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정말 그런 적은 인원으로 괜찮으시겠습니까? 다른 마마님들을 보니 다들 열댓 명씩은 주렁주렁 달고 나가던데요.”
마지막으로 류하의 외투를 여며 주던 제하가 조심스레 여쭈었다. 류하는 면경에 비친 제 얼굴을 꼼꼼히 뜯어보며 태연하게 대답했다.
“그야 그분들은 외출할 때마다 친정에 들르는 거고, 나는 그냥 시가지 구경이나 하는 거라서 그렇지. 권세 높은 집안의 따님들이 오가는데 규모가 소박할 수는 없잖아?”
류하의 말마따나 다른 후궁들은 친정에 방문할 때나 출궁 허가를 받곤 했다.
다들 제국의 저명한 집안의 여식들이라서, 단순한 친정 나들이조차 결코 평범할 수 없었다.
“나는 인원이 적은 게 더 편해. 걱정하지 말렴, 제하야.”
류하는 궁녀를 보며 생긋 웃었다. 진심으로 불만은 없었다.
호위 둘, 몸종 하나. 자기가 황후나 황비였다면 모를까, 제 처지에 모자란 숫자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류하는 후궁의 예복 대신 평범한 양갓집 규수와 어울리는 단정하지만 수수한 의복을 입었다.
여름날에 걸맞게 얇은 외투를 걸쳤고, 황족의 신분을 입증하는 후궁의 인장을 챙겼다.
“이제 가자.”
류하는 제하를 데리고 밖으로 나섰다. 온과 온의 부하는 복도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온은 류하를 발견하고 다소 놀란 눈빛을 지었다. 그러나 곧 표정을 지우며, 평소처럼 정중하게 말했다.
“모시겠습니다.”
뭐야, 아까 그 표정은 뭔데. 옷차림이 너무 간소해서 놀랐나? 류하는 방금 온의 눈빛에 스쳤던 감정을 곱씹으며 괜히 자신의 옷자락을 매만졌다.
‘괜히 신경 쓰이게…….’
내가 뭘 입든, 저 사람이 무슨 생각이든 그게 무슨 상관이야. 신경 쓰지 말자.
류하는 내적으로 고개를 세차게 저어 불순물 같은 궁금증을 털어 냈다. 털어 내려고, 노력은 했다.
류하의 추론은 대부분 정확했다. 온은 류하의 의복을 보고 놀랐다.
후궁 신분을 감추고 나가는 거라고 해서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여태 혼례를 준비하며 화려하게 차려입은 새신부의 모습에 적응했던 온은 오늘 류하를 보고 내심 낯설어했다.
그리고 두 번째, 류하가 미처 상상하지 못한 또 다른 이유.
저분은 뭘 어떻게 입어도 아름다우시구나, 라고 무심코 결론짓는 순간 수치심과 죄책감에 사로잡혀 시선을 피해야 했다.
중증이다. 중증을 넘어선 불치병이야. 나 혼자 걸려 죽는 병이라면 차라리 다행이지.
온은 조용히 좌절하면서도 자신이 해야 할 일에 집중했다. 그가 엄숙하게 운을 뗐다.
“마마, 외출하기 전에 마마의 호칭에 대해 여쭐 게 있습니다.”
“네, 물어보세요.”
“아무래도 후궁의 신분을 감추고 조용히 외출하시는 거니 바깥에서 평소처럼 부르기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 당분간 형수님이라고 부르면 될까요?”
온의 태도는 언제나처럼 공손하며 덤덤했다.
기실 그는 류하를 보며 ‘형수’라는 단어를 언급할 때마다 속이 뒤집히는 느낌이었으나, 애써 내색하지 않았다.
류하도 비슷한 심정이었다. 그녀의 눈빛이 아주 미세하게 이지러졌다.
“……그냥 아가씨라고 부르면 어떨까요? 간단하고 좋은 것 같은데.”
류하는 태연한 척 필사적으로 제안했다.
사실 형수님이라는 호칭도 그리 복잡할 건 없었지만, 그녀의 본능이 그 이름을 거부했다.
궐 안에서 자기가 온의 형과 혼인했다는 사실을 일상적으로 상기하는 게 지긋지긋했다.
