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아가씨, 지금 저한테 노리개를 골라 달라고 말씀하신 겁니까?”
온은 당황해서 되물었다.
아무리 휘국에서 남녀의 역할 구분이 덜 경직돼 있다 해도, 꾸미는 건 여전히 대체로 여인들의 영역이었다. 지금 누가 누구에게 도움을 청하는 건지.
“왜요, 못 고르겠어요?”
류하는 단도직입으로 물었다. 그녀는 다시 한숨을 쉬려던 걸 참았다.
‘거봐요, 이래서 내가 제하한테 물어본 거라니까.’
그녀는 불평을 삼키며 다른 전략을 시도했다.
“그럼 이건 어때요? 둘 중에 그대의 정인한테 선물해 주고 싶다, 이런 생각이 드는 쪽을 선택해 주세요.”
“저는 정인이 없습니다.”
온은 쓸데없이 정직하게 대답했다. 아니, 사실 조금 성난 것처럼 들렸다.
생각보다 과격한 반응에 류하는 주춤했다. 그러다 곧 마음을 추스르며 야무지게 대꾸했다.
“가정을 해 보라는 거죠, 가정을. 상상력을 발휘하세요. 만약 그대한테 정인이 있다면 둘 중에 어느 걸 선물로 주고 싶어요?”
연모하는 여인에게 주는 선물이라면 아무래도 가장 예쁜 쪽을 고르려고 하겠지? 아무리 장신구 보는 눈이 없어도 그 정도 정성은 들일 수 있잖아.
정인. 정인이라. 상황을 급조하는 바람에 정말 불쾌한 가정이 나와 버렸다. 류하는 이를 악물지 않으려 애썼다.
“……저는 아마, 이쪽이요.”
온은 침착한 척 손을 들어 노리개 하나를 건드렸다. 바다처럼 푸른 실로 짜서 투명한 보석으로 장식한 모양이었다.
“제게 만약 정인이 있다면, 이걸로 선물하겠습니다.”
그는 류하를 똑바로 보며 부드럽게 말했고, 류하는 그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맞바라보았다. 속이 울렁거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류하는 괜한 예시를 든 걸 후회했다.
“그럼 이걸로 사야겠네요.”
류하는 온에게 선택받지 못한 노리개를 진열대에 내려놓고 다시 제하를 가까이 불렀다.
황제의 후궁들은 전부 품위 유지를 명목으로 넉넉한 용돈을 받았다. 후궁 본인이 번거롭게 현금을 들고 다닐 필요 없이 후궁을 가까이서 모시는 궁녀가 그 돈을 관리했다.
“제하야, 이걸로 계산해 줄래?”
“네, 아가씨.”
제하는 신속하게 상거래를 마쳤다. 그녀가 류하에게 구매된 노리개를 공손히 내밀었다. 류하는 흡족한 표정으로 물건을 받았다.
“아가씨, 옷깃에 달아 드릴까요?”
“되었다. 지금은 너무 수수한 복장이라 오히려 안 어울릴 것 같아. 나중을 위해 아껴 두지.”
“네, 아가씨.”
노리개 장착을 보류하는 류하를 보고 온은 한 가닥 아쉬움을 삼켰다. 잘 어울리는지 보고 싶었는데. 내가 골라 드린 거니까.
“그럼 더 돌아다녀보자. 대장군, 안내하세요.”
“네, 아가씨.”
오늘 온의 역할은 호위뿐 아니라 길잡이까지 아울렀다.
제하는 류하와 똑같은 이방인이었고, 온의 부하는 제국 토박이긴 했지만 감히 황제의 후궁과 스스럼없이 말을 섞을 정도로 지위가 높지 않았다.
그리하여 제국의 수도에서 나고 자랐으며 동등한 황족으로서 거리낄 게 없는 온이 오늘 안내를 도맡았다. 류하는 관광객 역할이었다.
“이 건물은 도시에서 가장 오래된 극장입니다.”
“우와.”
“역사적으로 유의미한 건물이라 시간이 흘러도 무너지지 않도록 황실에서도 꾸준히 관리하고 있습니다. 때로는 황족들과 귀족들을 위한 연극을 여기서 올리기도 하죠.”
“옛날에 월국 왕궁에서 악사들의 공연을 구경한 적 있습니다. 하지만 연극은 볼 기회가 없었네요.”
