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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궁의 은밀한 연서 (56)화 (56/123)

56화

“지금 비 내리잖아요.”

가윤은 당연한 사실을 지적했다. 그래서 우리가 지금 여기서 이러고 있잖아, 안 그래?

“근처에 우의 파는 가게가 하나쯤은 있지 않을까? 내가 찾아볼게. 우의 사서 입고 나가면 되지.”

“왜 그렇게까지…….”

가윤은 눈살을 찌푸리며 항의하려다, 주안의 반짝이는 눈을 보고 불평을 포기했다.

그래, 그냥 될 대로 돼라. 내가 어찌 당신을 상대로 불평하랴.

당신은 나의 은인이고, 당신의 원한을 내 원한에 맞춰 내 복수를 돕겠다는 고마운 분인데.

“알겠어요, 그럼. 우의는 제가 사서 오겠습니다.”

그리고 설령 당신이 나를 죽음과 치욕에서 구하지 않았더라도, 나는, 당신을.

“너는 여기 있어. 힘들고 귀찮은 일은 내가 할게.”

주안은 쌩긋 웃으며 외투의 두건을 뒤집어썼다. 가윤이 대꾸하기 전, 그가 선수를 쳤다.

그녀를 지나쳐 날렵하게 서점 밖으로 뛰쳐나가는 그를 보고 가윤은 어이없어 혀를 찼다.

“이미 힘들고 귀찮은 일은 나도 다 하고 있잖아요.”

뒤늦게 구시렁대 봤자 아무도 듣지 않았다. 가윤은 입술을 깨물며 창밖을 쏘아보았다.

누구야, 하필 저 빗속에서 도깨비불을 피워서 내 은인님의 과도한 궁금증을 유발한 사람이?

“……바보 같아.”

근처에 동족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이유로 눈을 빛내며 장대비마저 무릅쓰는 나의 은인. 그리고 그런 그에게 휘둘리는 나. 그런 그를, 감히 마음에 담은 나.

“진짜 바보…….”

어느 쪽이 더 미련할 걸까. 시작한 것만으로도 이미 늦어 버린 마음을 억지로 감추는 내가 최악이겠지. 내가 허락하는 순간, 곧장 시작될 관계임을 알면서.

나보다 훨씬 용감하고 다정한 저분은 이미 나와 본인의 마음까지 자각하고 내가 인정하길 기다리며 아주 오래전부터 내 곁을 기웃댄 것을 안다.

하지만 나는 당신을 받아들이지 못해.

“가윤아, 우의 사 왔어.”

주안이 다시 나타났다. 본인은 방수 재질의 긴 외투를 이미 하나 걸치고, 나머지 한 벌은 자신의 팔에 건 채.

“가격은 얼마였습니까?”

“됐어. 선물이야.”

가윤이 돈을 갚고 싶어서 정직하게 묻자 주안은 빙긋 웃으며 그녀에게 우의를 건넸다.

그 미소에 서글픔과 단호함이 동시에 깃든 것을 알고 가윤은 더는 묻지 않았다.

“그런데 이렇게 대놓고 도깨비불을 피우는 동족이 있습니까? 그거 위험한 거 아니에요?”

대신 그녀는 다른 것을 질문했다. 주안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글쎄, 별로 큰 규모는 아닌 것 같아. 그냥 주먹만 한 거 몇 개 정도?”

“그런데 그게 느껴져요? 불을 피운 도깨비가 가까이 있나요?”

서점을 나와 빗속을 찰박찰박 걸으며 가윤이 되물었다. 주안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렇게 가까운 건 아니야. 그리고 도깨비도 아니고.”

“네?”

“반쪽 같은데.”

빗줄기가 그새 점점 얇아지고 있었다. 가윤의 말이 정확했다.

갑자기 내리다가, 갑자기 그쳐. 언제 그랬냐는 듯 맑아질 거야. 구름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신통력의 흐름이, 뭔가……. 이물질이 섞였어. 인간인가? 어쨌든 혼혈 같아.”

동종의 힘을 알아보는 본능에 이끌려 걸음을 옮기며 주안은 진지하게 분석했다. 어느새 그들은 사뭇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마저 풍기는 한적한 골목에 진입했다.

“흠, 이번에 만날 동족님은 주거 취향이 조금 독특하네.”

적막한 폐가들을 둘러보며 주안이 고개를 갸웃했다. 가윤은 묵묵히 동의했다. 이 길은 뭐, 심심한 게 문제가 아닐 것 같은데.

