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후궁의 은밀한 연서 (55)화 (55/123)

55화

류하는 온의 목을 붙안고 절박하게 당겼다. 온은 류하의 허리를 양팔로 감쌌다. 아까처럼 열렬하게 서로를 파헤치지는 않았다.

다정하게, 달콤하게, 깊고도 느리게, 두 사람은 작별을 나눴다.

“연모합니다.”

류하가 불쑥 고백했다. 이번에는 돌려 말하지 않았다. 그대의 아내 될 자가 부럽다느니, 그런 우회적인 표현은 필요 없었다. 그렇게 에둘러 표현하는 시간조차 아까웠다.

“연모해요, 휘온 대장군.”

기회가 있을 때 말해야지. 어차피 이번이 마지막이야. 미련이 남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으나, 불행하지는 않아. 적어도 오늘 우리는 사랑을 확인했거든.

“저도 당신을 연모합니다. 월류하 공주마마.”

온은 진지하게 속삭였다. 일부러 월빈이라는 호칭은 생략했다.

지금만큼은 당신이 형의 아내가 아니기를 바란다.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당신이 후궁이 아닌 공주이던 때로, 그때로 돌아가고 싶어.

이번에는 류하가 먼저 입을 맞췄다. 아랫입술을 살짝 물며 안으로 미끄러지듯 들어오는 체온을 온은 갈급하게 받아먹었다. 류하를 안은 팔에 힘이 들어갔다. 둘 다 눈을 감았다.

당분간 숨소리만, 그리고 빗소리만.

이윽고 언제 그리 세찬 소나기가 내렸냐는 듯, 창문을 뚫고 햇살이 쏟아졌다.

“이제 환궁하셔야지요.”

온이 힘없이 말했다. 류하는 비명을 지르지 않으려 애썼다.

지옥 같은 끝을 직감하며 류하는 온을 간절히 바라보았다. 그는 비애를 삼키며 시선을 피했다.

“모시겠습니다, 월빈마마.”

그 호칭이 일탈에 종지부를 찍었다.

류하는 비틀비틀 일어났다. 온은 그녀의 손을 잡고 부축했다. 손이 닿는 순간이 괴롭고도 기뻤다.

온은 흙먼지로 범벅된 자신의 외투를 회수했다. 두 사람은 나란히 폐가를 나섰다.

비를 마저 뱉어 낸 하늘은 물감처럼 새파랬다. 얼마 전에 사납게 몰려들었던 먹구름은 자취를 감추었고, 뽀송뽀송한 새털구름만 가득했다.

그 동화처럼 예쁜 풍경을 보고 류하는 울음을 참았다.

왜 이리 예뻐, 왜 이렇게 평화로운데. 온 세상이 홍수에 잠길 만큼 비를 뿌려대지 그랬어.

그럼 나는 폐가 안에서 내 사랑하는 사내를 부둥켜안고 기쁘게 익사했을 텐데.

아니. 아니야. 죽지는 말자. 살아남아 각자 행복해야지. 류하는 처량한 기색으로 온을 흘긋했다.

사랑하는 이여, 그대가 오래오래 즐거우며 건강했으면 좋겠어.

그때, 둘이 몇 걸음쯤 말없이 걷던 도중에. 온은 돌연 팔을 뻗어 류하를 와락 끌어안았다.

“어……?”

류하는 당황했다. 그녀의 얼굴이 그의 가슴에 닿았고, 그의 팔의 그녀의 어깨를 감쌌다.

류하는 설레기보다는 경악했다. 이 사람, 왜 밖에서도 이래?

경악은 곧 공포로 바뀌었다.

“마마.”

온은 경직된 저음으로 불렀다. 서걱, 소리가 울린 후에.

모퉁이를 돌아 튀어나온 자객은 단칼에 목숨을 잃었고, 타인의 몸과 머리를 분리한 온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나직이 당부했다.

“제 곁에서 떨어지지 마십시오.”

류하의 몸이 다시 휙 움직였다. 아까는 류하를 한 팔로 휘감아 안으며 자신의 품에서 보호했던 온은 이제 류하를 둥글게 떠밀어 제 뒤에 감췄다.

자객은 혼자가 아니었다. 아까 온의 검에 목숨을 잃은 동료를 뒤따라 또 하나의 복면인이 모퉁이 뒤에서 튀어나왔다.

한 손으로 검을 뽑았던 온은 이제 양손으로 손잡이를 움켜잡았다.