“이제 황궁에 오셨으니 얼마든지 기회가 있을 겁니다. 휘국 사람들은 지위 막론하고 모두 연극을 즐기니까요.”
“연극하는 걸 즐긴다는 뜻입니까, 보는 걸 즐긴다는 뜻입니까?”
“재능만 있다면야 연극하는 것도 즐기겠지만, 대부분 보는 걸 즐기는 쪽입니다. 전문적인 배우들은 따로 있으니까요. 관람객이 되는 건 훨씬 쉽습니다.”
“흠, 신기하네요.”
“뭐가요?”
“문화 차이가요. 아까도 내가 말했지만, 월국 왕실은 악사들을 불러 공연은 시켰어도 연극을 장려하는 건 보지 못했어요.”
“월국은 음악이 많이 발달했다고 들었습니다.”
“네, 맞아요. 수준 높은 악사들도 많지요.”
그리고 그중 다수가 지난 몇 년간 이 나라에 줄줄이 끌려왔지. 마지막 말은 삼가기로 했다.
“이곳은 사원으로 향하는 길입니다.”
류하의 돌연 가라앉은 분위기를 알아챈 건지, 온은 차분하게 화제를 돌렸다. 류하는 다시 집중했다.
수도의 시내에는 볼거리가 많았다. 사람도, 소음도, 냄새도, 전부 어지러울 만큼 넉넉하게 넘쳐흘렀다.
류하는 원래 대륙의 모든 도시가 다 이런 느낌인지, 아니면 휘국의 수도가 유독 활기찬 건지 궁금했다. 다른 도시에 가 봤어야 알지.
나는 별궁에 갇혀 살며 고향의 많은 것을 놓쳤구나. 매번 아쉬움만 늘었다.
“휘국 사람들은 신앙심이 강하더라고요.”
사원에 대한 설명을 듣던 류하가 문득 떠올렸다. 온이 끄덕였다.
“종교는 제국의 문화에서 중요한 부분입니다.”
“그대도 신을 믿나요?”
류하는 문득 덧붙였다. 궁녀와 대장군의 부하는 조금 거리를 둔 채라서, 류하의 나직한 질문은 오직 온에게만 들렸다.
“신이 없을 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온은 진지하게 대답했다. 류하도 진지하게 경청했다. 온은 담백하게 부연했다.
“세상의 어떤 일들은 단순히 우연이나 인간의 의지로 설명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이때 온의 시선은 잠시 류하에게 닿았고, 류하는 그 열기를 피해 도리어 눈길을 돌렸다.
단순히 우연으로 설명되지 않는다면, 뭘까. 운명? 류하는 그 낯간지러운 단어를 저어했다. 세상에 그렇게 거창한 동력이 실재할 리 없다. 실재해야 할 이유도 모르겠고.
하지만 가끔 그대의 저 눈빛을 받으면, 세상의 어떤 것들은 정녕 단지 우연이라는 시시한 핑계로 둘러댈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된다.
“이제 슬슬 식사하시겠습니까?”
온이 질문했다. 류하는 여전히 시선을 회피하며 끄덕였다.
“네, 그러도록 해요.”
부자들의 걸음이 자주 닿는 시내의 어느 구역에는 귀족들과 심지어 황족들까지 단골 삼은 식당이 하나 있었다. 황제도 잠행 도중에 종종 들른다든가.
황족이라 해서 무조건 궐 안에만 갇혀 사는 건 아니었고, 이따금 그들이 밖으로 나올 때 치안과 비밀 유지에 대해 걱정하지 않고 안전히 오갈 곳이 필요했다.
온이 류하에게 소개한 식당은 바로 그런 곳에 해당했다. 몇몇 믿을 만한 종업원들이 온의 얼굴을 알아보고 절도 있게 움직였다. 그들은 류하를 화려한 독방으로 안내했다.
“저와 제 부하는 옆방에 있겠습니다. 필요하다면 바로 부르십시오.”
“알겠어요.”
온은 류하에게 몇 가지를 당부한 뒤, 정중히 꾸벅이고 옆방으로 사라졌다. 제하는 류하의 식사 시중을 들기 위해 곁에 남았다.
‘이거, 괜히 찜찜하네.’
궁녀와 단둘이 남은 류하는 초조하게 궁리했다. 상황 자체보다는 본인의 마음 때문에 양심이 찔렸다. 도둑이 제 발 저리다더니, 지금 류하가 딱 그 꼴이었다.