궐 바깥에서라도 그 낙인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온이 자신을 형수님이라고 부를 때마다 자신이 시동생을 마음에 담은 패륜아라고 비난받는 느낌이라서, 류하는 절박하게 대안을 제시했다.
“하지만 그건 혼인하지 않은 처녀에게 붙이는 호칭이잖습니까. 차라리 마님이라고 불러 드리면…….”
“그, 그럼 내가 너무 나이가 든 것 같잖아요? 그냥 아가씨라고 불러요.”
제발, 자꾸 내가 이미 결혼했다는 사실에 집착하지 말아 줄래? 류하는 속으로 간절하게 딱딱거렸다.
온은 살짝 난처해졌다. 마님이라고 불리면 너무 나이가 든 것 같다니, 궤변이었다.
휘국과 월국의 결혼 적령기를 생각했을 때, 수많은 여인이 류하처럼 스무 살 남짓에 혼례를 치르고 마님이 된다. 유부녀라고 해서 결코 젊지 않은 건 아니었다.
‘나이가 무슨 상관이라고.’
온은 여전히 떨떠름했지만, 굳이 이런 사소한 문제로 실랑이하지 않기로 했다. 그도 그 정도 융통성은 있었다.
마님이든 아가씨든 류하를 형수님이라고 부르는 것보다는 나았다. 온은 기꺼이 류하가 내민 대안을 받아들였다.
“알겠습니다, 마마. 바깥에서는 류하 아가씨라고 부르겠습니다.”
“고마워요.”
류하는 만족했고, 온은 안도했다. 둘 다 자신의 사심 어린 반응을 최대한 은폐했다.
호칭을 둘러싼 언쟁 아닌 언쟁 끝에 온은 류하를 궐문으로 안내했고, 일행은 정문이 아닌 후문을 통해 출궁했다.
처음에 류하는 자신을 묵묵히 따라 걷는 온을 의식하느라 계속 마음이 불편했다.
하지만 시끌벅적한 바깥세상은 볼거리가 참 많았고, 류하는 곧 다양한 것들에 정신이 팔려 거북한 마음을 잊었다.
“제하야, 여기 이것 봐. 어떤 게 가장 어울릴까? 네가 고르는 걸 좀 도와주렴.”
“어머, 세상에, 어쩜 좋아, 너무 예뻐요! 전부 다 예쁩니다. 도저히 고를 수가 없습니다, 아가씨.”
“최선을 다해 봐. 지금 나도 결정을 못 하는 중이거든.”
“으음, 그럼 저는 여기 이거랑, 아, 그리고 여기 빨간색도…….”
궐에서 나와 조금 걷자 북적거리는 장터가 나왔다. 그곳에서 호객 행위에 열중하던 방물장수의 물건들이 공주와 궁녀를 사로잡았다.
류하는 장터에서 장신구를 파는 상인들에 대해 오직 책에서만 읽어 봤다.
궁에서 왕족들은 자신들을 직접 방문하는 이들을 통해 사치품을 구했다.
그나마 그런 사람들조차 류하와 류하의 어머니가 사는 별궁에는 거의 오가지 않았기에, 류하는 왕족으로서 최소한의 품위를 유지할 정도로만 장신구를 지니고 살았다.
후궁으로 책봉되면서 황족에게 화려한 패물을 대거 하사받았으나, 그건 어디까지나 일방적이고 형식적인 선물이었고, 류하 본인의 취향은 조금도 반영되지 않았다.
장신구를 골라 보는 건 오랜만이었고, 궐외에서 골라 보는 건 난생처음이었다. 류하는 제법 들떴다. 그녀의 눈이 반짝이며 물건들을 훑었다.
“제하야, 이건 어떠니?”
“흠, 제 생각에는 그것보단…….”
제하가 자신의 의견을 나누려던 찰나, 온이 개입했다. 그는 퍽 못마땅한 기색으로 류하를 마주했다.
“아가씨, 이 아이에게 아가씨의 물건을 고르는 일을 맡기려는 겁니까?”
온은 나직하게 항의했고, 류하는 이 사람이 갑자기 왜 이러나 싶어서 멀뚱히 바라보았다.
제하는 부루퉁한 표정을 지었다. 제국의 대장군을 보는 궁녀의 눈빛은 결코 곱지 않았다.