아까는 한 팔로 류하를 감싸느라 바빴지만, 이제는 류하를 뒤에 두었기에 양수가 자유로웠다.

“끄아악!”

자객은 괴성을 지르며 죽었다. 그 괴성이 끝날 때까지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

이번에는 반대쪽 모퉁이에서 새로운 자객이 나타나자 온은 검의 위치를 바꿔 세 번째 괴한까지 베었다.

“마마, 이쪽으로!”

온은 다시 한 손으로 검을 고쳐 잡으며 나머지 손으로 류하의 손을 낚아챘다. 류하는 단단히 맞잡았다.

두 사람은 시체를 뛰어넘고 달렸다. 신발에 질컥, 하고 무언가 밟혔다. 류하는 피를 예상하고 바닥을 내려다보지 않았다.

‘자객? 갑자기? 지금?’

류하는 혼란 속에서 곱씹었다.

원래 암살 시도란 게 미리 경고장을 보내고 시간에 맞춰 이뤄지는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건 너무 당황스러운 전개라 류하는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왜, 누가…….’

류하의 의문은 오래가지 못했다. 온의 경우, 애초에 의문을 품을 틈조차 없었다. 전장에서 기른 본능이 움직였고, 그는 상황을 논리적으로 분석하기 전에 일단 실질적인 대응에 집중했다.

맥락 같은 건 나중에 파악해도 늦지 않는다. 지금은 우선, 본인과 호위 대상을 지키는 게 급했다.

“끄윽!”

샛길에서 뛰쳐나온 자객은 온의 검에 목이 찔렸다. 그가 죽기 직전 내두른 단검은 온을 아슬아슬하게 스쳤고, 그의 뺨에 핏방울이 맺혔다.

온의 얼굴에 번진 붉은빛을 보고 류하는 창백하게 질렸다. 공포는 자기보다는 상대방을 위해 곱절로 불어났다. 안 돼, 안 돼, 제발, 그대는 안 돼.

“대장군, 뒤에!”

류하가 외쳤다. 네 번째 괴한을 죽이고 잠시 숨을 고르던 온은 휘릭 뒤돌았다. 조금, 아주 조금 늦었다. 하마터면 이번에는 온이 꿰뚫릴 뻔했다.

“으아악?!”

다섯째 괴한이 비명을 질렀다. 이제는 온이 창백해졌다. 류하의 눈은 별을 삼킨 듯 새파랬다.

괴한 주변의 지면이 가뭄처럼 갈라지더니 뾰족한 돌덩이로 솟아 괴한의 양발을 옭아맸다.

그는 골목에 뿌리를 내린 흉측한 식물처럼 땅에 붙박였다. 움직임이 더뎌진 건 당연지사였다.

온은 피가 묻은 검으로 다섯 번째 자객을 베었다. 발이 붙잡혀 허둥대던 자객은 순식간에 죽었다.

자객을 쓰러트린 온은 류하를 돌아보며 다급히 소리쳤다.

“마마, 힘을 쓰지 마십시오!”

그녀가 또 피를 토하고 쓰러지는 걸 보고 싶지 않았거니와, 그녀가 주술을 쓴다는 사실을 숨겨야 하는 상황에서 비밀이 새어 나가는 건 싫었다.

고작 나를 지키느라 힘을 사용하는 바람에, 당신이 위험에 처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대장군!”

동시에, 류하는 긴박하게 절규했다.

대체 누가 누굴 걱정하는 거냐고, 너 자신이나 제대로 챙기라고 윽박지를 틈이 있었다면 좋으련만.

온이 류하를 돌아보는 사이, 여섯 번째 자객이 그림자처럼 나타났다. 아주, 아주 짧은 찰나였다. 그래, 고작 찰나에 불과했다.

사람의 머리가 터지면서 피가 튀었다.

제국의 수도에 들어온 지도 꽤 시간이 흘렀다. 가윤이 만나 보자고 한 사람을 만나 본 건 며칠 전이었다.

“가윤아, 나 심심해.”

정말 성가신 도깨비다. 가윤은 해맑게 징징대는 주안에게 눈을 흘겼으나, 절대 입 밖으로 털어놓지는 않고 고분고분 외출을 준비했다.

“오늘 나랑 놀아 주는 거야?”

“저는 늘 주안 님과 놀아 드렸습니다.”

“흠, 방금 짜증 낸 것 같은데.”

“아닐걸요?”

