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류하의 얼굴이 어느 때보다도 극적으로 붉어졌다. 아, 이건 정말 고문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고운 분을 앞에 두고 비명횡사할 수는 없어서 꾹 참았습니다.”
온이 덧붙였고, 류하는 한 가지 단어에 두드러지게 반응했다. 그녀는 용기 내어 그와 똑바로 시선을 섞었다.
“내가 고와요?”
사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스스로 면경만 봐도 얼마든지 확인할 수 있었다. 내가 곱긴 곱지, 암, 상당히 곱게 생겼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굳이 물었다.
“당연히 곱지요.”
그 이유는 뻔했다. 그대가 그대 입으로 저리 말하는 걸 듣고 싶어서.
웃음을 곁들어 달게 속닥이든 한없이 진중하게 가만히 고백하든, 어떻게든 그대의 입에서 저 말을 끌어내고 싶었다.
“제가 여태 살면서 만난 그 누구보다도 아름답습니다.”
유치한 감정이었다. 뻔한 사실을 확인하고자 보채며 일차원적인 질문으로 매달리는 것.
사랑은 사람을 성숙하게 만드는 줄 알았더니, 이제 보니 당사자의 정신 연령을 낮추기만 하는 듯했다.
“그대는 사탕발림에도 참 능하군요.”
류하는 짐짓 새침하게 말했다. 이렇게라도 자기 자신에게 찬물을 끼얹지 않으면 입꼬리가 한계를 모르고 치솟아 바보처럼 히죽대게 될 것 같았다.
“사탕발림이라뇨. 곡해입니다.”
온은 진심으로 상처받았고, 류하는 뒤늦게 미안해져서 사죄의 뜻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그녀의 입술이 그의 입가에 쪽, 하고 맞닿았다. 온은 기가 막혔다.
“지금 남의 말을 멋대로 왜곡해 놓곤 고작 입맞춤으로 갚으시려는 겁니까?”
그는 류하의 뻔뻔한 작태를 나무라며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그러나 그의 뺨은 복숭앗빛이라서, 류하는 겸허히 잘못을 뉘우치기는커녕 오히려 얄밉게 생글거렸다.
“고작, 고작이라뇨? 내 입맞춤이 그대에겐 사소한 일인가요?
“아니, 그런 뜻은 아니고…….”
“내 입맞춤이 그대에게 그리도 하찮은 의미인 줄 몰랐습니다. 내가 실수했네요. 앞으로는 감히 내 미천한 입술을 그대에게 내밀지 않겠습니다.”
“그런 말씀 마십시오.”
온은 그새 강아지처럼 처량해져서 낑낑대며 빌었다. 그는 대형견 같은 눈망울로 하소연했다.
“하찮다고 생각한 적 없습니다. 어찌 하찮다고 여길 수 있겠습니까. 지금도 당장 다시 입 맞추고 싶어 미치겠는데.”
“네?”
류하는 온을 놀리던 것도 잊고 눈을 끔뻑거렸다. 온의 눈빛이 조금 위험해졌다. 이제는 강아지보다, 늑대에 가까웠다.
“그런 의미에서, 한 번만 더 입 맞춰도 되겠습니까?”
온의 팔이 다시 류하의 허리에 감겼다. 크고 따뜻한 손이 류하의 뺨을 감쌌다. 둘 사이에 산소조차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었다.
“맹세코 단 한 번도 당신의 입맞춤을 하찮게 여긴 적 없음을, 행동으로 보여 드리겠습니다.”
거창한 포부였고, 사실은 핑계였다. 소낙비를 변명거리 삼아 다시금 그녀의 숨결을 들이켜고 싶다는 게 그의 유일한 진심이었다.
“그, 그러든가요.”
류하는 버벅거렸다. 새침하게 받아치려다가 실패했다. 새침은, 무슨.
상대방의 안면이 화염처럼 달아오른 게 귀여워서 본인이 우위를 점한 듯한 착각 아래 건방지게 굴다가, 역으로 잡아먹히게 생겼다.
“그럼 허락하신 걸로 알겠습니다.”
귓가에 닿는 숨결이 뜨거웠다. 이윽고, 그 숨결이 입술을 덮쳤다. 혀끝이 파고드는 감촉에 신음은 짓눌려 으깨졌다.
앞으로는 사내의 몸이, 뒤로는 벽이 류하를 에워쌌다. 어느 쪽이든 단단하긴 마찬가지였다.