“비록 오늘은 아가씨가 비교적 격식 없이 즐기시는 날이라 해도, 기본적인 본분은 잊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온이 새침하게 덧붙이자 제하는 표정이 더욱 썩었고, 류하는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아하, 체통을 지키라 이거지.
“하여튼, 고지식해서는.”
“네?”
“아닙니다. 제하야, 조금 물러나 주겠니?”
류하는 궁녀를 보며 상냥하게 청했고, 제하는 마지못해 너덧 걸음 물러났다. 한편, 온은 심각하게 중얼댔다.
“방금 저한테 욕하신 것 같습니다만.”
“아닌데요? 그냥 고지식하다고 했는데요? 그게 그대 기준에서는 욕인가 보죠?”
“보통 고지식하다는 걸 좋은 뜻으로 쓰지는 않지요.”
“글쎄요, 상황에 따라 아마 달라지지 않을까요?”
류하는 언짢은 마음에 공연히 심술을 내다가, 한숨을 폭 내쉬더니 온을 응시했다. 어느덧 진지해진 그녀의 눈빛에 온은 말없이 홀렸다.
“내가 지나치게 들뜬 마음에 경거망동해서 미안합니다. 내 생각이 짧았어요.”
류하는 단정하게 사과했다. 감정적으로 조금 야속하긴 했지만, 온의 엄격한 태도를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이해하기 너무 쉬웠다.
한평생 황태자로 자라 나날이 가장 고귀했던 그는, 아랫사람을 온화하게 다루는 법은 알았으나 허물없이 대하는 법은 몰랐다.
그의 온정은 항상 수직적인 질서를 대전제로 삼았다.
반면에, 거의 이름만 왕족이었지 사실상 방목돼서 자란 류하는 일개 궁녀에게 그토록 살갑게 굴면서도 위화감을 느끼지 못했다.
살아온 환경의 차이로 인한 별수 없는 괴리였다.
류하는 어차피 후궁의 신분을 숨기고 나온 지금 궁녀에게 의견을 구하는 걸 전혀 거북해하지 않았으나, 온은 어색하게 여겼다.
그가 류하에게 체통을 지킬 것을 당부하며 끼어들자 제하는 상처받고 물러났다. 류하도 상처받을 뻔했으나, 온의 입장을 곱씹으며 결국 자신의 뜻을 꺾었다.
“앞으로는 주의하겠습니다.”
류하는 더할 나위 없이 진지하게 약속했다. 그녀의 정중함에 역으로 당황한 건 온이었다.
“네, 뭐, 그리 말씀하시니 다행입니다.”
온이 여태 파악한 류하는 고집 세고, 가끔은 까칠하고, 자신의 감정에 상당히 꾸밈없는 사람. 게다가 가까운 이들에 대한 애착이 강했다.
그래서 자신이 궁녀에 대해 나무라자 이번에도 토라지실 줄 알았더니만, 웬걸. 의외로 무척 예의 바르게 반응하시니, 온은 감격할 지경이었다.
“그러니까, 그대가 날 대신 도와줘야 하겠습니다.”
류하는 가볍게 덧붙였다. 온은 혼란을 느꼈다.
“제가 도와 드리다니요?”
“내가 장신구 고르는 것 좀 도와주세요. 그대가, 저 아이 대신.”
류하는 한결같이 진지했다. 그녀는 자신이 장신구 보는 눈이 별로 없다는 사실을 객관적으로 알고 있었다. 그대가 내 도우미를 쫓아냈으니, 그 책임은 응당 져야겠지?
“일단 아까 내가 보던 것부터 보죠. 여기, 이 노리개. 둘 중 어느 쪽이 더 예뻐요?”
월국과 휘국의 장신구는 대체로 비슷했다.
굳이 다른 점을 꼽자면, 월국은 팔찌와 귀걸이 등등 몸에 직접 두르는 패물 종류가 다양하다면 휘국은 주로 옷에 장식품을 덧댄다는 것.
아마 휘국은 기후가 훨씬 추워서 몸을 꽁꽁 싸매는 날들이 많으니, 쉽게 가려지는 팔과 귀보다는 겉으로 보일 수밖에 없는 곳을 꾸미는 걸 선호하나 보다.
그리하여, 휘국에는 노리개가 발달했다. 류하는 앞으로 자신이 옷깃에 매달게 될 한 쌍의 장신구를 온의 코앞에 내밀며 그의 반응을 면밀하게 살폈다.