실랑이 아닌 실랑이를 이어 가며 인간과 도깨비는 나란히 시내를 누볐다.

누군가 가윤의 얼굴을 알아볼 걱정은 없었다. 유능한 도깨비는 자신의 신통력을 사용해 가윤에게 편리한 주술을 걸어 주었다.

5년 전 가윤의 모습을 기억하는 이가 그녀와 마주친다 한들, 그 사람의 기억 속에 가윤은 없으리라. 깔끔한 기억 조작이었다.

덕분에 편안하고 안전한 나들이에 나선 가윤은 주안과 함께 가게들을 구경하면서도 불쑥불쑥 죄악감에 휩싸였다.

나, 이래도 되는 걸까. 나 혼자 살아남아 아직 복수를 이루지도 못했으면서, 이렇게 평안하고 행복하게 있어도 되는 걸까. 감히.

나는, 반드시 불행해야 해.

“어? 비 내린다.”

거리에서 파는 인간들의 간식거리를 보며 군침을 흘리던 주안이 문득 고개를 들며 눈살을 찌푸렸다. 가윤도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일단 저기 들어가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가윤은 급한 대로 맞은편의 서점을 가리켰다. 주안이 끄덕였다.

주안은 가윤의 손을 가볍게 잡았다. 그 정도면 일상적인 접촉이었다.

가윤은 자신의 모든 신념과 양심을 거부하고 손을 살짝 틀어 그와 스르르 깍지를 끼는 상상을 했다. 상상만, 했다.

주안과 가윤은 길을 가로질러 서점에 진입했다. 그사이 별수 없이 조금 젖어서 머리카락에서 물방울이 반짝였다.

“어휴, 갑자기 웬 소나기람.”

주안이 한 손으로 물기를 털어 내며 가볍게 푸념했다. 나머지 손은 아직 가윤의 손을 잡고 있었다. 가윤은 슬쩍 밀어냈다.

“날씨라는 게 원래 가끔 변덕을 부리기도 하죠.”

가윤은 침착하게 대답했다. 그녀는 일부러 주안의 시선을 피했다. 당신은 아마도 모르겠지만,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당신과 종족이 달라 다른 시간을 살아가는 나는 당신을 향해 피어난 이 마음을 그냥 혼자 간직해야 한다는 것을 안다.

당신이 아무리 간절하고 지순한 눈빛으로 나를 봐도 나는 절대 흔들려선 안 되며, 당신이 복수를 마치고 나면 나를 미련 없이 떠나가도록 배려해야 함을 안다.

그리고 나는, 행복하면 안 돼. 불행해야 해. 적어도 복수를 끝마칠 때까지는 그래야만 해.

나 혼자 살아남은 주제에, 연정을 구하며 행복할 수 없어.

“우산도 없는데 어떡해?”

주안은 상처받지 않은 척 발랄하게 물었다. 가윤은 여전히 다른 쪽을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비가 그칠 때까지 기다려야지, 별수 있겠습니까.”

오전까지만 해도 쾌청하다가 돌연 먹구름이 몰려왔고, 소낙비는 불청객처럼 떨어졌다. 온 세상이 습한 잿빛이었다. 가윤은 그 탁한 색채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갑자기 내리는 비는 갑자기 그칩니다. 또 언제 그랬냐는 듯 맑아질 겁니다.”

그러니 내 삶에 단비처럼, 또는 폭우처럼 나타난 당신도, 언젠가는.

“……그래. 그러겠지.”

가윤이 창밖을 바라볼 동안 주안의 시선은 가윤을 향했다. 가윤은 모른 척했다. 주안은 금방 고개를 돌려 외면했다.

서점 안의 사람들이 웅성대는 소리와 빗물이 지붕과 바닥에 내리치는 소리가 섞여 묘한 화음을 이루었다. 되삼킨 진심으로 이루어진 침묵이 인간과 도깨비를 에워쌌다.

“어, 도깨비불.”

그때, 주안이 문득 말했다. 가윤이 의아해서 돌아보았다.

“도깨비불이요?”

“근처에 동족이 있어. 아니, 반쪽짜리인가? 분명 누군가 불을 지폈는데.”

주안은 익숙한 주술의 흐름을 느끼고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러다 활짝 웃으며 가윤을 초롱초롱 쳐다보았다.

“가윤아, 우리 가서 찾아보자.”

아, 정말 성가신 도깨비. 지칠 줄 모르는 호기심은 아무리 봐도 종족의 특징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