말 괜찮습니다. 그리고 마마, 아무리 걱정하셨어도 그렇지, 그렇게 주술을 쓰시면 어떡합니까? 또 피 토하면서 쓰러질 작정이셨어요, 네?”

“하, 참나, 살려 줬더니 잔소리나 하고……. 훌쩍!”

“그냥 잔소리 정도로 치부하시면 섭섭합니다, 마마. 당신이 크게 다치셨을 수도 있다고요. 제 일은 호위로서 당신을 지키는 거지, 당신이 저를 구하느라 다치게 두는 게 아닙니다.”

온은 단호하게 선을 그으며 양팔로 류하를 감쌌다. 그의 손이 다리와 어깨에 닿자 류하는 흠칫했다.

온은 아까 주안이 가윤을 안아 들었듯 류하를 조심히 안아 들었다. 류하의 발이 허공에서 대롱거렸다. 온은 류하를 품은 채 뛰다시피 걸었다.

“어쨌든, 당신은 무사하신 거 맞죠?”

“네, 나는 멀쩡해요. 조금 놀라긴 했지만.”

“‘조금’만 놀란 거라면 그게 더 이상한데요.”

“……대장군.”

“네, 마마.”

“아까 그거, 그 사람, 도깨비…….”

“……네, 아마 도깨비인 것 같습니다.”

파란 눈. 뾰족한 귀. 인간과 사뭇 다른 힘. 대전쟁 이후의 세대는 고작 괴담이나 전설을 통해서만 접해 본 도깨비의 실체. 류하는 마른침을 삼켰다.

“제가 쓰는 힘이랑 느낌이 같았어요.”

류하는 힘없이 실토했다. 온은 걸으면서 잠잠했다.

“대장군.”

“네.”

“그 여인은요? 도깨비랑 같이 있던 인간 여자는 누구예요?”

류하의 저음이 초조함으로 이지러졌다.

가윤 낭자. 분명 그렇게 불렀다. 가윤 낭자. 귀신이라도 본 듯이 창백해지며, 마치 잘 아는 사람처럼 그녀를 불렀다.

가윤 낭자. 성도 빼고, 친근하게 이름으로만.

온은 내리 잠잠했다. 그는 계속해서 골목을 따라서만 걸었다.

이렇게 한적한 곳에 있다 보면 또다시 자객이라도 튀어나올까 불안했지만, 피와 흙먼지가 가득 묻은 차림새로 큰길에 나타나는 것 역시 별로 좋은 생각은 아니었다.

이 와중에도 그는 황실의 체면과 대중의 시선을 의식해야 했다. 제국의 중심부에서 황족들을 상대로 자객들이 판치다니, 그런 자극적인 이야깃거리가 공론화돼 봤자 민심만 술렁일 것이다.

일단은 최대한 조용히, 무사히 황궁에 도착해야 했다. 그곳에 월빈마마를 안전히 돌려보내고 난 뒤에 사건을 파헤쳐도 늦지 않을 터.

아니, 사실 늦더라도 상관없었다. 지금 온의 최우선순위는 어디까지나 류하의 안위였다.

“……죽었어야 할 역적입니다.”

그런데 그분이, 내가 최우선으로 지키고자 하는 그분이, 내게 참 난감한 질문을 하신다. 온은 오로지 앞만 보며 대답했다.

“5년 전의 그자의 가족은 전부 죽었습니다. 그리고 그자도 죽었다고 보고받았습니다. 어떻게 아직도 살아 있는지 저는 모르겠습니다.”

무조건 숨기는 것도 능사가 아닌지라, 온은 간략하게 털어놓았다. 5년 전이라. 익숙한 시일을 듣고 류하는 해쓱해졌다.

영리한 공주는 충분히 알아들었다. 5년 전에 어떤 일가가 몰살당했고 그 일가의 일원이 태자와 서로 면식이 있을 정도로 고귀한 신분이라면, 십중팔구 반정에 반대했던 귀족이겠지.

그때 가족은 전부 죽고 저 여인만 살아남은 건가. 그런데 굳이 5년 뒤에 수도로 돌아왔다고? 위험한데? 누군가 자신을 알아볼지도 모르는데? 멀리멀리 도망가 죽은 듯이 살 것이지.

아아, 설마.

류하는 끔찍한 불안에 사로잡혔다. 복합적인 불안감이었다.

