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한 번만, 지금 딱 한 번만 더, 철딱서니 없는 어린애처럼 굴고 난 다음에 어른으로 돌아가자.
절제의 미덕 같은 건 안중에도 없는 철부지처럼 굴어 보자. 오늘 딱 하루만, 성숙하고 상식적인 모든 것을 거부하자.
“우리가 누구를 해치는 것도 아니잖아요, 네?”
아까는 미안하다고 헐떡였으면서, 류하는 계속해서 미안할 짓을 했다. 사과와 어울리지 않는 행동이었다.
온은 그런 그녀를 미워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게 참 어려운 일이었다.
“오히려 우리 자신을 해치면 해쳤지. 참느라 힘들었잖아요. 아니에요?”
화병이 나서 죽을 뻔했다. 간절히 원하는 게 코앞에 있는데 손을 뻗어 스치지도 못하게 묶여 있는 건 누구에게나 가혹한 일이었다.
“어차피 마지막이잖아요. 나도 이게 미친 짓이라는 걸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대를 다시는 따로 불러내려 하거나, 단둘이 남으려고 애쓴다거나, 그러지 않겠습니다. 그러니까 이번 한 번만, 딱 한 번만, 그냥 잠시 꿈꾸는 거라 치고…….”
소나기 덕분에 훔쳐낸 반나절. 아니, 그것보다도 짧은 시간.
부스러기만큼 적은 기간만이라도 온전히 우리의 것이 되길. 미련이 아닌 추억으로 남도록.
“그냥 사람 하나 살리는 셈치고, 제발 나랑 그대의 마음만 생각해 주세요.”
그대 없이는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은 어리석은 공주를 구하는 일이라고 생각해 줘. 그냥 그렇게 여기면 돼. 이건 엄연한 인명 구조야. 죄 같은 게 아니야.
류하가 다시 겁도 없이 입을 맞출 때, 온은 그녀를 밀어내지 못했다. 한 손으로 장검을 휘두르며 시체 군단도 쓰러트리는 강력한 사내임에도 불구하고.
한때 적군의 피가 튀었을 그의 품에 피보다도 더 뜨거운 열기가 담겼다. 온은 양팔로 류하의 여린 몸을 끌어안고 이미 분홍빛으로 부푼 입술을 갈급하게 탐했다.
입술을 비비는 사이사이로 흐릿한 신음이 튀어나왔다.류하가 토한 가냘픈 숨소리가 온의 심신을 더욱 자극했다.
“대장군…….”
“온입니다.”
류하의 목덜미를 손으로 감싸며 온은 사심을 담뿍 담아 속삭였다. 욕심내는 게 점점 쉬워졌다. 스스로 두려울 지경이었다. 달콤한 탐욕이 그를 부추겼다.
“온이라고 불러 주세요.”
당신에게 이름으로 불리기 원해. 온은 꾸밈없는 소망을 드러냈다.
아까 죄 운운하며 내숭을 떨던 사내는 욕정에 녹아 사라졌다.
욕정, 그리고 연정. 두 종류의 정열이 뒤엉키자 걷잡을 수 없는 불길이 번졌다.
류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당장은 희열보다 당혹이 앞섰다.
뭐야, 이런 것도 할 줄 아는 사내였어? 그리고 나는 여기서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공주의 나이 앳된 스무 살, 평생 별궁에 갇혀 살며 외간 남자와 입을 맞추기는커녕 시선조차 제대로 섞어 본 적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세상이 뒤집혀 뜻밖의 장소에서 뜻밖의 사내와 뜨거운 입맞춤을 벌이고 있으니, 당황스러울 만도 했다.
“대장군, 아니, 온, 잠깐만…….”
눈앞이 어질어질해서 당장이라도 기절할 듯한 마음에 류하는 온의 목을 부둥켜안고 다급하게 불렀다.
그러나 항상 새침하던 이 사내는 막상 고삐가 풀리고 나자 꽤 제멋대로 굴고 있었다.
“잠깐, 흡!”
다시 입술이 막혔다. 아까처럼 달큼한 숨이 맞물렸다.
부드러운 체온에 뒤덮인 류하는 상대방의 위선에 기가 막혔다. 내숭쟁이가 따로 없네, 속으로 마구 욕하며.
겉으로 그녀는 그보다 더 열렬하게, 처음인 만큼 조금은 서툴게, 그러나 일말의 망설임도 거리낌도 없이, 눅진한 숨결을 마주 삼켰다.
