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류하는 더 묻지 않았다. 온의 표정을 억지로 보고 싶지 않아서 그녀도 시선을 돌렸다.
“으, 에취.”
그녀는 시선을 돌린 채로 기침했다. 온이 걱정스레 돌아보았다.
“괜찮으십니까? 너무 젖으셨죠?”
“으, 콜록. 자업자득이죠, 뭐.”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왜요, 그대도 동의할 줄 알았는데. 아까는 나보고 손이 많이 간다면서요.”
“그때도 말씀드렸지만, 혼잣말이었습니다.”
“다 들으라고 한 말이었다면서요?”
류하는 눈을 흘겼다. 그러나 그녀는 온을 오래 노려볼 시간이 없었다. 그 전에 다시 기침이 터졌고, 그녀는 입을 막으며 몸을 떨었다. 온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옷을 이리 주십시오. 지금은 차라리 벗는 게 낫겠습니다.”
“버, 벗어요?”
류하는 화들짝 놀라 되물었다. 온은 당황해서 흠칫했다가, 곧 새빨갛게 변색하며 더듬거렸다.
“그, 그러니까, 제 겉옷이요. 제 외투가 다 젖지 않았습니까.”
“아아, 네, 그대의 겉옷, 그렇죠…….”
“저, 젖은 옷을 계속 입고 있으면 더 추우실 겁니다.”
“네, 맞아요. 기본적인 상식이네요. 젖은 옷은 벗는다. 네.”
나, 대체 뭐한 거냐. 류하는 수치심을 느꼈다. 매우 건전하고 상식적으로 자신에게 조언한 사내를 두고 벗느니 마느니, 대관절 무슨 상상을 한 건지.
상대방도 비슷한 심정으로 고통받고 있다는 사실을 류하는 미처 몰랐다. 온은 자괴감을 느끼며 시선을 피했다.
젖은 옷, 벗는다. 그 두 가지 문구가 너무 위험한 회상을 일으켰다.
‘안 돼, 젠장…….’
머리부터 발끝까지 투명하게 젖어 얇은 내의 차림으로 자신을 보던 공주가 떠올랐다.
온천수로 목욕하겠다며 숲속으로 떠났었지.
그때 비명이 들렸고, 달려가 보니 당신이 그런 모습으로 내 앞에 있었다.
‘그건 이제 좀 잊으라고, 제발.’
글쎄, 잊는 게 가능할까? 죽어서나 잊힐까.
류하가 자신의 외투를 벗느라 바스락대자 다시 헛된 탐욕이 온의 안면에 열기를 불어넣었다.
살결에 비단이 스치는 소리. 그런 것들이 그의 감각을 잠식했다. 욕심이 생겼다. 갈망을 불러일으켰다. 너무도 간절하게, 단 하나를 원했다.
“여기, 외투는 돌려 드리겠습니다.”
내가 원하는 단 하나의 존재. 그 존재가 온에게 외투를 도로 내밀며 공손하게 말했다.
“그리고 그대가 허락한다면, 잠시 불을 지피고 싶은데요.”
류하가 조심스레 덧붙이자 온은 망상을 잊고 눈살을 찌푸렸다. 불? 그러다 그는 이해했다.
“……그때도 말씀드렸지만, 제 허락을 구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때, 우리 둘이 나란히 밤을 지새웠던 산속에서.
흠뻑 젖은 굴곡에 내의를 휘감은 모습만큼이나 온의 머릿속에서 떠나길 거부하는 기억 한 조각이 있었다.
눈이 별처럼 새파랗게 빛나던 공주. 보석을 한 움큼씩 뜯어다가 그녀의 눈에 들이부은 것 같았었다.
류하는 잠시 복잡한 심경으로 온을 보다가, 그를 외면하며 허공을 쿡쿡 찔렀다.
주문을 외울 필요는 없었다. 거창한 의식도, 난해한 절차도 없었다. 그저 타고난 힘이 류하의 눈을 물들이며 공중에 불꽃을 피웠다. 샛별의 조각처럼 새파란 빛이었다.
“아.”
온은 다시 보고도 믿지 못해 신음했다. 류하는 살짝 겁먹은 시선으로 그를 흘깃했다. 그러다 눈이 마주쳤고, 류하는 흠칫 놀라 회피했다.
“보지 마세요.”
그녀가 우울하게 중얼댔다. 나를 보고 해괴하다고 여기느니 차라리 외면해 줬으면 좋겠어.
“제가 보는 게 불편하십니까?”
