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아가씨, 도중에 죄송하지만 관아로 향해야 할 것 같습니다.”
온이 류하를 돌아보며 말했다. 관아라는 말에 소년은 창백해졌고, 류하도 조금 거북해졌다.
“시, 싫어요, 당신들은 어차피 돈 많잖아!”
소년은 뾰족하게 외치며 요란하게 발버둥 쳤다. 온은 꿈쩍도 하지 않고 소년의 손목을 옥죄었다. 그때, 근처에 있던 제하가 소리쳤다.
“꺄악, 누가 쟤 좀 잡아!”
발 빠른 사슴처럼 냅다 도망치는 또 다른 남자아이가 보였다. 류하와 온의 얼굴에 동시에 난색이 스쳤다.
순간, 온이 잡고 있던 소년이 온의 정강이를 힘껏 걷어찼다. 방심한 틈에 날아온 공격에 온은 당황하며 소년을 놓쳤다.
“윽!”
“대장군, 괜찮아요?!”
통증을 느끼며 몸을 굽힌 온에게 류하가 다급하게 물었다. 온은 미간을 찡그린 채 신음했다.
“저는 괜찮습니다. 한데 아가씨의 돈이랑 물건이…….”
꼬마 도둑들의 협업은 참으로 훌륭했다. 딱 봐도 한두 번 해 본 솜씨가 아니었다.
한 명이 온에게 붙잡혀 어른들의 시선을 독점한 사이, 나머지 한 명은 진짜 목표였던 아가씨의 몸종을 공략했다.
후궁치고는 수수하게 차려입긴 했으나 평범한 아낙치고는 복장이 너무 세련된 류하가 좀도둑들의 관심을 끈 게 화근이었다.
저 정도 높으신 분들은 보통 본인이 직접 귀중품을 휴대하지 않고 아랫사람에게 맡긴다는 게 흔한 상식이었다. 그런즉, 처음부터 제하가 표적이었다.
“되찾으면 되죠.”
류하는 간단하게 대답했다. 온이 심각하게 다치지 않았다는 걸 확인하자마자 그녀는 몸을 다시 세우더니, 곧장 뛰었다. 온은 식겁했다.
“아가씨?!”
이런 황당한 상황을 보았나. 도둑맞은 물건을 직접 회수하겠다며 인파를 헤치고 빠르게 멀어지는 저 기상천외한 후궁님을 보라. 저 사람의 태생이 왕족이라는 사실을 잊을 지경이었다.
“아오, 씨, 진짜……!”
온은 답지 않게 비속어까지 뇌까리며 본인도 자세를 잡고 땅을 박찼다. 호위 대상이 저딴 돌발 행동을 벌였는데, 호위 본인이 멀뚱히 지켜만 보고 있을 수는 없었다.
“대장군님!”
“아, 세상에, 마마…….”
얼결에 뒤처진 부하들만 환장할 노릇이었다. 특히 제하는 너무 놀라서 아가씨라는 가짜 호칭도 잠시 잊었다.
류하는 아랫사람들의 곤란함을 외면하며 다람쥐처럼 날렵하게 꼬마들을 뒤쫓았다. 그녀도 절박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이대로 돈에 노리개까지 잃어버리면 나는 황실의 공식 등신이 되는 거야……!’
이번에 폐하께 시집온 이방인 공주 있잖아요, 생각보다 조금 모자란 것 같아요.
아니, 시내에서 노닥거리다가 소매치기를 당했다지 뭐예요?
네, 맞아요, 폐하께서 하사하신 품위 유지비요. 그거 다 우리 세금이잖아요.
‘뭐라고 헐뜯을지 벌써 뻔해. 나라 망신이라고.’
류하는 이를 아득 깨물며 속도를 높였다. 그 괘씸한 꼬맹이들, 잡히기만 해 봐라.
“야, 너!”
“으아악?!”
“그래, 너 말이야, 너. 버르장머리 없는 쪼끄만 놈아.”
그리고 불행 중 다행으로, 류하는 뛰는 속도가 몹시 빨랐다. 애초에 체력이나 날렵함 쪽으로 웬만한 사람에게 지지 않을 자신은 있었다. 그 재능이 이런 식으로 빛을 발했다.
“돈주머니 어디 있니? 내 돈 어디 있어? 물건만 순순히 넘기면 너는 그냥 보내 줄게.”