당혹스러워할 필요가 없었다. 여기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숙맥처럼 고민할 이유도 없었다.
혀끝이 점점 질척댈수록, 숨결이 차차 뒤엉킬수록, 계산이나 판단 없이도 움직임이 가능했다. 모든 게 본능이었다.
만약 이런 게 연정이라면, 연정으로 사람을 죽이는 것도 가능할 거라고 류하는 생각했다.
이렇게까지 누군가를 좋아하다가는 죽어 버릴 수도 있겠어.
이제는 둘 다 신음조차 없었다. 빗소리, 오직 빗소리만.
서로 간절하게 껴안을수록 차림새가 흐트러졌다. 아무도 개의치 않았다.
류하의 등이 벽에 닿았고, 곱게 땋아 올린 머리칼이 어느새 헝클어졌다.
온의 손은 류하의 허리에 닿았고 류하의 팔은 온의 목을 감쌌다.
황홀했다. 대화 한마디 나누지 않고 이렇게 온기를 섞는 것만으로도 이토록 지순한 애정을 키울 수 있다니, 놀라웠다.
계속 황홀하고 놀라운 것만으로 만족할 수 있다면 좋았을 텐데. 인간의 탐욕은 끝을 몰랐고, 하나를 충족하자 열을 더 원했다.
류하의 허리춤을 매만지던 손이 위로 미끄러지듯 올라와 류하의 가슴 언저리에 닿았다. 류하의 몸에 소름이 돋았다.
징그럽고 싫어서 돋는 소름이 아니라, 척추가 저릿할 만큼 기쁘고 기대돼서 저절로 요동치는 희열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멈춰야 함을 알았다.
“온, 잠깐만요.”
류하는 숨 가쁘게 애원했다. 말투에 아쉬움이 잔뜩 담겼다. 온은 마지못해 복종했다. 더 파고들 수 있는데 파고들지 못하고, 류하의 의복 위를 서성이며 그녀를 애타게 바라보았다.
“그대도 알다시피, 나는 입궁할 때 처녀 판정을 받았고……. 여기서 더 나가면, 위험해요.”
대체 왜 이 세상은 여인들의 순결에 집착하는지 모르겠다.
특히 황제의 신부가 될 자는 반드시 숫처녀여야 했고, 이를 증명하기 위해 꽤 번거롭고 수치스러운 검사를 받아야 했다.
류하는 간택 당시 자신이 동정녀라는 사실을 공식적으로 입증했고, 이후 황제와 동침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은 류하가 당연히 초야를 치른 줄 알고 있으나, 황제와 황후는 진실을 알았다.
그러니 만약, 자신이 여기서 순간의 갈망을 못 이겨 온과 관계를 맺기라도 한다면.
그리고 모종의 이유로 자신이 더는 처녀가 아니라는 사실을 들키기라도 한다면.
다른 이들은 그저 그녀가 황제와 합방했기 때문이라고 넘겨짚겠지만, 황제는 당장 불륜을 의심할 것이다.
“미안해요. 내가 더는 참을 자신이 없어서, 그래요. 그냥 여기서 멈추는 게 안전할 거예요.”
류하는 우물대며 온의 시선을 피했다.
새삼 억울해졌다. 황제 그놈은 지금 일고여덟 명의 여인과 번갈아가며 동침해도 주변에서 잘한다고 칭찬해 주는데, 나는 사랑하는 단 하나의 사내를 두고도 이렇게 주저해야 한다니.
온은 쌕쌕 호흡하며 류하를 내려다보았다. 상대방의 이성적인 절제가 야속했고, 이를 야속하다 여기는 자기 자신이 황당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사과하지 마세요.”
그는 억눌린 목소리로 타일렀다. 성난 짐승이 난폭함을 자제하듯 힘겨운 음성이었다.
“저야말로 송구합니다. 전부 제 욕심입니다.”
자신은 상당히 무욕적인 삶을 살아왔다고 자부했었다. 권력욕이 없었기에 권좌를 빼앗기고도 분하지 않았고, 다만 목숨을 건졌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어릴 적부터 황태자 수업을 받으며 과욕은 소인배의 짓이요, 제 몫이 아닌 것을 탐하는 일은 폭군이 되는 지름길이라고 누누이 배웠다.
비록 황태자의 지위는 잃었지만, 과거의 가르침만큼은 충분히 마음에 새기고 잘 실천하는 중이라고 나름 우쭐하곤 했다.