“어라? 그리고 불이 또 꺼졌어.”

주안은 금세 울상을 지었다. 보다 못한 가윤이 그의 소매를 살짝 당겼다.

“비가 그칠 때까지 잠시 안에 피해 있는 게 낫겠습니다. 어차피 불이 꺼졌으면 지금 찾을 수도 없는 거잖아요.”

주안은 가윤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주변에 널린 게 빈집이었기에 비를 피할 곳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미안해, 가윤. 나 때문에 고생이 많네.”

“괜찮습니다.”

주안이 멋쩍게 말하자 가윤은 담담히 대답했다. 자신이 고생한다고 생각하기는 했다. 동시에, 하나도 고생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도깨비를 찾아 빗속을 헤매는 건 확실히 고생이긴 했다.

하지만, 당신이 원해서 한 일이니까. 내 은인이자 최대 채권자인 당신을 위해서 한 일이니까. 이 정도는 고생도 아니야. 나는 불평하지 않아.

“또, 매번 괜찮다고만 하네.”

주안은 쓸쓸히 속삭였다. 가윤은 그를 잠시 보다가, 눈이 마주친 걸 후회하며 시선을 내렸다.

“실제로 괜찮으니까요.”

괜찮아야 하니까. 다른 선택지는 없어. 그녀는 속으로만 읊조렸다.

침묵에 다시 빗소리만 섞였다. 근처에서 누군가 도깨비불을 피웠다더니, 그자는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기에 이렇게 잠잠할까. 그자의 고요가 지금 우리의 것처럼 기쁠까.

“가윤아.”

주안이 불렀다. 가윤은 예의상 다시 돌아보았다. 그러나 눈을 마주치는 건 여전히 괴로웠다.

“너는, 복수가 끝나고 나면 어디로 갈 거야?”

지금은 도술로 모습을 위장할 필요가 없어서 주안의 눈은 샛별처럼 예쁜 파란색이었다. 가윤은 그 빛깔을 하염없이 보다가, 냉하게 대답했다.

“생각해 본 적 없습니다. 반정이 성공할지도 확실하지 않고, 그 이후를 별로 생각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왜 이렇게 부정적이야. 여러 사람이 목숨 걸고 계획한 반정인데 당연히 성공할 거라고 빈말쯤은 해 줘야지.”

“부정적인 게 아니라 현실적인 겁니다.”

“글쎄.”

주안은 부드럽게 읊조렸다. 그는 가윤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녀는 그 선명한 청색에 잠겨 익사하는 느낌이었다.

아아, 제발. 그렇게 보지 마요. 웃음기 하나 없이, 그러면서도 더없이 진중하며 열렬하게, 또한 다정하게. 흔들리지 말아야겠다는 의지까지 흔들리니까.

“가윤아. 일이 다 끝나고 나면, 나랑 살자.”

주안이 간청했다. 나직하게, 그러나 분명하게. 도망치려 해 봤자 도망칠 수 없도록.

“서로 복수를 이루기 위해 함께 다닌다는 핑계가 없어진 뒤에도.”

그는 진지했다. 그래서 그녀도 진지하게 답해야 했다. 발밑이 무너진 듯한 아득한 느낌을 다잡으며.

“저한테는 핑계가 아닙니다.”

아니. 핑계 맞잖아. 그녀의 무의식과 주안의 눈빛이 동시에 그녀를 비난했다. 그녀는 고통을 외면하며 힘겹게 말을 이었다.

“주안 님. 저를 각별하게 여겨 주셔서 늘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정말 황송하고, 기쁩니다. 하지만 저는 도깨비가 아닙니다.”

“나도 그건 알아.”

주안은 살짝 짜증을 냈다. 너는 인간, 나는 도깨비. 그 뻔한 사실이 마음에 걸려 그냥 무시하기에는 자신의 마음이 너무 깊었다.

“감사해? 황송해? 기뻐? 너 황송하라고 이런 말 하는 거 아니야. 그리고 너, 지금 하나도 안 기뻐 보여.”

“기쁜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저는 늙을 거예요. 늙어 죽을 거라고요. 그리고 당신은 늙지 않죠. 아시잖아요.”

근원이 깨지지 않는 한 영생하는 도깨비와 수명이 정해진 인간.

불완전한 무한과 확실한 유한.