소년의 옷깃을 잡아챈 류하가 소년을 이리저리 흔들었다. 사냥감처럼 붙잡힌 소년은 악을 쓰며 그녀를 뿌리치려 애썼다.
“으악, 아줌마, 이거 놔요, 웬 미친 여자가 생사람 잡네!”
“뭐라고, 아줌마?”
류하의 이마에 힘줄이 섰다. 흠, 그냥 확 관아에 넘겨 버릴까?
원래는 온이 도착하기 전에 소년을 보내 주려 했다. 그런데 이 콩알만 한 놈이 지금 제 인내심을 시험한다.
“첫 번째, 나는 아줌마가 아니고. 그리고 두 번째, 너는 지금 상황 파악을 제대로 못 하고 있어. 멍청한 거야, 아니면 그냥 배은망덕한 거야? 이게 너한테도 더 좋다는 걸 왜 몰라?”
이때쯤 류하는 이미 북적북적한 큰길을 벗어난 뒤였다. 소년을 골목길에 몰아붙인 류하는 날카로운 어조로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아까 너 잡았던 키 큰 사내, 그자는 빈말이 아니었어. 정말로 관아 갈래? 그걸 원한다면 여기서 그냥 계속 고집부려. 그게 아니라면, 당장 내 물건 내놔.”
포악하고도 논리적인 협박에 소년은 눈을 부라리며 류하를 묵묵히 쏘아보았다. 그러나 그 쏘아보는 시선에 처량함이 스몄기에, 류하는 승리를 직감했다.
“관아까지 가기라도 하면 다행이지. 귀한 이의 물건을 탐한 죄로 목 하나쯤 잘라 버릴지도.”
류하는 과장을 보태 싸늘하게 덧붙였다. 소년의 눈망울이 한층 가련해졌다.
“아까 그 사람이 차고 있던 칼, 그거 진짜란다.”
류하는 온에게 조금 미안해졌다. 그를 어린아이조차 뎅겅뎅겅 베어 버리는 냉혈한으로 만들어 버렸잖아. 칼이 진짜라는 건 사실이었지만.
“……저한테 물건 없는데요.”
소년이 마침내 퉁명하게 쫑알댔다. 그러자 류하는 선녀처럼 방긋 웃었다.
“거짓말하지 마.”
해맑게 생글대는 주제에 말투는 몹시 사나웠다. 소년은 그 괴리에 진저리치며 타협하는 길을 택했다.
그가 돈주머니와 노리개를 꺼내 바닥에 내던졌다. 류하가 그를 놓아 주자 소년은 쪼르르 도망쳤다.
“끝까지 싸가지가 없네.”
발치에 구르는 물건을 주우며 류하는 눈살을 찌푸렸다. 얌전히 넘겨주면 어디가 덧나?
하긴, 이런 상황에서 예의나 차리고 있을 애라면 애초에 도둑질을 일삼지도 않았겠지.
“아가씨!”
익숙한 음성이 들렸다. 류하는 조금 웃고 싶었다.
이곳은 한적한 골목이라 아까 큰길과 달리 주변에 듣는 사람도 없는데, 저 고지식한 사내는 꼬박꼬박 정해진 가칭을 지킨다.
“대장군, 놀라게 해서 미안해요.”
“만나자마자 사과부터 하실 거면서, 대체, 왜…….”
온은 살짝 헉헉대며 류하 앞에 섰다. 이마에 땀방울이 반짝였다. 그가 류하를 노려보았다. 노려보는 시선에 적의는 없어서, 류하는 겁먹지 않았다.
“미안한 대신 효과는 있었어요. 여기 돈과 노리개는 찾았습니다.”
“고작 그거 되찾겠다고……!”
“고작? 고작이라뇨? 이거 그대 나라의 국고에서 나온 겁니다.”
“그래 봤자 푼돈입니다. 아가씨의 품위와 안전을 위협하면서까지 되찾을 만한 가치는 없는 금액이라고요.”
온은 짜증을 내면서도 한 가지를 상처로 담아 두었다. 그대, 나라의 국고. 우리의 나라가 아니라. 류하는 휘국 황제와 혼인한 뒤에도 무의식중에 선을 그었다.
“거금을 들고 나온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냥 오늘 쓸 정도만 조금 나눠서 가지고 나온 거면서 뭘 그리 목숨을 거셨습니까?”
“저기, 목숨까지 건 적은 없거든요?”