황제에 대한 원한이 가득할 귀족 여인이 하필 수도에 알짱대는 것도 불안했고, 그 여인이 도깨비와 함께 있는 것도 불안했고, 그 여인과 온이 서로를 알아본 것도 불안했다.

<가윤 낭자?>

<태자 전하…….>

왜, 대체 왜. 과거에 대체 어떤 사이였는데 그런 애틋한 탄식을 나눴냐고.

“마마, 월빈마마. 괜찮으십니까?”

온은 초조하게 불렀다. 품에 담긴 공주가 너무 조용하니 불안감이 치솟았다.

“마마, 마음 놓으십시오. 이제 마마는 안전하십니다. 그리고 누가 감히 마마의 목숨을 노리고 자객을 보냈는지 밝혀내겠습니다.”

당신을 위협하는 자들을 가만두지 않겠다고 온은 굳게 약속했다. 그러자 류하는 퍼뜩 고개를 들더니, 당황하여 되물었다.

“대장군, 설마 아까 그자들이 나를 노리며 왔다고 생각하는 건가요?”

뜻밖의 반문에 온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다 그는 알아들었고, 눈을 크게 떴다.

“설마, 자객이 저를 노리고 나타났다는 말씀입니까?”

호위의 본분에 철저하게 몰입한 그는 어디까지나 누군가를 지키는 쪽이었고, 임전 중에 모든 사고는 호위 대상을 중심으로 돌아갔다.

자객들이 류하를 노리고 왔다는 건 그가 본능적으로 세운 대전제였다. 호위 대상을 위협하는 존재가 있으니, 막는다. 너무 당연하고 단순한 공식이라, 미처 의심해 본 적 없었다.

“내 생각에는 그래요. 생각해 보세요. 누가 고작 나 하나 없애겠다고 자객까지 고용하겠어요? 황손도 낳지 않은 서열 최하위의 후궁쯤이야 훨씬 덜 번거로운 방법으로 제거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대는 상황이 다르잖아요.”

류하가 생각하기에, 아까 자객들의 공격은 딱히 자신을 노리지 않았다.

그들이 류하의 근처에 닿기도 전에 온이 그들을 전부 베었으니, 얼핏 보면 류하를 노린 공격을 온이 미리 막아 낸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만약에, 그게 아니라면? 애초에 자객들의 우선순위가 온이었다면?

“어차피 증거 인멸을 위해 나중에는 나까지 죽였을 확률이 높지만, 아마 그대를 제거하는 게 그들에겐 훨씬 중요했을 겁니다. 제국의 그 누구도 나를 그렇게 공들여 죽여 봤자 얻을 이득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대는…….”

황족. 황제(皇弟). 선황의 유일한 적자. 현 황제가 아들이 없는 지금, 제위 계승 서열 1순위.

누군가 그의 죽음을 바랄 이유는 무궁무진했다.

가장 단순하게 생각하자면 그가 차기 황제가 되는 걸 간절히 막고 싶은 세력이 있을 테고, 또 누군가는 류하가 모르는 다른 모종의 정치적 이유로 그와 척진 걸 수도 있다.

역시 그녀가 모르는 사적이 원한이 있을 수도 있고.

반면에 류하는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누군가 제 죽음을 바랄 만한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누군가 내 죽음을 이용해서 월국과 휘국 사이에 전쟁이라도 일으키려고 하나? 글쎄, 그냥 그렇다고 치자.

그런데 왜 자객을 보내지? 실력 좋은 호위가 내 옆에 붙어 있다는 걸 뻔히 알면서.

그것도 그냥 실력이 좋은 정도가 아니라, 제국 최고의 명장이라 소문난 이였다.

차라리 독이라도 먹이면 모를까, 자객을 보내는 건 현실성이 없었다.

“그대는, 황실에 적이 많잖아요.”

그러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온을 노린 거야. 그래서 무서워. 끔찍하게 싫어. 너무 화나.

“그게 그대의 잘못은 절대 아니지만.”

얼굴도 이름도 아직 모르는 그 누군가를 찾아가 멱살을 쥐고 흔들고 싶었다.

감히? 네가 감히? 너 따위가 왜 이 사람을 위협하는데. 선하고 강하고 예쁘고, 내게는 무척 소중해진 이 사람을.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온은 다시 앞을 보며 물었다. 그는 어느새 무표정했다. 다시 목석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저는 마마와 생각이 다릅니다.”

그가 나직하게 고백했다. 그게 무슨 뜻이냐고 류하는 묻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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