온이 자그맣게 물었다. 어느덧 공기가 제법 훈훈해졌다. 주먹만 한 불꽃 두어 뭉치가 허공에 둥둥 떠다니며 열을 뿜은 결과였다. 그 불을 다스리는 이는 애처롭게 얼굴을 감췄다.
“내가 아니라, 그대가 불편한 게 문제 아닌가요?”
류하는 이를 악물고 물었다. 그는 그녀를 쳐다봤지만 그녀는 그를 외면했기에 시선은 하릴없이 어긋났다.
“징그럽잖아요.”
내 아비라고 불리던 작자가, 나를 돌보던 궁인이, 다른 왕자들과 왕녀들이, 전부.
나를 배 아파 나은 어미를 제외하면 전부 내 힘과 모습을 보고 요괴의 딸년이라 욕했어.
“억지로 볼 필요 없습니다.”
그녀는 사납게, 실은 처량하게 당부했다. 그 가련함이 온의 입을 움직였다.
“불편하지 않습니다.”
말의 마디마다 단호한 울림이 담겼다. 류하는 그제야 그를 빠끔히 돌아보았다. 아주 조금, 시선이 맞닿았다. 그는 그녀를 여전히 쳐다보고, 그녀의 시선도 조금씩 돌아왔기에.
“징그럽다고 여긴 적 없고요.”
그는 또다시 고백했다. 불편하지 않았으며, 징그럽지 않노라고. 진심이 아닌 부분은 없었다.
“당신을 억지로 본 적도 없습니다.”
이제 류하의 눈은 점점 더 온을 향하여, 그는 그녀를 계속해서 쳐다보고 그녀도 똑똑히 맞바라봤기에, 시선이 어긋날 틈이 없었다.
“오히려 억지로 보지 않으려 애쓴 적이 훨씬 많습니다.”
갈급한 저음이 류하를 옥죄었다. 파란 눈의 여인은 사내의 검은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게 무슨 뜻이죠?”
그녀는 굳이 되물었다. 알면서, 다 알면서. 옛날부터 짐작하고, 제발 아니기를 바랐으면서.
“당신을 바라보지 말아야 할 때 계속 바라보고 싶어서, 괴로웠다고요.”
부질없이 반문하는 그녀에게 그는 나지막이 부연했다. 바라보고 싶었다고. 괴로웠다고. 사실, 지금도 고통받는 중이었다.
빗소리는 나직하고 불덩이는 따스하고 서로의 시선은 너무 깊어 바닥이 없었다.
누가 먼저 다가갔는지 헤아리는 건 불가능했고, 무의미했다.
처음에는 가느다란 넝쿨처럼 한 가닥씩 뒤얽히던 마음이 이제는 나무뿌리처럼 서로를 부둥켜안았으니, 한 쌍을 둘로 나누는 건 이제 인간의 의지 밖이었다.
온의 젖은 품에 류하가 담겼다. 류하의 입술이 온에게 닿았다.
허공에서 불꽃이 픽픽 꺼졌다. 신통력으로 불을 피우고 유지하던 이가 이제 온통 다른 곳에 정신이 팔렸으니까.
달콤한 숨결이 혀끝을 삼키는데, 고작 불꽃 따위에 신경 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온의 팔에 걸려 있던 외투가 툭, 하고 바닥에 떨어졌다. 그 누구도 주울 생각을 하지 않았다. 더는 춥다는 느낌이 없었다. 오히려 너무 뜨거워서, 타 버릴 것 같았다.
“으음…….”
아낌없이 타 버려서 새하얀 재만 남고, 결국 빗물에 쓸려 사라질 것처럼 두 사람은 입을 맞췄다.
내일은 없는 것처럼. 이번이 마지막인 것처럼. 실제로 마지막일 테니.
“하아.”
신음에 잠기고 체열에 꿰뚫려 서서히 죽어 간다. 그만큼 환희롭고, 비참하다.
서로를 연모하지만 연모할 수 없었다. 국법이 금했고, 인륜이 막았다.
“그만, 그만해요.”
먼저 속삭인 건 류하였으나, 그 전에 온이 멈췄다. 홧홧한 호흡이 서로의 입술을 스쳤다. 그만큼 가까웠다.
둘 중 하나만 고개를 기울인다면 얼마든지 다시 맞물릴 수 있으리라. 하지만, 차마 장벽을 깨부술 자가 없었다.
“미안해요. 미안해요, 내가…….”
이미 다 깨부쉈으면서, 깨부수고 냉큼 넘어갔으면서, 이제야 뒤늦게 다시 허겁지겁 쌓아올려 그 뒤에 숨어 보려는 꼴이었다. 이미 다 늦었는데. 끝났는데.