달콤한 입술과 갈라진 호흡이 뒤섞였다. 온은 욕망으로 번들거리는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류하는 헛웃음을 흘렸다. 예전에 자신이 그를 두고 고리타분하고 목석같은 사내라고 내심 툴툴댔던 게 너무 웃겨서.
“목석은, 무슨.”
그녀가 중얼대며 의도적으로 허리를 틀자 두 사람의 몸이 한층 빈틈없이 맞닿았다.
“그대는 여러모로 정직한 사람이네요. 말뿐 아니라 몸으로도 거짓말을 못 하는 걸 보니.”
장밋빛으로 물든 온의 얼굴을 쳐다보며 류하는 노골적으로 속닥였다. 온은 그녀를 망연히 바라보았다.
아니, 이 여인은 뭐야. 정말 별궁에서만 자란 스무 살 애송이 공주 맞아? 행동으로만 보면 온 세상을 두루 다니며 산전수전 다 겪어 본 요염한 여제의 표상인데.
“그대는 내가 정말 좋긴 좋은가 봐요. 좋아서 주체를 못 하는 것 같은데.”
“그, 좋다는 사실을 부정하지는 않겠습니다만, 이건 좀, 너무…….”
너무 치명적이었다. 몸속에서 열기가 폭발할 듯 요동쳤다.
온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야함과 귀여움과 다른 기타 사랑스러움의 종류를 전부 겸비한 놀라운 여인이 자신을 반짝이는 눈으로 보고 있었다. 미칠 것 같았다.
“여기서 멈추는 게 안전할 것 같다면서요.”
온은 불과 조금 전 류하 본인이 말했던 바를 상기시키며 거의 울먹울먹 애원했다.
이런 사람의 이런 행동을 두고도 알아서 인내하라니, 이건 전장에서 싸우는 것보다도 어려웠다.
“안전하다고만 했지, 만족스럽다고 한 적은 없습니다.”
류하는 앙큼하게 맞받아쳤다. 온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자신은 지금 짐승의 본능과 사투하느라 돌아 버릴 지경인데, 이 여인은 도움이 되기는커녕 혼자 좋다고 얄밉게 생글대는 중이니, 괘씸한 마음이 들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뚝뚝하게 대꾸했다. 이윽고 류하의 옷을 움켜잡았다.
절대 아프지는 않도록 조심스럽게, 그러나 제법 난처할 만큼 저돌적으로.
온의 손이 류하의 허리춤을 파고들었다. 안쪽으로, 속옷 아래 맨살이 감춰진 곳을 향해.
온을 놀리던 류하는 다시금 상황을 역전당했다.
놀리다가 압도당하다가, 본인이 먼저 상대방을 자극하다가 도로 잡아먹히고. 두 남녀는 오늘 끊임없이 엎치락뒤치락했다.
“저도 만족한 적은 없습니다. 그래도 참고 있었는데, 당신의 태도가 영 협조적이지 않네요.”
“알겠으니까, 잠깐……!”
류하의 항변은 신음으로 조각났다. 류하는 눈앞이 하얘질 만큼 짜릿한 충격에 현기증을 느끼며 온을 꽉 안았다. 그렇게라도 붙들고 있지 않으면 중심을 잃어 쓰러질 것 같았다.
“류하 님, 사람의 인내심을 그렇게 시험하면 못씁니다.”
온은 마치 말썽꾸러기 제자를 가르치는 고매한 스승처럼 엄중히 훈계했다. 말투와 언어는 그토록 점잖으면서 행동과 눈빛은 몹시 동물적이니, 그 확연한 괴리에 류하는 입을 삐죽였다.
“와, 진짜 내숭쟁이.”
류하는 자그맣게 비난했다. 여인을 반쯤 벗겨 놓고 곳곳을 어루만지던 엉큼한 사내가 생긋 웃었다.
“당신도 만만치 않습니다.”
온은 다시 입술을 삼켰다. 류하는 가까이 당겼다. 엉망으로 풀린 옷고름 사이로 단단한 가슴과 말랑한 상체가 맞닿았다. 살이 스치고 문지를 때마다 행복했다.
“류하 님.”
온은 간간이 중얼댔다. 주인에게 직접 받은 이름이니 마음껏 누리고자 했다. 한 글자씩 발음할 때마다 명치끝이 쓰렸다.
“온.”
류하도 마주 속삭였다. 짧고 둥근 음절을 입에 담을 때마다 눈물이 날 것 같아서, 실제로 울었다. 한 방울만, 톡.