온의 거만은 이제 무참히 꺾였다. 여기 소인배가 있습니다. 폭군 꿈나무가 있어요. 과욕을 품어 고통받는 바보. 절대 안을 수 없는 이를 연모하고 있다.
“내가 욕심나요?”
류하는 슬쩍 웃으며 되물었다. 온은 어처구니없어서 쳐다보았다. 이 상황에 웃음이 나와? 아, 그런데, 어떡하죠. 저 서글픈 미소마저 예뻐 보여.
“미치도록 욕심납니다.”
온은 솔직하게 고백했다. 류하의 미소가 짙어졌다. 웃되, 우는 것처럼 보였다. 고혹적인 눈매는 반달처럼 휜 와중에도 비탄을 그려냈다.
“그럼 뭐 하나라도 드릴게요. 욕심의 일부라도 보답 받아야죠.”
류하는 달게 속삭인 뒤 온의 입가에 살며시 뽀뽀했다. 이게 보답인가? 과분한 답례라고 온은 생각했다. 그러나 입맞춤은 준비 운동에 불과했다.
“내 이름을 드릴게요.”
그녀가 선포했다. 온은 벅찬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그대도 나를 이름으로 불러 줘요, 온. 마마, 아가씨, 그런 거 말고.”
황궁의 다른 모두가 그녀를 월빈, 또는 마마라고 불렀다.
그러니 지금 류하가 허락한다면, 온은 이 드넓은 나라에서 그녀의 이름을 취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되리라.
그 정도면 넉넉한 보답이었다.
온은 자신의 이름을 상으로 주겠다는 당돌한 공주를 아득하게 바라보았다. 어쩌면 이토록 사랑스러울까. 이런 사람을 곁에 두고 어떻게 내가 지금껏 참았을까.
이쯤 되자 자기뿐 아니라 황궁의 다른 모든 이들이 류하를 몰래 사모하고 있는 건 아닌지 걱정되기 시작했다. 남녀노소 홀리고도 남을 존재인데.
설마, 지금 내가 황제 폐하 한 분에 대해서만 걱정할 때가 아닌 건가? 알고 보니 나한테는 연적이 수백 명쯤 되는 건가? 그런 거야?
연적. 연적이라.
그 단어의 불가능성을 곱씹는 순간, 그의 뺨에 맺혔던 온기가 처량하게 식었다.
누군가를 연적이라 칭하는 것도 자신이 제대로 된 연인이 될 수 있을 때나 가능했다.
“류하 님.”
그래도, 끝까지 보답은 받고 가야지. 그가 소중하게 불러 보았다. 그러자 류하의 볼은 곧 석류처럼 익었다.
“류하 님, 이라 불러도 되겠지요? 오늘만이라도.”
당신의 말대로 오늘은 처음이자 마지막이 분명하니, 할 수 있을 때 다 하고 갈래.
당신의 이름을 부르고, 당신과 오래도록 눈을 맞추고 싶어. 비가 그치기 전까지라도.
“실컷 부르세요.”
류하가 중얼댔다. 그를 똑바로 바라보는 게 힘들었다. 낯설고 수줍어서, 간지럽고 기뻐서, 저 눈빛에 다시금 사로잡히면 이번에는 기어코 눈물이 터질 것 같아서, 버거웠다.
“뭘 그리 쑥스러워하십니까, 류하 님.”
온은 슬며시 웃으며 류하를 놀렸다. 아까는 완연히 농익은 어른처럼 달려들다가 지금은 고작 이름을 불렸다는 이유로 아이처럼 어색해하는 그녀를 보자 짓궂은 마음이 샘솟았다.
“익숙해지실 때까지 계속 불러 드리겠습니다. 그러면 조금 도움이 될까요?”
“아, 아니요? 아마 안 될걸요?”
“흠, 해 보지 않고는 모르는 일이지요.”
“뭐야, 이거 되게 억울하네요.”
“뭐가요?”
“내가 그대 이름 부를 때는 아무 느낌 안 났어요? 나만 이렇게 어려운 거예요, 지금?”
류하가 절절매며 뾰로통하게 항의하자 온은 멈칫했다.
그는 토라진 아이처럼 제 품속에 담겨 자신을 뾰족하게 올려다보는 여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느낌이야 났지요. 좋아서 죽는 줄 알았습니다.”
그가 달콤하게 속삭였다. 언제 그리 놀리는 투였냐는 듯, 더없이 진지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