‘뭔가, 내 사심 채우려고 놀러 나온 것 같잖아…….’
하필, 온이 호위라서. 이런 결과를 전혀 기대하지 않았다곤 차마 떳떳하게 주장할 수 없었다.
류하는 저잣거리가 궁금해서 저잣거리로 나왔고, 온은 그저 자신의 본분을 다하기 위해 후궁을 따라나선 것이다.
그걸 머리로는 다 아는데, 막상 이렇게 온의 안내를 받으며 돌아다니다 보니 마치 단둘이 몰래 나들이라도 나온 것처럼 류하는 마음이 거북했다.
‘……나들이는, 무슨.’
한데, 다시 곱씹어 보니 그것조차 자의식 과잉일지도 모른다. 나 혼자 고백했다가 나 혼자 차인 거인 거잖아.
정말 구질구질한, 심지어 살짝 패륜적이기까지 한 짝사랑이거늘, 아직도 내가 정신을 못 차리고 나들이네 뭐네 망상에 젖은 걸 알면 대장군은 어찌 생각할까.
그대가 보기에 나는 다만, 그대를 좋아한다고 간접적으로 고백했다가 다른 사내의 신부가 되어 버린 불편한 존재일 텐데.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입맛이 뚝 떨어졌다.
하지만, 이곳의 주방장은 요리 실력이 가히 강력했다. 류하의 입맛이 바닥을 쳤을 즈음, 종업원들이 음식을 대령했다.
처음에는 조금씩 깨작거리던 류하는 차츰 타오르는 열의를 갖고 식사에 임했다.
‘세상에, 진짜 맛있어!’
그릇들을 비우는 건 어렵지 않았다. 류하는 포만감을 느끼며 자리를 떴다.
점심을 해결하고 나서 류하와 일행은 다시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얼마 뒤, 일이 터졌다.
식당 밖으로 나오니, 날씨가 흐릿했다. 당장 비라도 쏟아질 것처럼. 쾌청하던 아침과 너무 달라진 분위기에 류하는 걱정스레 눈썹을 모았다.
“대장군, 아무래도 예정보다 일찍 환궁…….”
류하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그전에 온이 빠르게 움직였다. 그는 돌연 꼬마 하나를 낚아챘다.
다른 행인들 틈에 섞여 류하 곁을 지나치던, 겉으로 보이는 모습은 평범하기 짝이 없는 동네 꼬마였다.
“헛수작은 그만둬.”
온이 고압적인 저음으로 명했다. 그에게 붙들린 어린 소년도, 옆에 있던 류하도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았다.
특히 류하는 거의 배신당한 기분이었다.
“지금 뭐 하는 거예요?”
류하가 따졌다. 조막만 한 남자애가 제 몸집의 두 배쯤 되는 건장한 사내에게 짐승처럼 붙잡힌 광경은 퍽 살벌했다.
이 사람이 이렇게 도리 없는 인간은 아닌데. 그녀는 온이 어린아이를 학대하는 줄 알고 당황했다.
온은 류하의 항의는 아랑곳하지 않고 꼬마의 옷을 움켜잡았다. 류하의 당황이 깊어짐과 동시에, 소년은 울먹이며 몸부림쳤다.
“이, 이거 놓으세요!”
그러나 온은 거침없었다. 그는 빠르게 소년의 품속을 훑더니 손을 도로 꺼냈다. 그의 수중에는 명백하게 값비싼 팔찌 하나가 들려 있었다.
“이런 식으로 얼마나 가져갔지?”
온이 차갑게 물었다. 류하는 이제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눈이 동그래졌다.
본색을 들킨 소년은 쌕쌕대며 온을 노려보았다. 온의 눈빛에 자비는 없었다.
“소매치기?”
류하는 떨떠름하게 중얼댔다. 곱게 자란 공주는 이런 상황이 퍽 낯설었다.
공주만큼 곱게 크긴 했지만 세상 물정을 조금 더 아는 대장군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네가 한 건 정직하지 못한 일이야. 남의 것을 빼앗는 일이라고.”
대장군은 팔찌를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나중에 사람을 시켜 이 팔찌의 주인을 찾아내라고 명하면 될 터.
일단은 이 꼬마 범죄자를 어떻게 처우해야 할지가 관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