“사과하지 마십시오.”
온은 혼탁하게 읊조렸다. 그의 눈빛은 태풍처럼 어지러웠다. 잘못 눈을 맞추면 그 안에 빨려 들어가 길을 잃을 것만 같았다. 그는 반걸음 물러섰으면서도, 도저히 류하를 놓지 못했다.
“이건 다, 제 불찰입니다.”
여인의 허리에서 팔을 떼고, 밀착한 상체 사이에 어떻게든 틈을 욱여넣어 정상으로 회복하고 거리를 벌려야 하는데.
이러면 안 되는데. 역심이고, 패륜인데. 형이자 황제의 아내를 품에 안고 이토록 처참한 희열 속에 허우적대면 안 되는데.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당장 제 목을 치셔도 할 말이 없습니다. 제가 감히, 제가 감히 폐하의 후궁을…….”
“나, 폐하랑 동침한 적 없어요.”
류하가 불쑥 실토했다. 온의 눈이 커졌다. 그가 물러선 만큼 그녀는 그를 붙들었다. 그러면서도 다시 당기지는 못했다. 다시 검은빛으로 돌아온 그녀의 눈에 간절함이 가득했다.
“폐하께서는 나를 품으신 적 없습니다. 앞으로도 품지 않으실 예정이고요. 내가 황손에게 주술사의 피를 물려줄까 봐 그러신대요. 그러니까 나는, 나는 절대로…….”
나는 절대 황제의 여인이 아니야. 나는 그 누구의 것도 아니야. 나는 그저 나로서 그대를 사랑하고 그대를 택했어.
모든 게 우연인 듯, 운명인 듯, 사실 내 의지였어.
“내가 그대의 혈육과 살을 섞고도 지금 여기서 그대와 이러고 있는 거라고는 생각하지 말아 줘요.”
적어도 내가 형과 동생을 나란히 노리는 망측한 탕녀라고 오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대가 제 친형과 몸을 섞은 여인을 탐하는 죄를 범했다고, 그렇게 자책하지 않았으면 해.
온의 눈빛이 흔들렸다. 황제와 동침한 적 없다니. 그는 찰나의 안도에 탄식을 뱉었다가, 도로 참담해진 마음에 눈가를 찡그렸다.
“당신이 마음에도 없는 사내와 억지로 몸을 섞을 일은 없다는 사실은 기쁩니다. 하지만.”
온은 류하를 살짝 밀어냈다. 류하는 곧장 매달렸다. 온은 재차 탄식했다.
자신의 소매를 구명줄처럼 움켜쥔 공주의 손길은 사실 나약했다. 뿌리치려면 얼마든지 뿌리칠 수 있었다. 마음이, 마음이 늘 문제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바뀌는 건 없습니다.”
그는 제 소매를 붙든 류하의 손에 자신의 손을 살포시 포갰다. 언뜻 보면 밀어내려는 동작으로 보였으나, 실은 지그시 감싸 쥐는 행위였다. 맨살을 통해 체온이 전해졌다.
“이건 여전히 죄입니다, 마마. 우리는 죄짓고 있는 겁니다.”
국법을 어기는 일이요, 어쨌든 남의 신부를 탐하는 일이라, 정직한 사내 온은 죄책감을 느끼며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철없는 공주가 고집했다.
“아무도 모르면 죄가 아닙니다. 우리 둘만 알고 있으면 돼요.”
공주의 말도 안 되는 주장을 듣고 대장군은 세 번째로 탄식했다.
비록 형수를 사모하는 패륜을 저질렀지만 그의 근본은 매우 올곧았다. 그는 류하의 궤변을 나무랐다.
“아무도 몰라도 죄가 되는 일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과연, 끝까지 숨길 수 있을까?
조금 전의 충동적인 입맞춤은 그렇다 쳐도, 앞으로 우리가 스스로 억누르지 않는다면 과연 이 마음이 조금이라도 새어 나가지 않을 수 있을까.
“네, 세상에는 분명 그런 일들이 있죠. 그런데 이 일은 아닌 것 같아요.”
류하는 꿋꿋이 우겼다. 별궁에서 멋대로 자란 그녀는 양보하는 법을 몰랐다. 아무도 이 천덕꾸러기 공주에게 적당한 타협은 왕족의 미덕이라고 가르쳐 주지 않았다.
사실상 방치되어 하고 싶은 대로 하며 컸으니, 알 게 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