가윤은 흘러가는 시간이 두렵지 않았다. 그 끝에 가족과 재회할 생각에 오히려 즐거웠다.

그러나 그 흐르는 시간 속에 당신 혼자 가만히 멈춰 있다면, 언젠가는 당신을 지나쳐야 하는 나는 너무나 비참해질 것 같아.

“저는 저와 비슷한 때에 비슷한 방식의 죽음을 준비할 수 있는 사람을 원합니다. 당신한테서는 받아 낼 수 없는 약속이죠. 그러니 차라리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는 게 낫습니다.”

주안의 눈빛이 구겨졌다. 그는 자신이 빌어야 할지 화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저런 말을 듣고도 네게 간절히 매달리는 게 과연 너를 더 단단하게 얼릴까, 아니면 너를 더 흔들어 놓을까.

주안이 고민하고 가윤이 낙담하는 그때, 비가 그쳤다. 그리고 얼마 뒤, 비명이 들렸다.

서로 밀어내고 매달리느라 그새 비가 그친 것을 알아채지도 못했다.

그러다 인간과 도깨비는 괴성을 들었고, 그제야 하늘이 도로 맑아졌음을 인식했다.

“방금 그거, 사람 비명 아니었나요?”

가윤은 주안 때문에 괴로워하던 것도 잊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주안은 안색을 굳히며 귀 기울였다. 조만간 또, 누군가 절규했다.

“사람 비명 맞는 것 같은데. 성인 남자.”

주안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어떡하지? 가서 확인해 봐? 내가 왜? 가서 누군가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면 도와주려고? 그러니까, 내가 왜.

‘내가 무슨 정의의 사도도 아니고.’

정의의 사도는커녕, 제 한 몸 건사하기 바쁜 평범한 도깨비에 불과했다.

무엇보다, 주안의 곁에는 가윤이 있었다. 괜히 휘말렸다가 얘까지 위험해지면?

“가서 무슨 일인지 알아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정작 가윤 본인은 주안의 우선순위는 안중에도 없이 다급하게 청했다.

“누군가 도움이 필요할 상황일 수도 있습니다.”

하여간 얘, 정말 애매하게 양심적이다.

복수를 위해 황족들의 죽음을 바라고, 시체 떼를 되살려 산 사람을 공격하는 일에 동참하면서, 때로는 이렇게 무르고도 올곧은 모습을 보였다.

“알겠어, 가서 보기나 하자.”

주안은 작게 탄식했다. 언제나처럼 그는 가윤에게 져 주는 길을 택했다. 게다가 문득, 다른 것도 떠올랐다. 어쩌면 저 비명을 지르는 자가 아까 불을 피운 동족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물론 아닐 수도 있지만, 만약 정말 동족이라면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가윤은 우의의 두건을 내린 채 밖으로 뛰쳐나갔다. 와, 정말 날씨가 갑자기 다시 좋아졌구나. 참 신기하지. 이토록 동화처럼 예쁜 풍경 속에, 계속해서 사람의 비명이 울리다니.

“이쪽입니다. 소리가 이쪽에서 들리는 것 같아요.”

가윤은 다급히 가리키며 품에서 단검을 꺼냈다. 그녀가 먼저 뛰기 시작하자 주안은 맨손으로 뒤따랐다. 그는 파랗게 빛나는 눈으로 주변을 경계했다.

“윽!”

“하, 이게 무슨…….”

느닷없이 발밑이 울렸다. 결코 자연적인 지진은 아니었다.

주안은 신통력의 방출을 알아보고 헛웃음을 뱉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잽싸게 팔을 뻗어 휘청대는 가윤을 품으로 받았다.

“확실히 혼혈이네.”

가윤의 팔을 잡고 일으켜 세워 주며 주안은 심각하게 중얼댔다. 가윤은 그의 혼잣말에 반응할 틈도 없이 다시 뛰었다.

“마마, 힘을 쓰지 마십시오!”

그때, 가윤은 들었다. 제게 익숙한 목소리. 익숙하지 않았으면 하는 목소리. 주안에게만 낯선 목소리였고, 그 목소리의 주인을 향해 다른 누군가 또 소리쳤다.

“대장군!”

가윤의 입 안에도 비슷한 비명이 담겼다. 비록 쓰이는 호칭은 달랐지만.

온이 류하의 절규를 듣고 뒤도는 바로 그때 자객이 무기를 높이 들었고, 곧 피가 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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