속눈썹에 맺혔다가 뺨으로 떨어지는 물기를 보고 온은 류하의 얼굴에 부드럽게 입 맞추며 슬픔마저 빨아먹었다.
각자 시작과 동시에 끝을 기약하며, 짧은 시간을 훔쳐냈다.
열기가 잦아들고 나서, 온은 바닥에 자신의 외투를 돗자리처럼 깔았다. 아까 이미 비에 젖고 바닥에 떨어지면서 엉망이 되었기에, 옷의 청결 유지는 이미 포기한 뒤였다.
“앉으십시오, 류하 님.”
온이 공손히 권하자 류하는 살포시 착석했다. 온은 그녀의 옆에 나란히 앉았다. 의복을 어느 정도 정돈한 그녀가 이제는 머리를 복구하기 위해 뒤통수를 더듬었다.
“다시 땋아 드릴까요?”
온이 물었다. 류하가 눈썹을 치키며 돌아보았다.
“머리도 땋을 줄 아세요?”
이건 정말 의외였다. 사내가, 그리고 황족이 여인의 머리칼 땋는 법은 또 언제 배웠대? 황태자 수업 때 그런 걸 가르쳤을 리도 없고.
“예전에 가끔 태후마마의 머리를 땋아 드렸습니다. 제 누이들의 머리도요.”
온은 솔직하게 설명했다. 어머니는 아들에게 황자답지 못하다고 나무라면서도 은근히 좋아했고, 어린 여동생들도 마냥 반가워했다. 연장자인 누님은 새침하게 거부했지만.
“그대는 참 효자네요. 다정한 오라비고요.”
류하는 기특한 마음에 무심코 말했다. 그러다 자신이 혹 실수했나 싶어 입을 다물었다.
“황송합니다.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온은 일순 어두워진 눈빛을 내색하지 않고 온화하게 답했다. 어머니를 생각하자 마음이 아팠으나, 지금은 그 우울을 전염시키고 싶지 않았다.
“그럼 뒤돌아 앉으십시오. 머리는 제가 해결해 드릴게요.”
아마 궁녀들의 전문적인 솜씨를 완전히 따라잡긴 힘들겠지만, 그래도 아예 산발로 궁에 돌아가는 것보다는 나았다.
빗속을 헤매느라 머리가 망가졌다고 둘러댈 정도로만 복구해 놓을 자신은 있었다.
류하는 온에게 등을 보인 채 앉았다. 빗이 없는 관계로 온은 손가락을 사용하여 엉킨 머리칼을 조심히 풀어냈다.
전장에서 검을 휘두르는 그의 크고 강한 손이 혹여 본의 아니게 너무 거칠까 봐 류하는 걱정했으나, 그 걱정은 무의미했다.
온의 손길은 강하고 견고한 만큼 섬세했다. 하나하나 매듭을 풀고 머리칼을 나누어 꼼꼼하게 땋는 동작이 온유했다.
류하는 눈을 감았다. 점차 옅어지는 빗소리와 뒤에서 번지는 사내의 온화한 호흡, 자신의 목덜미를 언뜻언뜻 스치는 머리칼과 손끝의 바스락댐을 전부 느끼며.
영원히 기억 속에 새겨야지. 이 순간을, 이 감촉을.
나중에 내가 다시 형수로서 그대를 마주해야 할 때. 제대로 승은조차 입지 못한 뒷방 후궁으로 나날이 시들어갈 때. 언젠가 그대도 원치 않는 혼인을 하여 다른 이를 아내라 부를 때.
내가 이날의 추억을 붙들고 견딜 수 있도록.
“다 됐습니다, 류하 님.”
어느덧 모양이 얼추 완성되었다. 류하는 다시 뒤돌아 온을 마주했다. 그는 뜨거운 눈으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뜨겁고, 상냥하고, 슬픈 눈. 그도 점차 옅어지는 빗소리를 들었다.
“고마워요, 온.”
류하는 속삭였다. 그러곤 애써 웃었다. 억지로 눈매를 접고 입꼬리를 당기지 않으면, 왈칵 울어 버릴 것만 같았다. 그리고 온 앞에서는 끝까지 행복한 모습이고 싶었다.
온은 류하의 뺨을 부드럽게 감싸고 입술을 포갰다. 류하는 눈을 사르르 감았다. 억눌린 눈물이 기어코 떨어졌다. 여인의 뺨에도, 사내의 눈에도, 당분간 물기가 반짝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