류하가 온의 왜곡에 황당해하는 찰나, 비가 떨어졌다. 처음에는 그저 한 방울, 톡. 그러다 후드득, 소리를 내며 물기가 내리더니 곧 세상을 습한 냉기로 채웠다.
“하, 젠장.”
설상가상으로 시작된 소나기에 온이 나지막이 욕했다. 그는 자신의 겉옷을 벗어 류하의 머리와 어깨를 덮었다.
그녀는 놀랄 틈도 없이 그의 외투에 폭 파묻혔다. 외투는 몹시 따뜻했다.
“아가씨는 손이 참 많이 갑니다.”
“뭐라고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혼잣말이었습니다만.”
“다 들으라고 한 말 같은데요.”
“사실 그것도 맞습니다.”
온은 부드럽게 투덜대며 팔로 류하를 감쌌다. 포옹은 아니었고, 단지 류하를 골목 밖으로 이끌기 위함이었다.
너무 무엄할까 봐, 또한 사심이 들어갈까 봐 살은 절대 스치지 않도록 아슬아슬한 거리를 유지했다. 그 위태롭고 불안한 접촉조차 따뜻했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일단 비를 피할 곳을 찾아야 합니다.”
“내 궁녀랑 그대의 부하는요?”
“아까 마마를 쫓으면서 놓쳤습니다. 아마 궐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겠죠.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겨 흩어지게 되면 그쪽에서 대기하라고 미리 부하에게 지시했습니다.”
“준비성이 철저하네요.”
“철저한 게 아니라 당연한 업무입니다, 마마.”
온은 류하를 다시 마마라고 불렀다. 그도 그럴 것이, 주변에는 정말로 아무도 없었다.
큰길로 나가 안에서 비를 피할 가게를 찾아보려 했으나, 너무 오래 헤매기에는 빗줄기가 점점 거세지고 있었다.
“잠시 여기 들어가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온이 미봉책으로 안내한 곳은 어느 허름한 폐가였다. 이 길 전체가 비슷한 느낌이었다.
사람들이 새로 살 곳을 찾아 우르르 빠져나가면서 유령 같은 집의 껍데기들만 주르륵 서 있었다.
류하는 폐가의 초라한 외관을 난감한 기색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당장 자신과 온이 소나기에 흠뻑 젖어가는 와중에 까다롭게 굴 생각은 없었다.
특히 류하는 온에게 미안했다. 자신은 온의 외투를 뒤집어쓴 탓에 그나마 상황이 양호했다.
류하는 자신들이 정말로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되기 전에 스스로 문을 열고 안으로 쏙 들어갔다. 온이 뒤따랐다. 그가 삐걱대는 현관문을 꼭 닫았다.
“윽, 콜록.”
걸음마다 뿌옇게 들뜨는 먼지 속에서 류하는 작게 기침했다. 온은 그 소리를 듣고 곧장 창문 하나를 열었다. 창문도 대문과 마찬가지로 모서리가 뻣뻣하게 녹슨 채였다.
“왜 여기 있는 집들은 이 모양인가요?”
공허한 실내를 돌아보며 류하가 물었다. 한때 가구가 있었던 자국, 천장에 묻은 거미줄. 버려진 연극의 소품처럼 쓸쓸했고, 애틋했다.
“집들이 너무 낡아서 아마 전체적으로 허물고 새 건물을 지으려 했을 겁니다. 그러다가 일이 하나씩 꼬이기 시작했겠죠. 집을 지으려는 자들과 재료를 대는 자들 사이에 마찰이 일어나고, 부지의 실제 소유주는 따로 있고, 그 사람의 의견은 또 다르고. 그러다 결국 조금씩 흐지부지됐을 겁니다.”
류하에겐 다소 난해한 이야기였다. 대도시의 재개발과 주거 문제를 둘러싼 여러 경제적 맥락들. 류하는 그런 것들을 공부해 본 적 없었다.
“그대는 참 아는 게 많네요.”
그녀가 무심코 말했다. 그래서 온도 무심코 대꾸했다.
“그야.”
대꾸하려다가, 참았다. 그는 시선을 돌려 표정을 감췄다.
“일국의 황족이 아는 게 적어서야 쓰겠습니까.”
한때 차기 황제로서 착실히 즉위와 통치를 준비하던 이는 유식할 수밖에 없었다.
전하께서는 분명 성군이 되실 거라고, 그의 스승들과 궁인들과 형제들이 전부 입을 모아 칭찬했다.
온의 이복형도 늘 온에게 비슷한 말을 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